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는 일본의 그림책 작가이자 수필가다. 2010년 72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는 게 뭐라고』는 유방암 수술을 받은 지 3년이 지나, 암이 뼈로 전이 되어 2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쓴 글들이다. 동네 병원 의사가 가슴을 만져보고 전문 병원 가보라는 얘기에, 바로 옆 전문병원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고 그 다음 날 한쪽 가슴을 완전히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다. 망설임 없이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나중에 만난 의사들이 다른 방법도 있었을 거라는 말에, 시크하게 이런 성질머리로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암이 전이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온 날은 바로 외제차 자동차 매장으로 들어가 재규어를 샀다. 스스로 국수주의자라 자칭해서 외제차는 절대 사절이었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마당에 그런 신념이 무슨 소용?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쭉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외제차를 질렀다. 이 작가, 한 ‘성질’ 있다.
이 책은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첫 파트에서는 자신이 죽는다는 말에도 그런가 보다 하는 친구들이나, 평생을 싫어했지만 그래서 가까이 지냈던 친구의 이야기도 있다. 두 번 째에서는 암 재발이후 치료를 맡았던 의사와의 인터뷰다. 마지막은 통증이 너무 심해서 스스로 들어갔던 호스피스 병원에서 마주친 삶과 죽음에 대한 소회들이다.
사노 요코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죽음을 겪었다. 세 살 때 태어난 지 33일 된 남동생, 여덟 살엔 네 살 어린 남동생, 아홉에는 장남이었던 오빠까지. 아랫 동생들이 죽었을 때도 슬펐지만, 오빠의 경우는 가장 큰 상실감을 느꼈다. 1938년 중국에서 태어난 사노 요코네 가족은 전후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가난했고 고달팠다. 오빠가 혼절했던 밤,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새까만 산길을 달려 의사를 깨워서 집으로 데려 왔다. 그렇게 칠흑의 산길을 두 번째 달렸던 밤, 오빠는 의사 앞에서 죽었다. 그렇게 죽음을 가까이 겪은 후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작가가 이제는 무서운 게 있단다. “아픈 건 무섭다. 멍해진 머리로 침을 흘려도 상관없으니 아픈 것만은 피하고 싶다.”(72) 뼈까지 전이된 암은 매번 다른 통증으로 사노 요코를 괴롭혔다. “갈비뼈를 장작처럼 끊임없이 쪼개는 고통이 찾아오면 가운 끈으로 내 몸을 기둥에 동여맸다. 그러지 않으면 2층으로 기어올라 베란다에서 집 앞 골짜기로 몸을 던지고 싶어지기 때문이다.”(126)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아픔은 끔찍하게 싫고, 그렇다고 쩨쩨하게 죽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매순간 삶에 매진하는 이야기이다.
사노 요코의 주변 인물들도 범상치 않다. 20년을 넘긴 구두쇠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얼마나 구두쇠이고 사람을 기함하게 하는지는 작가는 줄줄이 사탕으로 적고 있다. 그 친구가 가장 싫은 까닭은 구두쇠 옆에 있으면 자기도 쪼잔해지기 때문이란다. 다른 친구라면 기꺼이 주었을 좋은 물건도 그에게는 망설이게 되는, 왜냐하면 먼저 나서서 달라고 조르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한 번도 밥을 산 적이 없는 친구, 자신보다 돈도 더 많이 벌면서 말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왜 그 친구를 계속 만나는지 깨달았다. “내가 ‘모두들 꺼려하는 여자와 어울리는 관대한 나 자신’에 도취되고 싶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우쭐대며 그녀와 만난다는 사실”(45) 말이다. 시한부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프라다 스웨터를 자신에게 달라는 친구, 곧 죽는다니 겨울에도 못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다. 그 순간 사노 요코는 미움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그녀 때문에 꽁해 있던 마음에서 해방된 순간, 친구가 원하는 건 뭐든지 주고 싶었단다. 죽는 마당에 물건이 뭐라고, 돈이 뭐라고. “그녀는 신이 내게 준 리트머스 시험지다.”(48)
사노 요코가 죽기 2년 전까지의 삶을 기록한 이 책은 행간의 곳곳에서 꼬장꼬장한 70 노인의 시각을 볼 수도 있다.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젊은 애들은 어떻게 저렇게들 흥겨운 건지, 쓸데없이 명랑한 젊은이들 숲에서 자신이 젊었을 때 퇴폐적이어서 좋아했던 가수를 떠올린다. 자신을 치료하려고 열과 성을 다하는 의사를 보고 성직자를 떠올리더니 “교사도 성직자다. 교사가 스스로 노동자라고 칭하면서부터 일본의 교육이 이상해졌다. 일교조여, 덤벼라, 나는 보수, 반동분자라고 불려도 상관없다”(34)고 외친다. 전쟁 전에 교육을 받은 사촌 언니가 아름다운 일본어를 구사하는 것을 듣고,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이후 엉망진창이 된 일본어를 보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가운데서 어떻게 인간의 품격을 지켜나가야 할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52)고 밝힌다. 생각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사노 요코가 자신의 살아온 이력이 비추어 세태의 변화에 대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때는, 꼰대 운운하며 슬며시 어물거리는 내 모습이 떠올라 좀 찔리기도 했다. 그런 점도 이 작가의 죽음 철학에 귀 기울이게 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모두들 일정한 방향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듯” 죽음으로 흘러가는 삶, 별 것 아닌 나 하나 죽어도 세계는 곤란해지지 않는다. 소란피우지 말고 죽음을 맞이해보자고 한 말씀 하신 철학 말이다.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50쪽)
자연은 그 어떤 경우에도 실패해서 찢어버리고 싶은 그림처럼 되는 법이 없다.(151쪽)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작은 우주에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소중한 물건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쓸쓸함이었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제는 결코 투명한 모습으로 고요히 내 앞을 스쳐 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152)
내가 죽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잡초가 자라고 작은 꽃이 피며 비가 오고 태양이 빛날 것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나고 양로원에서 아흔넷의 미라 같은 노인이 죽는 매일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 똥에 진흙을 섞은 듯 거무죽죽하고 독충 같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 (157)
죽음을 훌륭하게 맞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다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없어진 것을 깨닫게 된다면
아파서 집에 누워 있을 때
70대 할머니의 다채로운 유머를 경험하고 싶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