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 한 자연치유 기록 똥꽃
전희식, 김정임 지음 그물코
저자 전희식은 2006년부터 8년간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이 책은 2008년에 초판이 나왔고 2023년 개정판이 나왔다. 책에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집을 고치는 과정과 어머니와 함께 산 2년여의 일상들이 펼쳐져 있다. 치매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라 치매인인 어머니의 입장도 잘 알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책이다. 어머니인 김정임이 공동저자로 되어 있는 건 전희식과 어머니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먼저 ‘치매’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간단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최근 국회에서 치매를 ‘뇌인지저하증’으로 바꾸자는 치매관리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되었다(이전 국회에서도 명칭 변경에 대한 개정안이 발의되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치매(癡呆)가 ‘어리석다’는 뜻의 한자로 되어 있어 한자문화권에서는 부정적 인식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미 대만에서는 2001년부터 ‘실지증’으로 쓰고 있고 일본에서는 ‘인지증’, 중국과 홍콩에서는 ‘뇌퇴화증’으로 바꿔 쓰고 있다. 치매를 인지증이나 (뇌)인지저하증으로 바꾸는 게 쉽지 않은 것은 이 용어가 치매 전체를 정의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인지증은 치매의 일부 증상일 뿐)이기도 하고 경제적인 이유가 엮여있기도 하다.
꼭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치매를 인지증, 인지저하증으로 바꾸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인지증이나 인지저하증으로 명명하는 순간 치매는 ‘질병’으로 확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치매를 어떻게 봐야할지 좀 더 연구해봐야 하는 입장에서 현재 나는 ‘인지증’이나 ‘인지저하증’ 보다는 그냥 ‘치매’로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뒷간(화장실)
전희식은 귀농해서 자연 농사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 만물과 소통하는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마음먹고, 평생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신 어머니 정서에 딱 맞는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다가 ‘천생연분’으로 만나게 된 시골 빈집을 사서 반년 동안 직접 고친다. 집고치는 기준은 당연히 어머니다. 다리를 못 쓰시고 똥오줌을 잘 못 가리는 치매 어머니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뒷간. 기저귀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작된 만큼 치매로 고생하면서 일어서지 못하는 노인 전용 뒷간을 만들어야 했다. 가장 짧은 이동 거리 안에 있으면서도 생활공간과 분리되면서 볼일 보고 뒷물까지 가능한 생태적인 뒷간! 새로 짓는 집이라면 그나마 좀 쉽겠지만 이미 있는 공간을 고쳐야 하는 거라 쉽지 않다. 게다가 저자의 집짓는 원칙은 생활의 편리를 지나치게 좇지 않는 집이다. 보통 사람들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저자는 궁리 끝에 어머니 전용 생태적 뒷간을 만들어 낸다.
또 전희식은 버려진 것들을 주워 모아 다시 되살려내겠다고 생각하고 쓰레기장이나 고물상을 돌며 필요한 것들을 모았고, 여럿이 함께(백명이 넘게 참여) 즐겁게 집을 짓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바꾸지 않고, 아니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식으로 어머니를 돌보는 그가 새롭게 보였다. 존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연 치유 방식!
건강보다 존엄
전희식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큰 것은 ‘어머니의 존엄성과 존재감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건강은 나이 들면 약해지기 마련이지만 어른들의 존엄성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고 본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존칭을 쓰고 무엇을 하든 어머니께 알리고 한다. 빨래할게요, 화장실 갔다 올게요, 밭에 다녀올게요, 점심 때까지는 들어올게요… 그는 ‘집안을 드나들 때, 뭔가를 할 때 늙고 병드신 부모에게 꼭 사전에 알려드린다는 것은 노인들의 존엄을 위한 필수사항’이라고 말한다.
