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다음 번 운동 약속을 잡자고 한다. 병원을 목요일에 쉬는 친구가 있어서 “목요일 콜?”하고 청한다. “난 안 돼. 그 날 세미나가 두 개나 있어.” “아니, 이 나이에 왠 공부?” “이 나이가 어때서?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지. ㅎㅎ“ 두 다리 생생할 때에 놀러 다니기도 바쁜데, 그 지긋지긋한 공부를 또 하느냐고 은퇴한 친구들이 핀잔을 준다. 헌데, 그 속에는 부러움도 섞여 있다. 내게 묻는다. 무슨 공부를 하는데? 서양철학하고 동양고전을 읽지. 혼자서 ? 아니! 혼자서는 못하지. 그럼,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로 이어지는 질문들을 보면 그 들도 책 읽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게다. 도서관을 가기도 하는데, 나처럼 공부를 하는 게 아니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한다. 읽을 만한 것으로 이 책, 저 책 뒤지다 보면, 할 일없이 시간 때우러 온 것 같은 시선을 스스로 느끼기도 해서……
TV가 고장 났다.
은퇴 후 서너 달은 집에서 마냥 빈둥거렸다. 정년을 꽉 채운 직장생활이었고, 가족들은 그 간의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삶을 희망하는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지만, 내게는 무언가 모를 허탈함? 상실감? 그런 것이 있었다, 누구를 만나기도 싫었다. 은퇴를 말해야 하고, 바로 이어지는 질문, “어떻게 지내?”에 대답하기 마뜩찮다.
마당일을 조금 하고 나면 바로 TV를 켰다. 자세를 바꿔가며 하루 종일 채널을 돌린다. 스포츠, 유투브, 영화, BBC 다큐, CNN 방송까지 시청한다. 손흥민이 나오는 프리미어 리그는 하이라이트부터 본게임까지 여러 번 본다. 그가 골 넣는 장면은 거의 외울 지경이다.
어느 날, TV가 고장이 났다. 음성은 들리는데,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 서비스 센터에서 온 기사는 오래 된 TV이어서 부품이 없단다. 못 고친다는 말이다. 짜증이 난다. 단종되었지만, 전자제품은 7년간 부품을 제공해야 하지 않나요? 10년도 더 되었단다. 그래도 우리 집은 나은 편이란다. 어떤 집은, 특히 노인들만 있는 집은 거의 24시간 TV를 켜 놓은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새 제품이 1~2년 만에 고장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사용한 시간은 생각하지 않고 벌써 고장이 났다고 제품의 하자를 따질 때에는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1~2년 뒤, 내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하다. TV처럼 고장난 나의 일상을 수리해야 했다.
직장생활은 내게 돈과 함께 일상을 만들어 준다. 일 년을, 한 달을, 평일과 휴일을, 또 하루를 만들어 준다. 난 그의 일정대로 움직인다. 회사가 바뀌고, 지위가 올라가고, 살림이 늘어나고, 아이들도 자라서 독립하는 변화가 있지만 나의 일상은 직장이 정한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주어진 그 일상에서 은퇴한 것을 나는 실감하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하루를, 일주일을, 일 년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떤 일상을 만들면 좋을까?
10년 뒤, 파파 할아버지가 된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어떤 노인으로 남고 싶은가. TV 속 뉴스를 보며 ‘욕을 해대는’ 노인, 점잖은 말투이지만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나만이 옳다는 고집쟁이 노인이 되고 싶은가? 아니다. 삶의 경험을 지혜로 녹여 온화하지만 짧은 말로 공감을 줄 수 있는 노인이면 좋겠다. 부처님 수준인가? 안 될 것도 없지만(ㅎㅎ), 흉내라도 낼 수 있으면 바랄 게 없다. 거기에 잔잔히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다면 좋겠지? 젊었을 때 했던 ‘쿵쿵짝짜작’ 드럼은 밴드할 친구들이 없으니 접고. 은퇴하면 연습해 볼 것이라고 5년 전에 구입하여 케이스에 넣어 보관하던 클래식 기타를 꺼냈다. 줄도 새 것으로 갈아 끼웠다. 악기는 이제 연습하면 되는데, 공부는 어떻게 해애 하나. 경험했던 것을 되풀이 하는 기억이 아니라, 나의 삶을 지혜롭게 반추해 보는 그런 공부 말이다. 그것이 기타 줄 갈아 끼우는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책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거의 보지 않으면서도 치우지 못한 전공 서적과 직장생활을 위한 경영관련 책들이다. 일단 싹 다 치워 버렸다. 그리고 여기에 앞으로 내가 읽은 책들로 채우는 나의 일상을 만들어 보기로 한다.
