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노트를 다시 보다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의존한 연명을 하다 죽기는 싫다’,
‘남겨진 사람이 내 주변정리를 하는데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는 나누고 싶다’
내가 엔딩노트에 적어놓은 글이다. 연재를 시작하고 중반까지만 해도 나의 관심사는 삶에 대한 주도권과 자기결정권에 쏠려 있었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는 ‘장례희망’이 아닐까도 생각했었다. 그 사이 고작 8개의 글을 썼지만 업로드 주기가 들쭉날쭉해 어느새 1년 반이 훌쩍 지났다. 연재기간이 이렇게까지 늘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엔딩노트를 열심히 써보자’로 이 시리즈를 마무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때와 현재의 나 사이에는 죽음에 관한 여러 공부가 개입되었다. 죽음탐구 세미나(2024), 의료화된 노년에서 탈출하기 강좌(2024), 나이듦과 생명 세미나(2025)에 이어 2025년 두 번의 워크숍(엔딩노트 작성, 존엄사 찬반토론)까지. ‘죽음’, ‘노년’, ‘생명’을 주제로 한 공부는 나를, 나의 장례희망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내 머릿속에 죽기 전에 정리할 목록이 지금은 꽤 단출해졌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시 한 번 업데이트된 것은 최근 희정 작가의 <죽은 다음>을 읽고 나서이다. 책을 펼치면 고복, 반함, 성복, 발인, 반곡, 우제, 졸곡의 순으로 우리나라의 전통 상례를 따른 장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각 장의 표지 아래에는 시신 검안부터 유골함 봉안까지 현실에서 이뤄지는 실질적인 장례순서와 내용이 정리되어 있어 마치 장례 백과사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가 마치 영화를 보듯 그들을 훔쳐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장례지도사가 되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장례지도사, 의전관리사, 시신복원명장, 수의제작자, 생전장례식 기획자, 선소리꾼, 무연고장례지원단체의 대표, 반려동물장례지도사 등 다양했다. 서늘한 염습실에서 선배를 따라 땀을 흘리고, 의전관리사(장례도우미)로 상주들의 마음을 살피며, 무연고 장례식에서 상주의 역할을 해 본 그가 남긴 글은 곡진함이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장례지도사의 이야기에 조금 더 끌렸다.
마음으로 하는 일
‘고독사’를 하더라도 육신이 소멸되는 마지막까지 혼자는 아니다. 그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장례지도사이다. 특히 처음 상주가 되었을 때 장례지도사에 대한 의존도는 훨씬 크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분의 운구를 재촉하길래 근처의 종합병원 장례식장에 먼저 전화를 했었다. 작은 빈소는 자리가 없고 특실만 있다고 했는데, 내가 덜컥 특실을 예약해버린 것이다. 이어 통화가 된 장례지도사가 재빠르게 정리를 해 줘서 다른 병원의 적당한 빈소를 예약할 수 있었는데 하마터면 유명인사들이나 사용하는 넓은 방에 덩그러니 모여있을 뻔 했다. 현재의 장례 시스템에서 장례지도사는 그야말로 장례식 행사의 총 책임자의 역할을 한다. 이때 상주는 제작자와 비슷해서 행사의 내용을 확인하고 비용을 지불을 승낙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 희정이 바라본 장례지도사의 역할은 결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는 장례지도사의 일을 취재하기 위해 300시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장례지도사의 자격으로 염습실에서 선배의 작업에 동참한다. 최대한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심에 더해 용기와 열의가 느껴진다. 그 서늘한 공간도 어떤 이가 고인을 수습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했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애틋했다가, 때로는 무심하다. 윤재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숨>에는 대통령의 염장이로 알려진 유재철 장례지도사가 실제로 염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인의 손과 팔을 잡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산 사람을 대하는 듯 보인다. 희정이 만난 장례지도사 중에도 유재철처럼 맨 손으로 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신의 입술이 너무 메말랐다고 대뜸 자신이 쓰는 립밤을 꺼내 발라주는 사람도 있었다. 몸이 굽은 채로 사망한 경우에는 관에 넣을 수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몸을 만져 똑바로 펴는 일도 해야 한다. 반면 기저귀도 빼지 않고 수의를 입혀놓고는 입관식에서 사별자들이 보게 될 관은 아주 멋지게 장식하는 사람도 있다. 염을 한다는 것은 몸보다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죽어서 어떤 장례지도사를 만나게 될까. 그건 각자의 복이란다.
“좋은” 시체를 만드는 사람들
장례지도사를 하다 보면 그 일만으로 성에 안차는 경우도 있다. 김영래 명장은 시신복원 전문가이다. 베테랑 장례지도사가 되었다고 자부할 때쯤 다리 한 쪽이 없는 시신을 만났다고 한다. 대충 수습하고 나서 안타까운 마음에 밤잠을 설친 후 독학으로 시신복원을 공부하고 실습했다. 그는 이제 20년 경력의 전문가다. 시신의 훼손정도가 심한 경우 복원하는 데만 여섯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그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작년 이맘때 동료들과 무안국제공항의 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희정은 이 일이 누군가의 마지막을 바꿀 수 있는 작업이기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일을 해주시는 분들 있다는 사실에 나또한 새삼 감동을 받는다.
윤재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숨>(2023년)에는 김새별 유품정리사가 나온다. 그 역시 원래 장례지도사였는데 장례를 치른 후 상주인 딸이 아버지가 객혈을 하며 쓰러졌던 집을 수습하지 못해 자신에게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일을 시작했다. 영화에서 그는 한 남자가 고독사한 원룸을 청소한다. 사후 두 달 여만에 발견된 까닭에 집 바닥에 체액의 오염이 심각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어지러이 널려있는 집안의 물건들을 정리하다보면 고인의 삶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기도 한다. 말라비틀어진 라면과 술병들이 뒹굴고 있는 한켠 노트북과 각종 장비들 틈에 IR52 장영실상 상장이 놓여있다. 이 방에 살았던 그는 한때 뛰어난 과학기술자였던 것. 남아있는 삶의 작은 조각이 그를 ‘있었던 사람’으로 만들고 그를 생각하게 한다. 애도의 순간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니 유품정리사의 일이란, 죽은 이의 흔적을 지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애도의 권리를 넘겨주며
앞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은 의료화된 노년을 살다가 상업화된 장례식장에서 죽는 일이다. 희정은 이를 “죽음을 향한 우리의 정동이 시장에 갇혔다.”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장례, 애도와 관련된 일을 ‘없음의 노동’이라 부를 때, ‘없음의 노동’을 통해 있음과 없음 사이에 누군가의 ‘있었음’이 새겨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있었음’의 의미는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정은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며, 지금의 ‘나’는 내가 맺어온 관계의 총체”라고 말한다.
나의 마지막에 대해서 과연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디까지 일까. 또한 마지막에 대한 결정이 나의 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존엄한 삶의 마무리는 애도할 권리로 이어진다”고 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군가와 관계 맺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 전부 아닐까.
<죽은 다음>에는 남겨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있었던’ 사람이 되면 그 뿐이다.
그러니 엔딩노트를 다시 쓴다면 이렇다.
“나의 마지막은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습니다.
그 외에는 남은 사람들에게 맡겨둡니다.”
그동안 좋은 시체를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