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카나_자이나교의 자발적 단식존엄사』 양영순지음, 씨아이알(2025)
의사조력 자살, 안락사일까 존엄사일까
형제들과 돌아가며 아버지 돌봄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가 있다. 아마도 우리가 부모님 돌봄을 하는 마지막 세대, 자식들에게 돌봄을 받지 않는 첫 세대가 될 거라는데 내 형제들은 모두 동의한다. 자식들에게 돌봄을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할 생각도 없는 마처세대여서 일까? 동생 중 한 명은 말기암이나 불치병을 앓게 되거나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 자신은 요양원으로 가지 않고, 의사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스위스에 갈 거라고 선언했다.
의사조력존엄사란 생애 말기에 불치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치사약을 처방받되 그 투약의 결정은 본인 스스로 하는 죽음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병원 중환자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에 따라 생명연장을 중단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유하 작가는 말기암으로 투병하다 스위스행을 선택한 어머니를 동행한 이야기를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사계절, 2025)로 풀어내고 존엄사 합법화에 동참하고 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일까.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메리 킬즈 피플’도 죽음을 처방하는 의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의사조력 존엄사 합법화를 둘러싼 찬반논쟁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의사조력사망을 합법화한 나라들도 그 죽음을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이라고 하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스페인에서는 안락사(Euthanasia)라고 부른다. 미국의 경우 오리건주, 메인주, 워싱턴주는 존엄사(Death with dignity)로, 캘리포니아주와 콜로라도주는 말기선택(End of life option)이라고 한다. 캐나다의 경우는 더 중립적인 용어인 죽음에 대한 의료지원(Medical assistance in dying, MAID)이라고 한다. MAID 대신 PAD(Physician assisted dying)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안락사로 번역되는 Euthanasia는 좋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eu와 죽음을 뜻하는 thanatos의 합성어로 17세기에 프란시스 베이컨이 만든 말이라고 한다. 애초 안락사는 자연사에 가까운 좋은 죽음이라는 뜻이었지만, 20세기 이후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의료적 지원을 받아 편안하게 죽음에 이른다는 의미로 변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존엄사법의 관례를 따라 보통 의사조력 존엄사로 통칭되고 있다.
자발적으로 곡기를 끊는 단식 존엄사
의사조력존엄사의 합법화가 말기투병환자의 생명 경시 풍조를 가져오거나 가족의 돌봄부담이나 경제적 이유로 존엄사의 압박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하는 의견도 많다. 존엄사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서두를 것이 아니라 호스피스 완화치료의 확대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비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호스피스 완화치료를 통해 통증을 관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자발적 단식 존엄사가 존엄을 지키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는 방법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대만의 의사인 비류잉은 자신의 어머니가 단식으로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단식존엄사』라는 책으로 기록했다. 비류잉의 어머니는 이미 중년에 소뇌실소증이라는 유전병이 발병해서 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노년이 되어 상황이 악화되자 어머니는 고통스런 삶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하고 자발적으로 곡기를 끊는 단식을 결정한다. 재활의학과 의사였던 딸은 어머니의 결정을 존중하고 어머니의 단식을 도왔다. 어머니는 의식이 명료할 때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단식 시작 21일 만에 집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전근대사회에서는 임종기에 접어든 노인들이 자연스런 단식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흔히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거나 의료적 조치를 받는 것이 당연시 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일은 보기 힘들다.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는 웬만해서는 단식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곧바로 영양제 등이 처방되고 콧줄이나 위루관으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임종기 환자라 하더라도 병원에서는 수분과 영양 공급을 중단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의료윤리 차원에서도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환자가 자신의 선택으로 수분과 영양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할 때 환자의 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결정에 따라 먹고 마시는 것을 중단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을 자발적 단식사(VSED: Voluntary Stopping of Eating and Drinking)라고 한다. 이 또한 당사자의 결정에 따르는 안락사 혹은 존엄사의 일종이지만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사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의사조력 존엄사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또 단식존엄사는 진행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
살레카나, 자이나교의 자발적 단식존엄사
최근 나는 인도 자이나교의 죽음의례를 연구한 양영순의 강의와 책을 통해 살레카나라는 임종수행법을 알게 되었다. 살레카나는 음식의 섭취를 제한하는 단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단식과 명상, 절제, 성전의 학습, 기도 등의 종교적 실천을 함으로써 깨어있는 상태로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종의 요가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는 붓다와 동시대를 산 수행자다. 마하비라가 살레카나로 열반에 든 이후로 살레카나는 2600년 이상 자이나교도들의 이상적인 죽음수행으로 여겨져 왔다.