또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 못지않게 어머니도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세심하게 노력하고 배려하는 그에게 나는 감동했다.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산적인 일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늙고 병들기 전에는 너무나 잘 했던 일들, 청국장 만들기, 바느질, 키질, 가죽자반 만들기, 뽕잎차 만들기, 고추 상추 모종에 물주기 등. 일하는 과정도 어머니가 주도하도록 하고 자신이 아는 것도 하나하나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가면서 한다. 결국 부엌까지 필사적으로 가서 불을 때기까지 한 어머니. 평생 누워서만 살 줄 알았던 어머니에게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런 일들과 함께 쏟아지는 옛날이야기들. 밝은 표정에 신명난 어머니. 이래라 저래라 하며 아들에게 잔소리하고 야단치는 어머니. 어머니의 존재감이 뿜뿜, 어머니 세상이다. “어머니가 나랑 사시면서 달라진 여러 모습 중에 가장 반가운 것이 이것이다. 맘에 안 들면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것. 떵떵거리고 사는 어머니 모습을 보는 어느 자식 마음이 흐뭇하지 않으랴”(91쪽)
기저귀 없이 생활하는 것도 존엄성과 직결된다. 기저귀를 하게 되는 순간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애만도 못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공인하는 게 된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고, 똥오줌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래서 존엄사를 생각한다면 바로 이런 시점일 것이다. 전희식은 어머니가 서울 큰집에서 지내실 때 기저귀를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어머니를 모시기로 작정했다. 전희식은 일상에서 상황에 따라(국이나 물을 드실 때와 안 드실 때) 오줌 누는 시간을 관찰하고 그 시간에 맞춰 오줌을 눌 수 있도록 했다. 두 달 이상 그렇게 하니 배뇨감각이 회복되고 스스로 뒷간으로 가서 똥오줌을 누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실수도 많이 하고 세탁기도 안쓰는지라 맨손으로 빨래하는 일이 힘들긴 했지만 ‘기저귀를 벗어 던지면서 함께 벗어던진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전희식. 어머니는 생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여러 가지 엉뚱한 말이나 행동들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존재감과 존엄성을 위한 또 다른 활동, 나들이. 다리를 못 쓰고 휠체어로만 움직이는 치매 어머니와 나들이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벌써 숨이 차다. 그러나 전희식은 도시에서 20여년을 두 평 남짓한 방안에서만 생활하신 어머니를 위해 집앞길 오르내리기를 시작으로 점점 더 멀리 나들이를 하려는 꿈을 꾼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안가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공을 들인다. 그 과정에서도 자존심을 다치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늙어가는 자식이 다 늙은 어머니 손잡고 꽃피는 봄날에 놀러가는 꿈을 이루어 낸다. 나중에는 일주일 정도의 여행을 하기도 하지만, 매사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뭔가 계기가 있으면 어머니의 기분은 백팔십도 달라지고 2박 3일 준비해간 나들이가 한 시간 만에 끝나버리기도 한다. 나들이가 성공적일 때는 낯선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시는 모습에 어머니의 긴장과 경계가 사라져버리는 경우이다. 어머니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이럴 때 어머니는 전혀 치매인 같지 않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치매 노인의 품위와 존엄을 위해 필요한 사항이다.”(87쪽)
이렇게 하여 어머니의 활동력은 되살아났고 드디어 20년 만에 수제비를 끓여 자식 밥상을 차린 어머니. 어머니는 신바람 나서 수제비를 뜯으면서 사십 년, 오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수다를 쏟아낸다. 이런 어머니의 활동력은 혼자서 걷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걷기 연습으로 까지 이어진다. 눈물나게 감동적이다.
치매는 병인가?
치매는 망각인데 망각은 ‘잠재된 고의’라고 한다. 전희식은 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치매노인의 경우 이치에 안 맞는 말을 하고 똥오줌을 못 가린다는 이유로 멀쩡한 사람을 감금해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심리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라고 질문한다. 환각증상을 보일 때 그것이 착각이라며 고쳐주려고 손짓 발짓 다하면 치매인은 좌절하고, 끝내는 부정당하는 자신마저 포기하게 된다는 것.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들이 치매’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치매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건성으로 대하기 때문에 치매인도 의심하고 모함하고 비난한다. 이들에게는 혼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희식은 ‘치매는 필요한 현상이고 치유의 과정’이라고 한다. ‘굴절된 삶의 현재적 표현이 지금의 치매’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할 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헛말은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저간의 사정을 내가 속속들이 알지 못할 뿐이다. 오늘의 어머니를 인정하려면 고른 삶뿐 아니라 굴절된 삶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치매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머니 인생은 일찍 사라졌을 수 있다. 그런 말,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어머니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치매는 그렇게 살아온 삶에 대한 필요한 현상이고 치유의 과정이다.”(82쪽)
노인들이 악담과 저주를 퍼붓고 의심하고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은 질병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일종의 치유과정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전희식. ‘한 노인이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자연스런 귀착점’(113쪽)이므로 그런 행위를 보장하고 잘 지켜봐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노가 쌓여 내면화되면 화석처럼 굳어서 병을 키울 것인데 살짝 정신을 놓은 덕분에 남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자식 흉을 볼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고, 잘 안 들리고 잘 안 보여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부조화를 이루지 않으니 이것도 하늘이 주신 은총일 수 있으며, 악담과 저주도 과거 어느 한 지점에 맺힌 한이 소통되지 못한 채 오늘까지 이어져오다 보니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니 과거에 대한 회상에 더 몰입하는 것 또한 하늘의 선물일 수 있다.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며 이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망각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 아닐까? 몸은 늙고 병들었는데 모든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큰 재앙이 아닐까? “그렇다면 알쏭달쏭해진다. 치매에 걸리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어제 일도 까맣게 잊고는 생뚱스런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존재의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 가을에 활엽수가 잎사귀를 떨구듯 기억을 떨쳐 낼 뿐인 것을 우리가 치매다, 노망이다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291쪽)
치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모성 되살리기?
