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수요일 저녁. ‘죽은 다음’ 희정 작가님의 북토크가 문탁에서 있었다. 북토크에 현장으로 참여한 분들, 줌으로 참여하신 분들로 문탁이 꽉 찼다.
먼저 작가님이 왜 ‘죽은 다음’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본인을 기록 노동자로 소개한 희정 작가님은 그동안 주로 ‘노동’ (노동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공간, 해고, 산업재해 등) – 대학 내 여성 청소 노동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 등-에 대해 써왔는데, 작가님이 인터뷰를 해왔던 분들은 대부분 산업재해, 직업병 등으로 세상을 떠나가거나 혹은 이런 이유들로 가까운 이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이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가까운 이들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하지?’ 라는 물음을 가진 채 인터뷰를 진행했었고 그 후에는 20~30대 초반의 퀴어 노동자들과 작업을 했지만, ‘직업병,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으려고 선택한 퀴어 노동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내가 혼자 죽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되죠?’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주제를 접했고, 개인적으로는 죽은 자의 사회적 신분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례식장에 대한 공포, 가족 구성원이 많지 않은 지금의 세대에게 공포로 다가오는 (부모님) 돌봄의 부담감, 사회적 애도를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다.

작가님의 소개 이후 책에 관한 질문들이 이어졌는데 인상깊었던 것은 ‘장례 현장’에서 여성, 남성 노동의 위계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으며 사별자의 입장에서 느낀 가족 중심주의적인 그래서 남성 위주일 수밖에 없는 장례 문화에 대해 많이 공감했었는데, 장례식이라는 노동 현장도 남성 위주의 위계적 문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장례 지도사(화장기사)인 이해루씨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는 질문에 대해 작가님은 남성 주도의 장례 현장에서 ‘여성’ 장례인을 찾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셨다. 남성 주도의 장례 현장에 여성 장례인이 많이 유입되고는 있지만 여성 장례인이 버티기가 힘들고 따라서 이직률이 높다는 것, 의전(상조)업체에 고용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비정규직 여성 노동과 비슷하게 서비스 측면에서 소모되는 문제- 예를 들어, 의전 관리사(여성)가 장례지도사(남성)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 장례지도사와 의전 관리사는 고용 관계이며 성차별에 근거한 위계 관계이기도 하다-가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내가 장례식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장례지도사는 남성이었고, 상주는 대부분 (맏)아들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먹는 음식을 서비스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 노동자였다. 가족 중심의 장례 문화와 장례 현장에서의 여성, 비정규직의 값싼 노동력, 돌봄의 문제가 비슷하게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건 공영장례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실 나는 책에서 언급된 공영 장례가 인상 깊어서 꼭 필요한 제도가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었다. 존엄함이 보장되지 않는 무연고자 장례가 비용으로 차별화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지고 공영장례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영장례의 복지화(국가의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것)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될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덤은 곧 땅이 필요한 문제인데, 작가님은 마을 공동체의 공유지가 국가의 땅으로 전환되고 이것이 기업이나 개인에게 사유화되는 과정(골프장이나 관광사업 등)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국가의 개입이 보편적인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왔던 내 입장이 안일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개입이 후에는 결국 시장의 논리로 연결된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삶을 외주화하지 않겠다’는 작가님의 말에서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공동체성ㅡ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애도’ 그리고 ‘좋은 죽음’ 에 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는 죽음이 너무 쉽게 숫자화되는 것을 겪었다. K-방역이라는 이름 아래 죽음은 공포였고 멀리해야 될 것이어서 애도가 가능하지 않았다. 다음번 이런 참사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애도해야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 작가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붙였다. 사회적 참사가 있을 때 국가의 개입(복지, 지원)은 가족을 매개로 들어오는데 이런 가족 중심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는 것일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인가? ‘좋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쁜’ 죽음을 만들어낸다. 흔히 좋은 죽음의 반대편인 나쁜 죽음은-가족이 없는 죽음, 자살 등-대개 정상 가족의 틀에서 이야기된다. 좋음에 대한 이야기는 누군가를 결국 나쁨으로 몰아넣는 건 아닐까? 또한 나쁜 죽음으로 명명되면 생존자(사별자)들은 애도하기가 어렵다. 코로나 시기 죽음은 나쁜 죽음이었다. 그 안에는 공포도 있었지만 선별도 있었다. 좋음과 나쁨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작가님의 이야기는 문제에 대한 시선을 좀 더 넓혀주는 것 같았다.
좋은 장례지도사를 만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상품화된 장례와 노동 구조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해 지금의 장례 문화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생겼다. 나는 가족의 틀을, 지금의 가부장적인 형식들을 어느만큼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에게 죽음은 막연한 두려움이고 슬픔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작가님이 이야기한대로 가까운 이들과 함께 떠나보냄, 애도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슬픔이 덜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내가 맺어온 관계들로부터 장례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형식이건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작가님의 말에서 조금은 힘을 얻었던 시간이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 애도받지 못하는 슬픔, 죽음 뒤편에 숨겨진 노동, 그곳에 잔잔히 스며있을 수 있는 따뜻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