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무죄를 가치있게 만드는 법

어느 날 후배 변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40여년 전, 대학 4학년 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건에 대해 당시의 체포와 수사, 구속은 모두 위법했으니 재심을 청구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대개 그러했듯, 나 역시 “학우여”를 외치자마자 교내에 진을 치고 있던 사복경찰 수십명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끌려갔다. 미란다…

죽음은 순수한 물음표다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그린비 어머니의 얼굴 카페 사담에서 주최한 데스카페에 다녀왔다. 데스카페는 2011년 영국에서 시작된, 차와 케익을 앞에 두고 죽음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만 모일 거라는 생각은 오해다. 최근 가까운 친구를 떠나보낸 30대, 아이가 죽음에 대해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렵다는 젊은 엄마,…

<2회>치매 어르신과의 대화법 ― 기억을 묻지 말고 ‘지금’을 물어라

“기억 안 나세요?”라는 질문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더욱 힘든 여름이었다. 젊을 때와 달리 더위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고 갈증도 잘 느끼지 못하다 보니, 탈수와 탈진으로 병원을 찾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았다. 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여든다섯 살 할머니가 딸과 함께 진료실에 들어왔다. 기운이 없고 입맛도 떨어졌다고 했다. 진찰해 보니, 더위에 지친 데다…

가당치 않게, ‘가능주의자’

짜증과 답답함이 최고기온만큼이나 매일 기록을 경신 중이다. 기후위기를 걱정하면서도 에어컨 없이는 못 살겠고, 서울에 와 집값을 보면 아득해진다는 지방 청년의 하소연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다. 노력하면 된다는 능력주의의 주문은 강력하지만, 출발선부터 기울어진 경쟁에서 승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기대도 접은 지 오래고, 다른 전망도 안 보인다. 자책과 원한, 혐오와 냉소,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

[2026년 8월호] 우리는 어쩌면 ‘호모댄서스’?

제 친구 중에는 춤추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중 한 친구는 그 경험을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통해 저는 자이브, 룸바, 차차차, 삼바, 왈츠, 살사, 탱고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친구들이 모이면 시연도 벌어집니다. 모두 흥이 나서 따라 하지만 하체와 상체가 따로 논다는 벨리 댄스 앞에서는 대부분 좌절하지요

<1회> 질문하며 늙는다는 것-나이 들어도 세상을 향한 물음을 놓지 않는 삶

기억보다 먼저 사라지는 것, 질문 진료실에서 나이 든 어르신들을 보다 보면 흔히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요즘 자꾸 사람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고, 방금 하려던 일도 잊어버립니다. 혹시 치매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기억력을 걱정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약속을 잊지는 않고, 길을 잃지도 않으며, 집안일도 큰 어려움 없이 해낸다. 나이가 들면서…

(2화) – 이러다가 마을 ‘인싸’ 되겠어

1. 이사떡은 어디까지 돌려야 되나? 제주에 입성하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이웃에게 떡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사에 짜장면과 이사떡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과 다름없으니까^^ 오메기떡을 잘 한다는 아주 오래된 작은 방앗간을 소개받았다. 하지만 이사떡은 역시 시루떡이다. 그런데 얼마나 맞춰야 할까? 친구가 묻는다. 어디까지 돌릴 거야? 말문이 막혔다. 어디까지 돌려야 하지? 아파트처럼 옆집, 아래 윗집이…

나답게 죽을 수 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

<나는 나답게 죽기로 했습니다>, 나이토 이즈미 지음. 마음의 숲 가정 호스피스의 씨앗을 뿌린 의사 나이토 이즈미 <나는 나답게 죽기로 했습니다>의 저자 나이토 이즈미는 재택 호스피스 의사다. 1956년생인 그녀는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일했다. 초보의사 시절, 나이토 이즈미는 근무하던 병원에서 자신과 또래인 백혈병 환자 유키를 만났다. 유키는 무의미한 생명연장치료를 중단하고 남은 시간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어느 날, ‘뭐라구’가 왔다

어머니 살아생전 식구들과 둘러앉은 식탁에서 가장 많이 하셨던 말은 “뭐라구?”였다.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맥락 파악이 잘 안 되는 건지 누군가 한마디할 때마다 매번 그렇게 되물으셨다. 당연히 이야기는 툭툭 끊겼다. 그래도 우리는 “궁금해서 그러실 거야” “답답하시겠지”라며 다시 말하거나 조금 더 천천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늘 그렇게 사려 깊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