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제주에서 작은 포럼이 열렸다. 20년 전 서간집 <경계에서 말한다>를 함께 펴낸 한·일 양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조한혜정과 우에노 지즈코가 희수를 맞아 다시 뭉친 자리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오늘날의 페미니즘’ ‘돌봄 사회’ ‘나이듦과 죽음’ 등을 주제로 진행된 이틀간의 대담 내내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서로를 ‘혜정’ ‘지즈코’라고 다정히 부르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덕분에 관전하던 사람들도 꽤 쫄깃한 시간을 보냈고, 다들 장외에서 이 차이를 해석하고 토론하느라 ‘불타올랐다’.
우선 지금의 페미니즘 정세와 관련해 우에노는 백래시를 영향력 확대의 방증으로 보면서 젊은 세대의 자립과 주권을 기반으로 한 ‘페미니즘 리부트’에 희망을 걸었다. 반면 조한은 자기결정권 개념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전유되는 현실을 경계하면서 피해의식을 넘어선 연대와 협력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차이는 돌봄에서 드러났다. 우에노는 일본의 개호보험 덕분에 홀로 늙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초고령사회에서 누구나 집에서 존엄하게 홀로 죽을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비해 조한은 국가 너머에서, 선흘그림할망의 사례처럼 “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실험하는 마을의 관계망과 이웃들의 호혜적 돌봄이 대안이라고 말했다. 국가와 마을의 차이이자, 사회적 상상력의 근본적 차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개호보험을 본떠 만들었다는 한국의 장기요양보험법은 일본의 현장주도형과 달리 톱다운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 더구나 국가는 공적 책임을 강화하기보다 민간을 대거 동원하는 방식으로 돌봄을 외주화했고, 그 결과 현장은 고령자의 삶의 질보다 수익성이 앞서는 구조가 되었으며 돌봄은 필요가 아니라 비용으로 치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요양보호사들은 저임금에 시달리고, 가족은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돌봄 서비스의 틈을 자신의 몸과 돈을 갈아 넣으며 메우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 내가 깨달은 사실은, 조한과 우에노의 차이가 ‘국가냐, 공동체냐’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실제 쟁점은 돌봄 사회를 이끌 주체가 어떻게 조직되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제도가 위에서 주어지든, 아래에서 밀려 올라오든 그것을 작동시키고 버티게 하는 힘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관건이다.
다행히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몇가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보인다. ‘영케어러’들을 중심으로 사적 돌봄의 고립을 넘어 시민적 돌봄을 모색하는 ‘N인분’의 실천과 생협 기반의 돌봄 네트워크의 실험이 그렇다. 나와 친구들이 만든 ‘나이듦연구소’에서도 올해 치매포럼, K장녀돌봄 포럼, 노년주거포럼을 통해 성별과 연령층이 다양한 시민들을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엮어 보았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작지만 의미 있는 운동들. 이것이 종횡으로 만나며 더 넓게 연결된다면 한국에서도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돌봄 사회가 앞당겨지지 않을까? 세밑에서 나는 조금 희망을 품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