자이나교는 인도종교 중에서 비폭력과 불살생[ahimsa]의 교리와 실천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종교로 유명하다. 자이나교도들은 엄격한 채식을 실천한다. 직업선택에서도 다른 생명을 죽일 수 있는 농업, 어업, 축산업 등에 종사하지 않는다. 자이나교는 나쁜 업을 지으면 영혼[jiva]에 업[karma]이 물질처럼 달라붙는다고 본다. 금욕과 고행을 하는 것은 그 업을 제거하여 순수한 영혼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이다. 모든 업이 제거된 상태에서만 해탈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이나교도는 철저하게 자력적 수행방법만이 구원의 길이라 생각한다.
살레카나는 바른sat 소멸lekhana을 뜻한다. 신체와 욕망이 바르게 소멸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체의 소멸에는 육체적인 신체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업이라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의 소멸까지도 포함된다. 욕망의 소멸은 어떤 욕망도 비워낸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살레카나는 단식과 명상, 기도와 만트라 수행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정화하고 소멸시키는 실천이다. 살레카나는 사마디마라나samadhimārana라고도 불린다. 사마디마라나는 삼매와 죽음이 합쳐진 말로 삼매상태의 죽음, 명상적 죽음을 뜻한다. 결국 살레카나도 사마디마라나도 신체에 대한 집착, 욕망에 대한 집착을 떠난 자유를 추구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그런 해방의 때로 만드는 실천이라 할 수 있겠다.
죽음 앞에서의 자기정화의 수련
단식을 하면서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살레카나는 쉽지 않다. 그래서 원한다고 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이나교의 스승들은 평소에 단식과 명상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수행자들만이 생의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살레카나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 살레카나를 행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자에게 이를 요구할 경우 그 자체로 정신적 살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살레카나를 원하는 사람은 살레카나를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지침과 수행지침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행하고 스승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또 살레카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행 공력이 있다고 해서 아무 때나 살레카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이나교의 경전에 따르면 살레카나는 재해나 기근, 노쇠, 질병과 같은 상황을 맞이했을 때 다르마를 실현하기 위해 행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이것은 수행을 이어갈 수 없는 특별한 조건에 처한 수행자에게 한해 살레카나가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레카나는 수행이지 편안한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살레카나는 안락사나 의사조력 존엄사, 단식존엄사와 결을 달리한다. 살레카나를 행할 때의 금기를 보면 그 차이를 더 잘 알 수 있다. 살레카나를 행하는 사람이 ‘내생에 인간이나 신으로 다시 행복하게 태어나기를 바라거나, 얼른 죽기를 원하거나, 감각적 즐거움을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금지된다. 그런 바람이 있다면 살레카나로 인정하지 않는다. ‘살레카나를 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즐기는 것’도 금기에 포함된다. 이런 금지가 따르는 것은 살레카나의 목적이 죽음이 아니라 신체와 욕망의 소멸인 해탈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이냐교는 살레카나를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이 아닌, ‘자기 정화의 수련’이라고 본다.
법정으로 간 살레카나
자이나교는 전통적으로 자살과 살레카나를 엄격히 구별해 왔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심리적 스트레스 상황을 겪고, 자신을 해치는 흉기나 약물 등을 쓰고, 급작스레 사망하고 다른 사람이 모르게 비밀리에 행해진다. 그러나 살레카나는 당사자가 자신의 수행과 해탈을 목적으로 하고, 흉기나 약물 등을 쓰지 않고, 갑작스런 죽음의 방식도 아니며, 공개적으로 행해진다. 7~8세기에 쓰여진 자이나교 문헌인 <사르바르따싯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살레카나를 행한 자는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신을 죽여서 수명 등을 축소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릇됨은 성립하지 않는다. ‘살생이란 잘못된 행동에 의해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레카나를 행하는 자에게 잘못된 행동은 없다. 왜냐하면 욕망 등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욕망, 혐오, 미혹 등을 가진 자들은 독이나 칼 등을 사용해 자신의 생명을 해치지만, 살레카나를 행하는 자에게는 욕망 등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죽이는 그릇됨이 없다.
