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살아생전 식구들과 둘러앉은 식탁에서 가장 많이 하셨던 말은 “뭐라구?”였다.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맥락 파악이 잘 안 되는 건지 누군가 한마디할 때마다 매번 그렇게 되물으셨다. 당연히 이야기는 툭툭 끊겼다. 그래도 우리는 “궁금해서 그러실 거야” “답답하시겠지”라며 다시 말하거나 조금 더 천천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늘 그렇게 사려 깊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왜 그렇게까지 다 들으려고 하실까. 적당히 못 알아들어도 그냥 넘어가시면 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는 “뭐라구?”를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라기보다 늙음을 초연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안간힘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후배들과 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계속 “뭐라구?”를 연발하고 있는 것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노화의 방식도 유전인지, 나도 얼마 전 황반변성 초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겁이 난 나는 ‘루테인’을 열심히 챙겨 먹는다. 그런데 급기야 “뭐라구?”라고 되묻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러다가 민폐 덩어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엄마처럼 버티지 말고, 때가 되면 늦지 않게 보청기를 끼겠다는 결심도 한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할까? 보청기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날이 결국 오지 않을까?
옛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노년은 감각이 하나씩 꺼져가는 서글픈 종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부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고 오직 자기 내부에서 기쁨을 길어 올리는, 실존의 정점이었다. 육체의 쾌락도, 사회적 야망도 더는 붙들지 않고, 시선을 안으로 구부려 자신의 평정을 조율하여 마침내 독립적이고 충만한 상태에 이르는 것. 그들은 그 이념을 향해 ‘가장 빠르게 노년으로 달려가기’ ‘마지막 날처럼 오늘을 살기’ 같은 말들을 벼려냈다.
어머니가 “뭐라구?”라고 한 것은 어쩌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노년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모리의 정원’이 없었다. 평생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자식을 키우느라, 어머니의 눈과 귀는 온통 바깥을 향해 있었다. 나는 어떨까? 속수무책 늙음이 오고 있는 이때,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스토아적 현인이 말하듯이 그것이 어느 날의 회심이 아니라 매일의 단련 속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라면,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는 일상을 조금씩 더 견결하고 단순하게 만드는 훈련이 필요하다. 내게도 “뭐라구?”가 올 때마다, 그 말이 세상을 붙잡기 위한 외침이 아니라 내 안으로 향하는 조용한 질문이 되는 연습부터 시작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