어머니 상태가 안 좋을 때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조절이 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쓰다듬고 방향을 틀게 하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전희식이 만들어냈다는 ‘세 가지 요법’이 있다. 앞장서서 방향 돌리기, 꿈길 따라잡기, 모성 되살리기가 그것이다. ‘앞장서서 방향 돌리기’는 터무니없는 강경한 주장에 대해 귀 기울여 들어주고 수긍해주면서 한발 앞서 어머니보다 더 설치며 상황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자기주장을 지나치게 강변하지 않아도 당신을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머니는 스스로 주장을 접거나 아예 잊어버리게 되고, 돌보는 사람이 상황전개를 주도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사태를 수습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꿈길 따라잡기’는 주무시는 어머니가 잠꼬대를 할 때, 새벽에 잠이 깨면 바짝 다가가서 같이 편승하는 것이다. 꿈과 망상이 한데 섞여 있는 어머니가 꿈과 현실, 즉 망상과 현실을 분별하지 못할 때 이를 정확히 분리시켜 주는 방향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참담한 현실(주무시다 오줌이나 똥을 누었을 때)을 꿈으로 연결시켜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법은 쉽지는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좋은 방법이다. 진심으로 어머니를 존중하면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구하여 만들어낸 요법이기 때문이다.
‘모성 되살리기’는 어머니가 여자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그렇게 대하는 것과 어머니 기분이 뒤틀려 있거나 뭔가에 시달려 평온이 깨져 있을 때 모성애를 자극하여 어머니의 품성(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거룩한 신체적 정신적 본능)으로 돌아오게 유도하는 것이다. ‘측은한 마음을바탕으로 어떤 어려움도 용서와 포용으로 뚫고 나가는 위대한 힘이 모성 속에 있음을 몸소 체현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어떤 어려움도 용서하고 포용하는 위대한 힘으로서 ‘모성애’, ‘어머니 품성’ 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힘들었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측은지심은 어머니 품성이라기 보다는 사람이라면 가져야할 기본적인 품성이 아닐까? 치매 부모가 아버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 있는데서 오줌 누고 오라고 말하는 것을 예로 든다. 여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안되고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남자든 여자든 품위와 존엄을 지키려면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스스로 ‘여성으로 산다는 것과 남자로 살면서 여성을 배려한다는 것 사이에는 넘어서기 힘든 간극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긴 한데, 이 부분은 좀 문제적이다.
<똥꽃>은 진달래가 핀 봄날 오랜시간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똥을 누어 옷에도 몸에도 방안에도 똥칠갑이었을 때 전희식이 지은 시다. 어머니는 저승사자 환각에 시달리며 공포 속에서 일을 낸 것이다. 이불과 옷들을 빨며 줄곧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데 전희식은 어디선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너랑 어머니랑 바꿔서 살아 볼래?” “옷에 똥을 누는 사람보다 그 똥을 치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배는 행복한 줄 알아라.” “똥을 쌌는지 된장이 끓는지도 모르는 사람보다 아직은 멀리서도 똥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잊지 말아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듣는 사람만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엄마를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전희식이 아니고 우리 엄마는 김정임이 아니지만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치매 엄마의 존재감과 존엄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고 엄마의 절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환각증상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기저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다. 내가 다르게 대처했다면 엄마도 걷고 싶다는 욕망으로 걷는 연습을 할 수 있었을까? 내일 엄마를 만나러 간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겠다.
어머니를 존중하는 방법 중에
인사하기, 동선 알리기 등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어디 가니?”
“서울로 강의가요.”
“차 조심해라”
“네”
“다녀왔어요”
(약간 짜증난 목소리로) “왜 이렇게 늦었니?”
“아, 오늘 서울 간다고 했잖아요”
“아참, 그랬지. 그래도 늦으면 걱정되잖아. 중간에 연락이라도 해줘야쥐”
(약간 짜증났지만) “네, 엄마, 앞으론 그럴게요”
저도 이 정도는 가능한 꼭 지키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못한 게 훨씬 많아요…ㅠㅠ
전희식님의 실천을 읽으며 초기 치매 아버지를 돌볼 때의 제 모습이 비춰져서 좀 부끄럽기도 합니다. 1월과 2월, 두달 동안 아버지가 데이케어센터에 나간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몸이 안좋다, 재미없다, 춥다, 이유는 수만가지였지요. 어제는 센터장님이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센터에 오고 싶게 종이접기 강사를 하시라고 권하겠다고 했어요. 그 제안이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런데 과연 아버지가 하겠다고 할까? 그런데 오늘 아침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센터에 나가셨다네요!! 초기 치매의 아버지의 존엄을 높이는 일에 자식들은 서투르기만 한데, 아버지를 함께 돌보고 있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요! 사람만으로도 안 되고 제도만으로도 안되는 공백을 이렇게 가족과 시설이 협력하며 조금씩 메꾸어갈 수도 있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