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박혜윤, 신성준, 최은경 지음/ 아몬드
죽음이 권리가 될 수 있는가
작년에 나이듦연구소에서는 연구원들과 나이듦 대중지성 세미나 회원들이 함께 하는 <존엄사 워크숍>을 열었다. 마침 드라마 <메리 킬즈 피플>과 <은중과 상연>이 방영된 후였다. <은중과 상연>은 말기암 환자가 스위스에 가서 삶을 끝내는 내용이었고, <메리킬즈피플>은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죽음의 약물을 처방하는 의사의 이야기였다. 그보다 이전에는 스위스에서 존엄사를 선택한 어머니의 마지막 여정에 동행한 남유하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를 토대로 한 다큐가 방영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존엄사에 대해 수용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는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였다.
워크숍에서 존엄사에 대한 찬반토론을 하면서 존엄사와 관련한 쟁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임종기에 생명연장장치에 몸을 맡기며 죽음을 늦추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불치의 병이나 말기암으로 고통받을 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당사자 주권과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닌 것처럼 죽을 때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이 문제는 ‘고통을 어떻게 보는가’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현대의료가 제공하는 마약성 진통제 로도 통증을 개선하지 못할 때 굳이 그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고통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 고통을 제거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할수록 의료의 영향력에 자발적으로 예속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이기도 했다. 논의를 통해 이 쟁점들이 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깊이 있는 검토를 필요로 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문화, 제도와도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라는 여러 얼굴을 갖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은 개인의 선택으로 완결될 수 없다
그런데 실존적으로는 자기결정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존엄사를 제도화할 경우 우려되는 점에 대한 질문에서는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존엄사가 제도화될 경우에 영화 <플랜75>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처럼 죽음이 상품화될 수 있고, 가족의 돌봄을 받지 못하거나 경제적으로 빈곤층에 속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먼저 비자발적 죽음을 강요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노인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존엄사가 현대판 고려장이나 일종의 제노사이드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런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존엄사의 제도화보다 우선해서 완화의료와 호스피스를 확대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는 의견도 있었다. 생애 말기 돌봄에 대한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존엄사의 제도화를 앞세울 경우 돌봄의 공공성을 약화하고 신자유주의적인 대안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통합돌봄체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고, 죽음의 의료화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제도화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시대마다 사회마다 달랐다. 우리는 병원에서의 임종을 당연시 하던 시대에서 살던 곳에서의 임종을 존엄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시대를 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환자실의 온갖 기계를 하루라도 더 오래 살게 하는 기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제거해야 할 불필요한 생명연장장치라고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곳이라며 피하던 시대에서 임종기의 고통을 줄이고 이별을 준비하는 곳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변하고 있다. 존엄사라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시대적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
명칭이 달라지면 윤리도 달라진다
이미 존엄사를 제도화한 나라들이 있다. 미국의 오리건주는 1997년부터 존엄사법을 시행해 왔다.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미국의 경우는 2026 현재까지 12개 주가 이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각 주마다 법률의 이름이 다르다. 오리건주에서는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이지만 캘리포니아에서는 <생애말기선택법>(End of Life Option Act)이다. 캐나다에서는 <의료조력사망>(Medical Assistance in Dying)이라고 부른다.
유럽에서도 10여개 나라에서 존엄사제도를 도입했다. 스위스는 따로 법이 없고, 1942년부터 형법으로 이기적 동기 없이 자살을 돕는 것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조력자살을 인정하고 있다. 스위스는 외국인의 경우도 일정한 절차에 의한 조력자살을 허용한다. 유럽에서는 2002년 가장 먼저 이 제도를 도입한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Euthanasia)라고 한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조력자살(Assisted Suicide), 조력사망(Assisted Dying), 생애 말기 선택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대부분 호스피스와 완화의료가 보편화되어 있고, 죽음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사회적 동의 수준이 높은 나라들이다.
