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제도와 자율 사이에서

오랫동안 ‘비국가적인 삶’을 지향해왔다. 국가와 제도가 규율하는 규범적이고 화폐적인 삶 바깥에서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원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살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인문학 공동체를 꾸렸고, 그것을 “친구와 함께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작고 단단한 네트워크”라고 불렀다. 우리는 공부가 삶이 되고, 일상이 공부가 되기를 꿈꾸었다. 나아가 수천 개의 공부가 수천 개의 삶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 삶들이 서로 마주쳐 국가 외부의 마을들이 생겨나기를 소망했다.

에디터 이희경의 한달 제주살이 중 친구와 함께 새벽바다에서 한 컷

‘두 거점 생활’, 우에노 지즈코의 싱글 에이징을 엿보다

이번 여름, 나는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았다. 작년 연말 북토크 때문에 제주 조천에 갔었는데, 그때 우연히 만난 선흘 그림할망들에 완전히 홀렸고, 반드시 한 달쯤 시간을 내어 할망들의 세계를 인류학적으로 탐색해 보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처음 계획은 단순했다. 한 달 동안 한편으론 할망들을 탐구하고, 또 한편으론 혼자 조용히 밀린 글을 쓰다가 힘들면 평상시 읽고 싶었던 책을 룰루랄라 읽으며 보내는 것. 그래서 책을 거의 30권쯤 싸 들고 갔다. 하지만 그 책들은 표지도 들춰지지 않은 채 다시, 고스란히 용인으로 돌아왔다. 예상과 달리 제주에서는 책 따위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취약한 몸들의 정치성

* 이번 호의  표지 삽화는 마을활동가 김윤경님의 작품입니다. 오프닝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한국어’돌보다’에 대응하는 한국수어를 그려주셨습니다 . ‘살피다’+’위로’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하는군요.  앞으로 나이듦아카이빙을 위한 김윤경 활동가님의 삽화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오프닝 취약한 몸들의 정치성 에디터 이희경 올 3월 나는 경기도 수어교육원에 수어를 배우러 잠시 다녔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고, 더는 미룰 수…

‘지역통합돌봄’, 2026년 3월에 제대로 시행될 수 있을까?

 오프닝 에디터, 이희경 ‘지역사회통합돌봄(community care)’ 은 병원이나 요양원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곳에서 늙어가고 죽을 수 있게 지역차원에서 돌봄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개념이다. 1940~50년대 서구 복지국가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 주로 참고한 사례는 일본의 ‘지역포괄케어 地域包括ケア(ちいきほうかつケア)’이다. 우에노 지즈코에 따르면 일본의 지역통합돌봄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이었던 고이즈미…

노인, ‘주택’이 아니라 ‘마을’에 살아야 한다

오프닝 에디터, 이희경 초고령사회를 코앞에 둔 작년 7월 23일, 최상목 부총리가 주재하는 소위 경제관계장관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의 여러 안건 중 단연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시니어 레지던스 활성화 방안’이었다. 이날 기재부의 보도자료에는 이것과 관련하여 “인구 감소 지역에 분양형 실버타운을 도입하고, 저소득층 대상 고령자 복지주택도 매년 3천 호씩 공급하는 등 고령층 친화적 주거 공간과 가사·건강·여가…

유니트케어가 무조건 좋은 것일까?

오프닝 유니트케어가 무조건 좋은 것일까? 에디터, 이희경 우리는 몇 개의 레거시 언론과 온라인 신문, 그리고 노년 이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전문 매체를 구독하고 그 속에서 나이듦 관련 기사를 수집, 기초 자료로 정리한다. 이후 연구원 전체가 참여하는 편집회의를 통해 수집한 기사 중 픽 할 것과 버릴 것을 결정하면서 그달 <나이듦아카이빙>의 큰 방향을 결정한다. 이후 담당자가 [스크럽…

연명치료중단, 싸인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닌 이유

오프닝 연명치료중단, 싸인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닌 이유 에디터, 이희경 이번 호 나이듦아카이빙의 스크랩플러스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온 기사는 임종 직전 고령자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연명치료에 노출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연명치료 중 1위는 혈압상승제였다고 한다. 혈압상승제라… 그 단어가 갑자기 나를 6개월 전으로 플래시백 시켰다. 진짜 무더웠던 작년 여름 어느 날, 저녁 식사까지 잘하신…

나의 마지막 이기적 결정

오프닝 원혜영에 대한 추억 에디터, 이희경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이다. 35년 전의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김문수, 이재오, 장기표, 원혜영, 제정구, 유인태가 한 편이던 시절이어서 그렇다. 진보정당을 만들려고 했던 김-이-장 등과 민청학련 출신으로 당시의 ‘양 김구도’를 넘어서는 ‘제삼지대’로서의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었던 원-제-유 등이 3개월 정도 짧은 동거를 했었다. 이름하여 <민중의 정당 건설을…

‘모두’에게 친절하고 평등한 극장

오프닝 에디터, 이희경 나의 시네필(Cinephile) 유전자는 어머니에게서 왔다. 어머니는 시골 촌놈 출신인 아버지와 달리 자기는 세련된 도시 여자였다는 점을 즐겨 어필했는데, 출판사 직장생활 경력, 그리고 수집해 놓은 수백 장의 영화 포스터가 그 증거였다. 중학생 이후 헐리웃 키드가 된 나는 그 포스터를 마르고 닳도록 보면서 데보라 카, 몽고메리 클리프트,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배우는 통합돌봄

통합돌봄,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사례에서 배우자 올해 3월 제정된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통합돌봄지원법)은 이전 정부에서 시행한 사업 평가를 기반으로 지역 의료와 연계된 돌봄을 강화하는데 집중되었다. 주요 내용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돌봄이 필요한 당사자를 발굴, 지원, 주민참여 등을 포괄하는 책임을 지고, 국가는 이를 위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법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