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그린비
어머니의 얼굴
카페 사담에서 주최한 데스카페에 다녀왔다. 데스카페는 2011년 영국에서 시작된, 차와 케익을 앞에 두고 죽음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만 모일 거라는 생각은 오해다. 최근 가까운 친구를 떠나보낸 30대, 아이가 죽음에 대해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렵다는 젊은 엄마, 응급의료 현장에서 일하는 구급요원, 부모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 60대. 다양한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돌보면서부터였다. 2년간 입원, 수술, 요양의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머니가 맑은 정신이었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 나는 자주, 의사결정을 대신하는 보호자로서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어머니를 위한 결정을 하고 있는지, 내 마음 편한 결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자신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말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나는 어머니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 고통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존재물음을 던지는 존재라고 했다. 존재물음이란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존재의 대립항이자 존재의 바탕이 되는 심연으로서의 무(無), 즉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다면 존재 물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존재물음은 삶에 대한 물음이지만, 삶에 대한 물음은 언젠가 삶을 중단시키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존재물음을 하게 하는 이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나의 죽음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내 의지나 선택으로 이 세계에 살게 되지 않았다. 우리의 존재는 이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 우리는 타인들과 수많은 사물들 곁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죽게 될 유한한 존재다. 그 유한성이 우리를 존재론적 불안에 빠뜨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잡담과 노동과 유희의 일상으로 도피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삶에 푹 빠져 살아가는 사람을 세인(世人)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그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이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을 감당하는 삶의 방식도 있다. 그들만이 본래적 삶의 방식을 회복하고 유한한 시간을 지배하는 능동적 삶을 살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따르면 내 어머니는 일상에 빠져 비본래적 삶을 사는 세인도 아니고,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결단하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내 어머니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죽음의 확실성에 근거하여 죽음을 향해 달려가 봄으로써 내게 주어진 시간을 지배해야 한다는 이 죽음 철학은 내 어머니의 죽어감과 죽음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지 못했다. 내가 죽어가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느낀 슬픔, 비통, 무력감과 같은 정감을 해명하지 못했다. 고통스런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죽음이란 능동적 주체가 미리 달려가 보아야 하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에서 침입해 들어와서 우리의 주체성을 깨뜨리고 우리의 수동성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은 앎의 파열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주제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연명의료에 대한 대비를 넘어 요즘은 유언장 워크샵도 있고 사전장례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안락사나 존엄사의 제도화도 조만간 우리 사회의 주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모두 의미있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내 수의에 대해, 장례식장에서 틀 음악에 대해, 초대할 친구의 범위에 대해 내 의사를 밝히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일까? 이때 죽음의 준비는 죽음 이전과 이후의 의례를 말하는 것이고, 이전과 이후의 사이에 있는 죽음 그 자체는 본디 대비하거나 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판하며 레비나스는 죽음은 확실한 앎이 아니라 차라리 앎의 파열이라고 했다. 타인의 죽음과 관계할 때 우리는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는 있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운동과 표현이 중단되는 과정의 겉모습뿐이다. 경험할 수 없고 표상할 수 없기에 죽음은 앎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알 수 없는 타자이다. 그것도 절대적 타자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관계는 순수하게 감정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성에 의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가 아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불안정해지는데, 그것은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공경이자, 질문으로서의 감정이다. 죽은 타인은 우리에게 응답하지 못한다. 그때 응답의 책임은 타인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 그렇기에 죽음은 다만 질문, 답 없는 질문일 뿐이다.
