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충격적이었다. 열세 살 소년이 또래 소녀를 칼로 살해한 뒤 자기 집에서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해간다. 카메라는 점층적으로 학생과 교사의 불통이 일상화된 학교, 자녀 부양에 최선을 다하지만 닫힌 방문 안에서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는 부모, 그리고 오직 ‘칼’이라는 물리적 증거만 찾아 헤매는 경찰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소년의 시간’에 얼마나 무지한지가 드러난다.
드라마 속 소년은 ‘메노스피어’라는 남초 커뮤니티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레드필’을 삼킨다. 세상은 80 대 20의 법칙으로 굴러가며, 20%의 남성이 80%의 여성을 차지한다는 것이 그가 믿는 진실이다. 그 속에서 소년은 자신을 못생긴 ‘인셀’(비자발적 독신)로 정체화한다. 유독한 남성성과 여성 혐오를 퍼뜨리며 개인의 취약성을 사냥하는 온라인 생태계 속에서 그는 수치와 불안, 자기혐오를 반복하다 결국 폭력으로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다행히 최근 본 독립영화 <3학년 2학기>으로 숨통이 좀 트였다. 영화 속 실업계 고3들에게 수능은 뒷전이다. 더 큰 문제는 2학기 실습 기관이 ‘중견’이냐, ‘중소’냐이다. 주인공 창우와 친구 우재는 중견 기업을 원했지만 서류에서 탈락했고, 선생님은 중소 기계제작 회사를 추천한다. 창우는 이곳에 들어가면 경인공전에 다닐 수 있고, 34개월 병역특례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끌린다. 반면 우재는 사회생활의 출발선이 중요하다며 중견을 고집한다. 일하면서 주말에 대학까지 다니면 놀 시간이 없다고도 생각한다. 차라리 해병대 18개월이 더 낫다고도 본다. 그러나 결국 우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친구다. 두 사람은 함께 그라인더가 윙윙대고 용접 불꽃이 튀는 현장으로 들어간다.
이 영화의 특징은 빌런이 없다는 것이다. 교사도, 사수도, 사장도 저마다의 선의와 ‘어쩔 수 없음’을 동시에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다. 창우의 사수 한 주임은 다정하지만, 현장의 문제를 대신 해결하진 않는다. 송 대리는 실습생들을 구박하면서도 현장이 굴러가도록 애쓴다. 사장은 갈변된 사과 한 쪽도 버리지 않을 만큼 소박하지만, 정작 실습생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비조차 주지 않는다. 그사이 우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떠나고, 창우는 그라인더 날에 팔을 다친다. 현장 개선을 요구하던 또 다른 실습생은 오토바이 배달로 전업한다.
갈등, 특히 젠더 불통이 극에 달한 지금, 나는 냉정한 분석과 서늘한 비판만큼이나 응시와 성찰, 응답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각자 주변에서 또 다른 소년의 시간을 더 많이 말하고 듣고, 그 시간에 개입해 얽혀들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