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이희경의 한달 제주살이 중 친구와 함께 새벽바다에서 한 컷

‘두 거점 생활’, 우에노 지즈코의 싱글 에이징을 엿보다

이번 여름, 나는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았다. 작년 연말 북토크 때문에 제주 조천에 갔었는데, 그때 우연히 만난 선흘 그림할망들에 완전히 홀렸고, 반드시 한 달쯤 시간을 내어 할망들의 세계를 인류학적으로 탐색해 보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처음 계획은 단순했다. 한 달 동안 한편으론 할망들을 탐구하고, 또 한편으론 혼자 조용히 밀린 글을 쓰다가 힘들면 평상시 읽고 싶었던 책을 룰루랄라 읽으며 보내는 것. 그래서 책을 거의 30권쯤 싸 들고 갔다. 하지만 그 책들은 표지도 들춰지지 않은 채 다시, 고스란히 용인으로 돌아왔다. 예상과 달리 제주에서는 책 따위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할당제, 형식 아닌 비전으로

개인적인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나는 이재명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초등입시반’ 같은 아동학대 수준의 경쟁교육이 사라지고, 가난한 노인이 고립된 채 살다가 6개월 만에 발견되는 일이 없으며, 외모나 성 정체성 때문에 차별받거나 놀림거리가 되지 않고, 노동자가 혼자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몸이 조각나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정권이 성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남자의 자기돌봄 기술에 관하여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 마크 포스터 감독, 미국, 2022년 위태로운 남자 노인들 현재 한국의 노인 남성이 직면한 두 가지 어려움은 빈곤과 외로움이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한국인의 자살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27.3명이다. OECD 국가들 간의 연령구조 차이를 제거한 OECD 국가 연령표준화 사망률로 계산해도 평균이 10.7 명인 데 비해 한국은 24.8명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좋은’ 요양원을 생각하며

1. 2019년 대한민국 요양보고서  2019년 5월 한겨레신문 기획으로 <2019년 대한민국 요양보고서>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첫 기사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기자가 직접 요양원에 취업하여 한 달 간 요양보호사 업무를 수행한 후 쓴 기사였다. 기자는 한 달간 “요양보호사로 일했지만 ‘돌봄’을 제공하진 않았다. 그저 딱 필요한 만큼의 ‘처치’만 이뤄졌다.”고 밝혔다.(한겨레신문 2019.5.13. 기사에서 발췌) 요영보호사 2명이 18명의 식사를…

[종교와죽음] 비구 법정의 엔딩노트

『소설 무소유』, 정찬주, 열림원 오도송과 열반송 얼마 전 아버지 구순을 맞아 가족여행을 하던 중 고성의 화암사를 방문했다. 일주문을 지나 절 경내로 들어서기까지 1키로 남짓한 길 양쪽에는 선사들의 열반송과 오도송을 새긴 석비가 이어져 있었다. 길을 가며 그 오도송과 열반송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도송은 선사들이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한 시이고, 열반송은 열반에 들기 전에 남긴…

취약한 몸들의 정치성

올 3월 나는 경기도 수어교육원에 수어를 배우러 잠시 다녔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고,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해 등록했지만, 주 2회 수원까지 가서 2시간 수업을 듣는 일정은 예상대로 다소 무리였다. 결국 2주 만에 포기했다. 그러나 그 2주 동안의 짧은 배움은 강렬했다.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건, 수어는 수화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수어의 정식 명칭은 ‘한국수어’다. (여기서 잠시 퀴즈. 한국수어와 미국수어는 같을까, 다를까?)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함께 대한민국의 공용어다. 그리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청인(聽人)’, 한국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농인(聾人)’이라 부른다. 즉, 청인과 농인은 언어적 정체성이 다른 별개의 집단일 뿐이다.

곰과의 위험한 공존

매년 이맘때 즐거움은 환경영화제 출품작을 감상하는 일이다. 올해 나의 ‘원픽’은 안드레아스 피흘러 감독의 다큐멘터리 <곰과의 위험한 공존>이다. 곰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존재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브래드 피트가 침대가 아닌 숲에서 곰과 결투를 벌이며 죽음을 맞이할 때, 나는 영화의 대사처럼 그것을 ‘좋은 죽음’이라고 여겼다. 장자크 아노의 <베어>를 통해서도 나는 곰의 힘, 용기, 지혜, 관용에 깊이 매료됐다.…

[돌봄]함께 돌볼 수 있다면

1.『침몰가족』을 읽다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는 기사를 클릭했다가 책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찾아 읽게 되었는데 감독인 아들과 그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 인상을 뛰어넘었다. 사연인즉슨, 1995년 봄 도쿄에 있는 한 연립주택의 골목에 붙은 전단지로 시작된다. “공동(?)육아 참가자 모집중”이라는 내용이었다. 태어난 지 만 1년이 지난 아기(가노 쓰치)를 함께 돌보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요리하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왜 남자들은 기를 쓰고 불행하게 살까』   김정대 지음, 바오출판사 왜 남자들은 기를 쓰고 불행하게 살까. 김정대 신부는 영화 <친구(2001)>와 <써니(2011)>의 비교를 통해 남자들의 친구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지적한다. <써니>에서 칠공주로 나오는 각 인물들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때문에 학창시절 뿐 아니라 훗날 다시 만났을 때에도 각자의 처한 현실의 어려움을 상대방에게 털어놓으며…

[치매]치매와 함께 살아가기

『기억하지 못해도 여전히, 나는 나』사토 마사히코 지음, 세개의소원   우에노 지즈코는 <돌봄의 사회학>에서 사회적 약자를 권리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개념으로 ‘당사자 주권’을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우에노 지즈코에 따르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이 충족되는데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보는 권리 주체가 당사자다. 장애인은 그동안 장애인 운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 당사자 주권을 요구해왔지만 노인은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