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를 처음 접했을 때 오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던 때가 불과 한 달 반 전이었고, 그때만 해도 아무 낌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 돼 여기저기서 올레 이사장 서명숙의 부고가 떴다. 3월 말에 옆구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었는데 4월7일 호스피스 병동에서 숨진 것이다. 황망했다.
서둘러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러나 주말을 낀 제주 1박2일 왕복표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치 아이돌 공연 예매하듯, 추석 귀성열차 예매하듯 새로고침을 반복하면서 간신히 표 한 장을 구했다. 하지만 결국 문상을 가진 못했다. 공항으로 가던 도중, 제주 강풍으로 모든 항공편이 결항이라는 메시지를 받았기때문이다. 전국에 비가 내렸고, 나는 가던 길을 오들오들 떨면서 되짚어 왔다. 조금 울었는데 추위 탓인지, 슬퍼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리의 인연은 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엄혹했던 시절, “담배 없이 대체 무슨 낙으로 사니?”라며 줄담배를 피우던 시절, 그 때문에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처럼 남학생에게 따귀를 맞거나 술 세례를 받기도 했던, 또 다른 야만의 시대! 우리는 남성의 폭력에 맞서 어떻게 복수를 할까 꿈꾸다 결국 ‘여성문제연구회’ 같은 동아리를 만들어냈던 자생적 페미니스트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그 여성 연대 계보 끝자락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느낀다.
시시콜콜한 안부를 챙기는 막역함은 없었으나 자매애의 기억만은 늘 각별했던 우리는, 언니가 올레길을 연 후 종종 만나 ‘놀멍쉬멍’ 걸으며 공통의 기억을 자주 소환했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말하는 ‘후일담’과는 달랐다. 후일담이 지나간 시간을 박제하거나 과거를 소모하는 봉합의 언어라면, 우리가 불러낸 것은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그 시절에 배웠다”의 감각, 의식 밑에 흐르는 무의식이나 자본의 교환 아래 숨 쉬는 증여의 원리 같은, 우리 존재를 지탱하는 어떤 원형(Archetype)에 대한 환기였다. 동시에 우리가 나눈 것은 더 이상 세상이 기억해 주지 않는 이들, 이를테면 서명숙의 기록으로 되살아난 ‘영초 언니’나 여전히 고문의 후유증 속에서 몸과 마음을 앓고 있는 또 다른 선배를 기억하고 위무하는, 둘만의 작은 해원굿이었 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사회적 성취와 상관없이 우리 몸과 마음에는 일상의 고단함과 관계의 상처들이 지층처럼 켜켜이 새겨져 있었다. 가끔씩 우리는 그 내밀한 것들을 살짝 내보이고, 다시 슬쩍 수습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외모도 많이 달라졌다. 언니는 점점 더 제주 자연을 닮은 원색의 두건과 팔찌 등으로 블링블링해졌고, 나는 철학이 아니라 아픈 무릎 때문에 ‘놀멍쉬멍’ 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담배를 끊었고, 언니는 술을 끊었다.
우리가 제주 바다를 보면서 나눈 마지막 이야기는 ‘노년의 로맨스’였다. 사랑과 이별에 델 만큼 덴 나이에 도발적으로 꿈꾸는 노년 로맨스. 나는 “언니는 너무 유명해서 아마 성공하기 힘들 거야”라면서 그를 놀려댔다. 그날 우리는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언니의 작은 집에서 술 없는 밥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언니의 영결식이 열리던 시간, 마음이 헛헛했던 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을 다룬 다큐를 보러 갔다. 그도 언니처럼 오래된 암이 재발했고, 시한부 6개월 선고를 받는다. 그는 그날 일기장에 “내 인생이 끝났다”고 썼다. 하지만 고민한다. 담담히 운명에 순응할까? 부작용을 견디며 5년을 벌까? 안락사를 선택할까? 결국 그는 치료를 받으며 더 버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6개월을 3년6개월로 늘리면서 그는 사위어가는 삶을 가장 간결하고 철학적인 음악으로 번역해냈다.
그에 비해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언니. 지독한 통증을 덜 겪었으니 다행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안타까운가.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죽음의 모습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 평생 알 수 없는 숙제. 어쩌면 우리가 이 지구별에 온 이유는 태어남도 죽음도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그 허무한 숙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기 위함일까? 명숙 언니의 갑작스러운 부재 앞에서, 나는 다시 그 아득한 숙제를 펼쳐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