읽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웠던가?
사실, 동네 인문학 공부 모임인 ‘문탁’에 들락거린 것은 초창기부터이다. 무언가 고장 난 것이 있어서 손을 보탤 때나, 특별 강의를 들을 때이거나 짬짬이 들렀다. 서당개마냥 10년을 기웃거리며 세미나를 통한 본격적인 공부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직장생활의 핑계도 있지만 그 들과 함께 무섭게(?) 공부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굳이? 지금 뭣 땜시?’하는 의문이 들어서 이다. 발제해야 하는데 아직 책도 다 못 읽었다고 발을 동동 구르거나, 세미나가 끝난 것 같은데 ‘후기’를 어떻게 쓰지? 하며 머리를 감싸는 모습. 그리고 여행가는 자동차 조수석에서도 손바닥보다 작은 논어 책을 보며, “공자 왈,”하며 외우는 모습에서 ‘참나. 왜 사서 고생이지?’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그런 빡센 공부를 하는 문탁의 문턱을 제대로 넘으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나이를 내세우지 않고 머리 속을 싹 비워 신입생 각오로 문을 열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어차피 할 공부라면,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가능한 많이 읽어 보기로 했다. 서양철학과 동양고전 읽기를 선택했다.

직장생활동안 형편없는 인간성을 가진 경쟁자들의 도전을 받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선(善)이 결국 악(惡)을 이긴다는 심정으로 대처하곤 했다. 유교적인 가르침, 혹은 정의를 부르짖었던 젊은 날의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 나의 개인적인 손해는 감수하겠는데, 내 주위의 선후배(조직)에게 까지 손해가 미칠 때에는 많이 힘들었다. 이제 은퇴 후에 공자의 『논어』를 읽으면서 그 때를 생각하면, 내가 적어도 정의로운 사람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안도가 된다. 하지만, 무언가 2%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얼까? 내가 세상이치를 다 깨달아서 하는 행동마다 이치에 딱딱 맞았던 것은 아니잖어? 라는 의구심이 남아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반면에, 법가인 『한비자』를 읽으면서 무릎을 치는 구절들을 많이 만났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때에 법(法)·술(術)·세(勢)의 운용으로써 무위(無爲)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그의 논지 속에서, 무언가 2% 부족한 유가(儒家)적인 무능(?)함이 치유될 수 있는 여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술수(術數)를 부린다고 생각되면, ’정의롭지 못한 인간‘으로 탓하고 손해를 감수할 것이 아니라, 한비가 보는 세상의 이치가 적용된 경우이니, 그의 법·술·세의 방법으로써 그들의 잔꾀에 대해서 나를, 적어도 나의 주변인들을 보호했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 『한비자』를 읽었다면 그랬을 것 같다. 장자라면 어땠을까? 그래, 그 때 그렇게 손해를 보았어도 나를 지켰고, 지금 은퇴 후에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으니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한자 수업을 고3 때까지 했던 세대라서 동양 고전은 그런대로 따라 갈만 하다. 더욱이 지난 세월들을 반추해보고 환기할 수 있어서 좋다.