우리나라는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을 전후하여 죽음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후 2022년 제21대 국회에서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의 일부로 ‘조력존엄사’를 제도화하자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 법안은 회기 내에 상정되지 않음으로써 자동폐기 되었다. 2024년 22대 국회에서는 아예 독립 법안으로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어 현재 계류 중에 있다. 이 법안이 발의된 이후에는 언론에서도 존엄사나 안락사라는 명칭보다 조력존엄사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조력존엄사법>이라는 명칭은 오리건주의 법률명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존엄사법은 최소 10년 내지 20년 이상의 오랜 논의 과정을 거쳐 제도화되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경우는 이제 막 논의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고령화 속도가 세계 어느곳보다 빠른 탓인지, 죽음의 질이 낮은 때문인지 존엄사 도입에 대한 찬성 비율은 매우 높다. 2008년 서울대 연구팀이 처음으로 의사, 환자, 환자 가족, 일반인을 대상으로 안락사에 대한 의식 조사를 했을 때는 찬반이 거의 5대5로 팽팽했지만,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찬성이 늘어났다. 2022년에서 2025년까지 3년간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0%가 조력 존엄사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그러다 보니 책 출판이나 언론의 보도 역시 빠르게 늘고 있다.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존엄사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가톨릭계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런 속도에 대해 경계하는 움직임 역시 만만치 않다. 존엄사는 복잡한 쟁점들이 얽혀 있는 문제인 만큼 입법을 서두르기보다는 좀 더 신중한 분석과 접근, 광범위한 논의를 통한 사회적 합의, 그리고 속도 조절과 우선순위 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최근 출간된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은 보기 드물게 우리나라의 존엄사 논의를 깊이 분석하고 성찰한 책이다. 그동안 존엄사와 관련한 책들이 존엄사를 선택한 사람들을 대변하거나 스위스에서의 조력사망에 대한 취재를 정리하여 정보를 공유하는 내용이었던 것과 달리 세 명의 저자가 모두 의료현장과 의료윤리 연구 분야의 전문가라는 점 역시 눈에 띈다.
먼저 이 책의 1부는 이 새로운 죽음의 방식을 뭐라 부를 것인지 질문하며 조력존엄사 대신 의사조력임종으로 고쳐 부르자고 제안한다. 조력존엄사에는 이미 조력사=좋은 죽음이라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존엄사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조력존엄사에는 존엄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존엄을 둘러싼 가치판단의 문제도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존엄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또 의료조력이라는 명칭은 제도로서의 의료를 앞세우면서 의사가 감당해야 할 책무를 은폐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의 성격이 의사조력사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고 한다. 자살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도덕적 판단의 차이 때문에 조력자살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는다. 조력사망 대신 조력임종이라는 말을 쓴 까닭은 죽음이라는 결과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이다. 의사조력임종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씀으로써 어떤 조력임종은 용남될 수 있고 어떤 것은 용납될 수 없는지 그 윤리적 책무에 대해 세밀하게 따져볼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저자들은 연명의료중단이 치료를 멈추는 것이라면, 의사조력임종은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연명의료중단은 이미 존엄사의 일부로 수용되었고, 조력임종은 아직 논쟁 중에 있는 개념이다. 단적으로 가톨릭도 연명의료중단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가지 행위를 명확히 분리하여 도덕적 차이를 가를 수 있는 근거가 생각만큼 뚜렷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역시 죽음의 문제는 그 명칭을 뭐라 붙이든 그렇게 명쾌하지가 않다.

깨끗한 죽음에서 연결된 죽음으로
이 책의 2부는 조력임종논쟁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묻는다. 의사의 권위가 환자와 보호자의 생각을 압도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조력임종을 요구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 이전에 환자의 치료거부권 보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격하게 공감이 갔다. 3부는 조력임종을 옹호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인 자기결정권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질문한다. 더불어 의사가 죽음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지 자문한다. 4부는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조력임종을 합법화한 나라들이 어떤 사회적 합의를 거쳤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제 출발점에 선 조력임종논의가 가야할 방향을 제안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책의 말미에 있는 ‘대담’이다. 책의 본문이 다소 정제된 언어로 작성된 글인 반면 ‘대담’은 이들 세 사람의 생각이 서로 어떻게 얽히고 교차하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앞부분을 읽고 대담을 읽는 게 가장 좋겠지만 전체를 읽을 수 없다면 대담이라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조력임종과 관련된 거의 모든 쟁점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이 문제를 토론하고 검토하는 동안 우리의 삶과 죽음이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매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개인의 선택만으로 완결될 수 없는 연결된 죽음’이 바로 조력임종이라는 문제를 보는 창이어야 하며, 조력임종에 대한 찬반입장을 넘어 이 새로운 죽음의 방식이 우리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들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이제 1년 전의 <존엄사 워크숍>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워크숍을 열게 되면 그 때는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을 읽고 심화 토론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