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박완서 전작을 다시 읽고 있다. 그의 거침없는 문장들과 어떤 도식적 비평으로도 가둘 수 없는 세계에 새삼 놀라는 중이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구체적인데도, 인간의 허위와 욕망을 이토록 날카롭게 드러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 마침, 박완서 아카이브 전시가 열린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서울대 중앙도서관 문턱은 높았다. 어렵게 찾은 출입 회전문 앞에서 박완서 전시 장소를 묻는 우리에게 돌아온 첫 말은 “신분증 내세요”였다. 동행한 친구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자 출입은 곧바로 가로막혔고, 다른 방법은 없겠냐고 묻자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요?”라는 ‘통박’이 돌아왔다. 무안했고 위축되었다. 결국 ‘비굴 모드’로 통사정한 끝에 신용카드를 맡기고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이 도서관 시설 견학이나 열람실 이용을 원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오라고 홍보된, 박완서 작가의 육필 원고와 삶의 흔적에 대한 전시를 관람하러 갔을 뿐이다. 더구나 박완서는 <엄마의 말뚝>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해산 바가지> 등 여러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 청소년들이 가족과 가난, 노년과 죽음 같은 삶의 문제를 처음 고민하고 토론하게 만드는 작가다. 그럼에도 전시 공간이 도서관 내부에 있다는 이유로 도서관만의 폐쇄적인 행정 규정을 들이대며 학생들을 문전박대한 것은 명백한 배제이자 차별 아닌가?
질문은 도서관의 존재 이유 자체로 향한다. 10여년 전 뉴욕에 한 달 머물 때 나는 도시락과 노트북, 책을 싸 들고 매일 뉴욕공공도서관에 드나들었다. 신분증 검사는 없었고, 유명한 ‘로즈 메인 리딩 룸’에 앉아 있을 때도 엄숙함보다 개방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조용했지만 위압적이지 않았고, 누구도 “당신은 왜 여기 있느냐”라고 묻지 않았다. 데리다의 말처럼 모든 환대가 무조건적일 수는 없다. 고유한 연구 환경을 지키기 위한 조건부 환대는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이 고유성과 외부성 사이 갈등과 동요는 시민 토론과 합의를 통해 유동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옥스퍼드나 하버드 같은 오래된 대학들도 자체 절차·규정을 지키고 있지만 동시에 전시와 투어, 공개 강연, 지역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시민들과 지식을 공유하려 노력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규정’이 아니라 ‘태도’이다. 시민을 어떤 존재로 상상하느냐, 함께 지식을 나눌 동료 시민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관리·통제해야 할 외부인으로 대하는가의 문제이다.
성미산학교 학생들의 문제 제기 이후 서울대 측은 규정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나는 고민과 토론, 유연한 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것은 박완서 연장 전시 홍보물에 새롭게 추가된 밑도 끝도 없는 단 한 문장, “외부인도 실물 신분증 제출 후 출입 가능, 만 19세 이상만 관람 가능”이다. 결국 대학이 드러낸 것은 환대의 확대가 아니라 관료주의적 완고함과 엘리트주의적 오만함이었다.
평생 일상의 감각을 잃지 않았고, 조용한 연구실이 아니라 생활의 소음 속에서 글을 썼던 박완서.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쓰고, 노년의 고독을 보듬었던 작가의 전시장에서 청소년과 시민들이 ‘방해꾼’으로 취급받는 풍경은 비극적이다. 작가는 생전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썼다. 제 것만을 지키려 담장을 높이고 배움을 독점하려는 이 완고한 성채 앞에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타자를 배제하는 무감각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도서관은 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