문제는 서양철학이다. 철학 공부는 윤리시험을 보느라 그저 누가 뭐라고 했다더라 하고 외우던 것을 심화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은 하나도 없는(!) 원전을 읽는 것이다. 무슨 문장이 ‘한글을 깨친 지가 너무 오래되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난감’, 그 자체였다. 게다가 문탁에서의 공부는 책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면서 진행된다. 각자가 질문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토론을 하는 세미나 방식이다. 내용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언감생심(焉敢生心) 질문은 무슨! “전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혹여 간신히 내용이 이해되는 진도가 있긴 하다. 그런데, 이해했는데 무슨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좌우지간 만들어야 하는 질문 때문에 공부 스트레스는 배가(倍加)되었다. 책의 뒷부분에서 설명될 내용이 나의 질문지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공부한 보람을 느끼는 때인데, 아주 가끔 있다는 것이 흠이다. 좋은 질문꺼리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위대한 철학자의 말꼬리를 잡아 딴지를 걸어 보는 질문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내가 만든 질문을 내가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그런 나의 이해부족이 그럴 듯한 질문으로 바뀌어 (학인들끼리!)토론되기도 한다. 아주 운이 좋은 신기한? 시간이다. 난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읽으면서 질문하는 법과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
수행자처럼 나도 화두가 생겼다.
문탁에서 공부한 지, 삼년정도 되었다. 요즘 내 공부는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꽂혀 있다. 문탁의 공부방 회원들은 일 년에 네 번, 한 가지 주제로 책을 읽고 에세이를 발표하는 프로그램인 ‘1234 읽고쓰기’에 참여한다. 나는 Chat GPT가 일반에게 공개된 작년부터 대학원때의 전공을 살려서 인공지능에 대해서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AI를 공부하던 1990년대에는 AI는 실현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 대신, 인간의 지식 일부를 구현한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이 대세인 시기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학습하는 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정립된 지식이 없었다. 따라서, 인공적으로 지능을 갖춘 기계를 프로그래밍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딥러닝이라는 방법으로 기계가 학습한다고? 사회생활하면서 잊었던 전공이 살아나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알고리즘을 해석한 책들을 보았다. 그 들은 인간이 어떻게 학습하는 지를 파악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인간과 유사한 답을 낼 수 있는 확률적 추론방법을 적용했다. 인간의 학습방법, 인식과는 다른 접근법이다. 전혀 새로운 인식방법이랄까? 인간의 인식방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방법이다. 그래서 AI를 경고하는 전문가들도 보인다. 40여년 전에 공부했던 인공지능을 다시 탐구하면서 살아난 ‘인간이 사고하는 방법’에 대한 호기심을 더 따라 가기로 했다.
나는,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인간은 어떻게 알게 될까?’로 바꾸어 책을 본다. 철학자 칸트에서 인식의 초월론적 사유를 읽고, 신경생물학자 마뚜라나와 바렐라에서는 신경학적 인식,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에서는 마음을, 그리고 최근 안토니오 다마지오에게서는 ‘느낌’을 읽었다. 하지만, 아직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읽을 수만 있다면, 신경생물학부터 뇌과학과 유전학, 사회생물학과 심리학까지 다양하게 읽고 싶어진다. 전공이나 직장생활에 필요한 책이 아니면 시선을 주지 않던 내가 관심있는 주제를 따라 책들을 찾아 나서다니, 나도 모르는 내면의 자아가 꿈틀거리며 나온 것일까?
은퇴후 무언가 모를 상실감에 빠지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내가 왜 그만 두어야 하는가’를 인정하지 못해서 일듯하다. 정년을 훌쩍 넘겼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어도 그 동안의 삶을 유지시켜준 고마움보다 그 곳을 떠나야 하는 상실감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 나를 잡아 준 것은 문탁에서 처음 원전을 접한 동양고전과 서양철학 책 속의 문장들이었다. 그런 상실감이 줄일 수 있는 문장을 만나면 횡재한 날이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쫒아가는 지금 내겐 ‘책읽는 일상’이 주는 재미로 한 살 나이를 더하고 있다. 책을 볼수록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된다. ‘그런 시각도 있겠구나’라고 다양한 눈을 가지려고 힘쓴다.
나의 ‘일상’ 속에 책읽기가 들어 와서 하루를 즐겁게 해준 문탁 학인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