자이나교의 입장에서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진통제를 투약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약을 처방하는 것 같은 오늘날의 존엄사나 안락사가 그들이 금지하는 자살에 해당된다. 살레카나는 죽음조차 수행으로 승화시키는 실천이다. 그런데 21세기 인도에서 자이나교의 성스러운 전통의 하나로 여겨졌던 살레카나가 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침해하는 강요된 죽음이라는 죄목으로 세속의 법정에 세워지는 일이 발생했다. 2006년에 인도의 인권운동가 니킬 소니는 살레카나가 자살방조죄 혹은 교사죄에 해당한다며 법의 심판을 요구했다. 니킬 소니는 살레카나를 비구니 스님이나 나이 든 과부에게 가해지는 사띠(여성에게 강요되어 온 순장을 이르는 말)와 다르지 않다고 공익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 라자스탄 고등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살레카나를 자살 혹은 자해를 금지하는 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판단했다.(당시까지 인도법은 자살을 처벌했다.) 이 판결이 나오자 자이나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판결이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인도대법원은 재심을 요구하는 특별청원을 받아들여 살레카나의 합헌성에 대해 재심할 필요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라자스탄 고등법원의 판결은 기각되었지만 살레카나가 종교적 권리인가, 자살교사인가는 여전히 사회적이고 법률적인 쟁점으로 남아있다.

헬렌니어링과 스콧니어링 부부
깨어있는 상태에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으려면
살레카나는 사마디마라나라고도 불린다. 살레카나도 사마디마라나도 단식으로 고통을 줄이고 죽음을 앞당긴다는 의미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 살레카나는 올바른 소멸의 의미로,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소멸시키는 수행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마디마라나는 사마디(Samadhi), 깊은 고요와 평정을 누리는 삼매수행에 초점을 맞추는 명칭이다. 살레카나든 사마디마라나든 생에 대한 집착을 온전히 내려놓고 삶과 죽음을 여여하게 받아들이는 평온한 죽음을 추구한다.
반면 우리의 의사조력 존엄사 논의는 죽음의 의료화와 생명연장이 결과적으로 고통을 줄이고 죽음의 질을 높이지 못했다는 것, 생명연장 그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써 당사자와 가족에게 고통 연장을 초래했다는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문제의식이 강하다. 또 존엄사 논의는 불가피하게 법률적인 이슈나 제도화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존엄사와 관련한 여러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존엄사가 제도화되고 합법화된다고 해서 우리의 죽음이 존엄한 죽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도 존중되어야 하고, 호스피스와 완화의료도 적극적으로 도입되어야 하고, 늙고 병들었을 때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도 없어야 하고, 시민적 돌봄과 공적 돌봄을 받을 수 있는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사회가 누구나 평등하게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나가는 것은 무조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살레카나를 통해 우리는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고통없는 죽음, 평온한 죽음,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죽음, 이런 것이 존엄한 죽음의 필요충분조건인 걸까? 호스피스와 완화의료 그리고 존엄사에 대한 제도가 갖추어졌든 아직 미비하든 죽음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조건이기 때문에 존엄한 죽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성찰을 여러 종교의 유산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살레카나는 그런 성찰에서 강력하고 구체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스콧 니어링(1883~1983)은 100세가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평화롭게 죽었다. 간디의 사티야그라하를 실천하며 영적 혁명가의 삶을 살았던 비노바 바베(1895~1982)도 노년이 되어 가벼운 심장발작이 왔을 때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비노바 바베는 자이나교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사마디마라나를 실천했다. 불교의 고승들 중에도 앉거나 선 상태에서 열반에 드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의 사례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살레카나가 수행자로 견결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비노바 바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