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새해는 두 번이다. 이를 ‘이중과세(二重過歲)’라 비판하며 하나로 줄이자는 말이 나오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새해가 두 번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양력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어도, 음력 새해라는 ‘패자부활전’이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번 설 연휴에도 1월 초에 써놓았던 문구를 다시 읽었다. “단정히 살고, 치밀하게 생각하고, 진득하게 공부하기.”
재밌는 사실은 몇년째 이 문장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올해도 작년의 결심을 그대로 복사해 붙여 넣었다. 다시 말하면 결심은 늘 ‘절제하고 몰입하는 삶’인데, 현실은 늘 ‘허겁지겁과 녹초’였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이 문제가 10년 가까이 어머니를 돌보며 쌓인 피로 때문이라고 여겼고 돌봄이 줄어들면 삶도 좀 더 단순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돌봄이 사라진 자리에는 귀신같이 다른 일들이 들어찼고, 나는 여전히 소진되어갔다. 고농축 비타민과 쌍화탕은 다른 의미에서 나의 ‘주사 이모’였다.
그런데 그 루쉰조차 “너무 피곤하다고 느낄 때는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나에게 내리는 처방도 “쉬어라”이다. 그런데 쉬는 것이란 또 무엇인가? 근대사회에서 휴식은 일의 잔여 개념, 노동의 보상 정도로만 이해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정반대의 발상이 존재했다. 고대 로마에서 휴식을 뜻하는 오티움(otium)은 단순한 빈 시간이 아니라, 스스로와의 관계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업무를 뜻하는 네고티움(negotium)은 ‘오티움의 중단’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일의 틈에 휴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휴식의 틈에 일이 있었던 셈이다.
동아시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공자가 제자들의 포부를 묻자 모두 정치와 성취를 얘기하는데, 증점(曾 )만이 타던 비파의 소리를 가라앉히며 늦은 봄 물가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고 돌아오는 삶을 말한다. 잦아드는 비파 소리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개인의 포부들과 절연하면서 물과 바람,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으로 조용히 기울어가는 장면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불야성이고, 너나없이 아도르노가 말한 ‘조급한 불면의 밤’을 보낸다. 철학자 한병철의 지적처럼, 우리는 세계를 인간 의지에 따라 조작하고 지배하는 ‘활동적 삶’만을 유일한 가치로 숭상하는 세계관에 갇혀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이 가속하는 초연결사회는 우리를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밀려드는 정보와 자극에 즉각 반응하느라 생각은 파편화되고, 시간은 산만해진다. 잦아드는 비파, 그 여음(餘音) 같은 ‘종결의 형식’은 추방되었고, 따라서 경험의 알을 품는다는 ‘깊은 심심함’의 시간도 사라졌다. 더구나 올해는 병오년, 불이 천간에도 지지에도 들어 있어 더 맹렬히 불타오르는 해다. 우리는 이 과열된 세태 속에서 자신을 기어이 다 태워버릴지도 모른다.
책상 위에 붙어 있는 올해의 결심. “단정히 살고, 치밀하게 생각하고, 진득하게 공부하기.” 아무리 읽어봐도 평범하고 좀 뻔하다. 그런데 지난 경험 속에서 이 뻔한 말이 실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구원의 상태’인지를 이제는 안다. 여전히 루쉰의 감각,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성실히 분투하되, 동시에 내 성실함이 나를 갉아먹는 자발적 착취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정치적 양생’이라 부르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