하이데거에게도 죽음은 불안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그 불안의 근원을 존재의 중단인 무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합당한지 묻는다. 존재가 무화되는 죽음을 불안의 근원으로 삼는 철학이란 오로지 인간의 본질을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찾는 철학에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가 갈라진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철저하게 의식있는 인간이 자신이 죽음을 향해있다는 것을 아는 죽음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죽음은 1인칭 죽음이고 불안은 나의 죽음이 일으키는 불안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알 수 없는 타자의 들이닥침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죽음이든 나의 죽음이든 내가 죽음과 맺는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계’다. 죽음은 무한, 타자, 미지의 것과의 접촉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타인에게 그러하듯이 나의 죽음은 ”나의 고유한 지속의 선을 절단하는 것, 또는 이러한 선에 매듭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내가 지속하는 그 시간이 어떤 길이만큼 끌리는 것처럼.(<죽음과 시간> 34쪽)“ 죽음은 대상에 대한 앎이 멈추고 앎이 파열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사유할 수 없고 죽음 그 자체를 준비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을 공경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은 윤리적 응답을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는 것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으로 시간을 앞질러 미래로 달려가 봄으로써 삶의 본래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죽음을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고 하이데거를 뒤집는다. 죽음은 바깥에서 폭력적으로 침입하여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중단시킨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이 자유의 기초였다면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우리가 묶여 있고 압도되어 있고 그래서 무력하고 부자유하다는 근거가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 타자의 현현과 같은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 알 수 없다. 아무리 친숙하고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나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앎과 경험의 한계이며, 그와 나의 동일성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만드는 존재로 드러난다. 죽음과 타자는 어떤 사건의 계열 밖에서 틈입한다는 의미에서 예-외다. 상례(常例)가 아니라 이례(異例)다. 죽음도 타자도 스캔들이고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죽음은 유한한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다른 차원으로 열리는 수수께끼이고 신비다. 그 신비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레비나스에게 인간의 본질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코나투스(conatus)가 아니다. 우리의 자아는 ‘나임’의 본래성이 아니라 엮임과 얽힘 속에서 드러난다. 자아는 존재론적으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뒤얽힘 속에서 타자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동태적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응답은 나의 존재의 지속이라는 이해관심을 벗어날 때 일어난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탈이해관심이며, 절대적인 타자를 향하는 작별인사, 아듀(adieu)다. 하이데거가 존재론의 근원에 죽음을 놓은 것과 달리 레비나스는 윤리학의 근원에 죽음을 놓는다. 죽음은 우리의 수동성을 드러내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윤리적 응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죽어감에 대해 죽음에 대해 어떤 의미있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온 몸으로 고통을 웅변했다. 얼굴의 찡그림, 작은 신음소리, 욕창의 상처, 자주 터져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 냄새를 풍기던 장루주머니, 그 모든 것이 어머니였다. 나는 자주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얽혀버린, 응답을 요구하는 절대적 타자의 얼굴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요하던 나의 ”자아는 모든 빚 너머의 의무이며, 그래서 어떠한 떠맡음도 그 수동성을 부인할 수 없는 인내(<죽음과 시간> 36쪽)“였다.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묘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무의미(non-sense)를 통해 우리와 관계한다. 그것은 응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응답할 수 없기에 그 물음은 우리에게 답해야 하는 의무를 지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겪는 타자의 ‘볼모’가 되어 의무를 다하고 죽음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세월호의 죽음, 팔레스타인과 이란의 죽음, 네팔의 죽음, 그리고 여섯 번째 멸종위기의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느끼는 책임감과 애도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 레비나스의 강의 <죽음과 시간>에 대하여
이 글을 마치며 약간의 서지사항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내가 읽은 책은 레비나스가 1975년~76년 사이에 소르본느대학에서 한 강의를 정리한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이다. 이 책에는 <죽음과 시간> 그리고 <신과 존재-신-론>이라는 두 개의 강의가 실려있다. 이 중에서 나는 1부 <죽음과 시간>을 통해 레비나스와 하이데거의 죽음 철학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레비나스(1906~1995)는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20대에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를 만났고 그의 존재론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후 하이데거는 나치에 부역했고, 레비나스는 부모형제를 잃었다. 이후 레비나스는 존재론이 아닌 윤리학을 제1의 철학으로 정초하면서 서양철학사를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을 평생 계속했다.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하이데거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81년 프랑스 공영 라디오 채널 프랑스 문화에서 녹음한 필립 네모와의 대담집인 <윤리와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를 비판하면서도 <존재와 시간>을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학책 중의 한 권이라고 말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위대함이 존재를 명사가 아닌 동사로 사유하게 한 최초의 철학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죽음과 시간> 강의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를 죽음과 시간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길로 제시하고 그 강의의 대부분을 하이데거에 대한 독해와 비판에 할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