기억보다 먼저 사라지는 것, 질문
진료실에서 나이 든 어르신들을 보다 보면 흔히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요즘 자꾸 사람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고, 방금 하려던 일도 잊어버립니다. 혹시 치매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기억력을 걱정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약속을 잊지는 않고, 길을 잃지도 않으며, 집안일도 큰 어려움 없이 해낸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변화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자녀의 손을 잡고 진료실에 들어오는 어르신 가운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분들이 있다. 불편한 게 있는지 물으면 괜찮다는 대답만 반복한다. 그런데 같이 온 가족은 답답한 표정으로 말한다. 가스 불을 켜놓고 잊은 적이 있고, 같은 물건을 여러 번 사 왔으며, 길을 헤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검사 결과를 설명해도 특별히 궁금한 것이 없는 듯하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는다.
진료실에서는 이런 역설을 자주 만난다. 자신의 기억력에 의문을 표시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오히려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기억장애가 상당히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다. 치매는 단순히 기억을 잃어가는 병이 아니다.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능력도 함께 약해진다. 치매에서 기억보다 먼저 희미해지는 것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질문은 마음의 힘이다
우리는 질문을 그저 궁금하면 묻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한다. 그러나 뇌과학의 관점에서 질문은 우리 뇌가 수행하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활동 가운데 하나다. 질문은 먼저 뭔가 달라졌다거나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뇌는 눈앞의 새로운 정보를 과거의 기억과 끊임없이 대조하며, 익숙하지 않은 점이나 모순, 아직 설명되지 않는 빈틈을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전전두엽은 현재의 정보와 기존의 지식을 비교하고, 해마는 관련된 기억을 불러온다. 여러 연합피질은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하며 의미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도파민을 중심으로 한 보상회로가 작동하면, 단순히 ‘모른다’는 상태는 ‘알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바뀐다. 그러나 호기심만으로 질문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 능력, 실행 기능 등 뇌의 여러 체계가 협력해야 한다. 결국 질문은 단순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기억과 주의, 사고와 언어, 그리고 호기심이 함께 빚어내는 두뇌의 종합적인 작품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를 때보다 조금 알고 있을 때 더 많은 질문을 한다는 사실이다. 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능선의 모양이 왜 다른지, 암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계절마다 나무와 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해한다. 지식이 늘어날수록 질문도 함께 자란다.
알츠하이머병이 진행되면 기억력만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주의력과 판단력, 언어 능력,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시작하는 실행 기능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일에 흥미를 잃고 스스로 움직이려는 의욕이 감소하는 아파시(apathy, 무관심, 무감동)가 더해지기도 한다.
흔히 가족들은 “예전보다 순해졌어요” “이제는 아무 요구도 안해요.”라고 말한다. 이른바 ‘착한 치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귀찮게 하지 않음’이 마냥 좋은 징후는 아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고, 새로운 것을 알려는 마음이 사라진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질문은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열린 마음의 움직임이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궁금하고, 타인과 연결되고 싶으며, 자신의 생각을 계속 수정해 나갈 힘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인간을 향한 스핑크스의 질문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는 테베로 가는 길목을 지키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걸으며,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이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퀴즈이지만, 곱씹어 보면 이 질문은 인간의 일생 전체를 담고 있다. 우리는 연약하게 태어나 홀로 걸을 수 있게 되고, 결국 다시 누군가와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존재가 된다. 스핑크스는 인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너는 늙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어쩌면, 스핑크스는 정답을 맞히는 능력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답을 좋아한다. 확실한 병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검사 결과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확인하고 싶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틀리는 건지, 내 편인지 아닌지,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분명하게 구분하고 싶어 한다. 행복해지는 방법도 몇 가지로 정리해 주기를 바란다. 답은 우리를 안심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그런 답을 허락하지 않는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었지만, 인생의 수수께끼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늙어가는 나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한 번 답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스무 살의 답과 예순 살의 답이 다르고, 어제의 답과 오늘의 답도 달라진다. 삶이 변하면 질문도 변하고, 답도 함께 달라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얻는 일이 아니다.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일이다.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다시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며, 자기 삶도 끊임없이 새롭게 조정한다. 질문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성장하게 만든다.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도 완성된 해답이 아니라,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힘이다. 어쩌면 인간의 성숙은 답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답이 넘치는 시대의 질문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쉽게 답을 얻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구글에 검색하고, 챗GPT나 제미나이에 물으면 몇 초 만에 그럴듯한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사용해 본 사람은 곧 알게 된다. 같은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답의 깊이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 말이다. 막연한 질문에는 막연한 답이 돌아오고,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질문에는 더 정교한 답이 나온다. 어쩌면 인공지능 시대에는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보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더 큰 힘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를 단순히 ‘인공지능은 답하고 인간은 질문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도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을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수많은 질문 가운데 어떤 질문이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인지’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인공지능은 꽃의 이름과 생태를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나 길가의 작은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인간의 감탄이다. “이 꽃은 왜 여기 피었을까?” “지난해에도 이 자리에 있었을까?” “나는 왜 지금까지 이 꽃을 보지 못했을까?” 질문은 지식의 부족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놀라움에서 생긴다. 다른 사물(사람)에 관한 관심에서 생긴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다. 세상이 아직 낯설고 신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질문보다 단정에 익숙해진다. “원래 그런 거야” “살아보면 다 알아” “이 나이에 뭘 더 배우겠어.” 이 말들이 쌓일수록 세상은 더 이상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고,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조금씩 늙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노년기에 지켜야 할 것은 기억력만이 아니다. 궁금해하는 마음, 감탄하는 마음,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함께 지켜야 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 사람은 어떤 마음인지, 이 꽃은 왜 지금 여기 피었는지 같은 작은 질문들이 뇌를 움직이고, 사람을 세상과 이어준다. 기억보다 질문이다.
어제는 아버지가 술을 찾아서 냉장고에 있는 맥주 꺼내서 드시라했습니다. 자식들이 사다 쟁여놓은 논알콜맥주를 꺼내시더니 캔에 적힌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알콜 0라는 게 무슨 말이냐?” 그동안 논알콜맥주를 논알콜맥주인지 모르고 드시던 아버지가 드디어 논알콜인 걸 알게 된 거지요. 글자를 못보게 하려고 컵에 맥주를 따라드리는 속임수를 쓰기도 했습니다. 처음 만난 알콜없는 술 앞에서 아버지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술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거에요. 아버지의 맥락 속에 논알콜맥주는 형용모순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물이었던 게지요. “이것은 술이 아니다!” 저는 이것은 술이다라고 우겼는데.. 하하 꼬치꼬치 묻고 따지는 알츠하이머 아버지는 피곤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