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으로 돌볼 수 있을까?
부모가 병들면 자식은 가장 먼저 생각한다. ‘내가 자식인데, 내가 돌봐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미안하고, 때로는 불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를 낳고 키워준 부모가 이제 나를 필요로 하는데 자식인 내가 곁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치매 돌봄을 오래 하다 보면 이 당연해 보이는 생각 앞에서 흔들리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이 돌봄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마음과 현실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거리가 있다.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고, 직장과 자신의 가정을 돌보다 보면 부모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다시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내가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내가 자식인데 이것도 못 해드리나.’ 하지 못한 일은 죄책감으로 남는다. 그리고 부모를 잘 돌보고 싶다는 마음이 클수록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아진다.
진료실에서도 그런 가족들을 자주 만난다. 처음에는 부모의 병 때문에 함께 병원에 오던 자식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식의 얼굴이 지쳐간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불안과 우울을 호소한다. 부모를 돌보느라 자신의 병원 진료를 미루기도 한다. 부모가 환자였는데, 어느새 돌보던 자식까지 환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치매 돌봄은 며칠 병상을 지키다 끝나는 간병이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하나의 ‘생활’이다. 밥을 챙기고 약을 먹이고 병원에 모시고 간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실을 돕는다. 넘어지지는 않을까 살피고, 같은 질문에 몇 번이고 다시 대답한다. 그러한 생활은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랑만으로 버티기에는 돌봄의 시간이 너무 길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지친다. 돌봄을 받는 사람만큼이나 돌보는 사람도 지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돌봄도 오래갈 수 있고, 사랑도 오래 남을 수 있다.

사랑이 ‘의무’가 되기 전에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만 힘든 것이 아니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이 지쳐가는 일이다. 처음에는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해도 웃으며 다시 대답한다. 치매의 증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식사를 거부하고, 씻지 않겠다고 버티고, 약을 먹지 않겠다고 화를 내기도 한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서 가족이 가져갔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밤낮이 바뀌어 한밤중에 돌아다니거나 잠든 가족을 깨우기도 한다.
돌보는 사람도 사람이다. 몸이 지치면 마음의 여유도 함께 줄어든다. 어느 순간부터 환자의 행동이 ‘치매의 증상’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행동’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조금 더 지나면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는다.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는 일본의 영상작가 노부토모 나오코가 어머니의 치매 진단 이후, 도쿄와 고향인 히로시마현 구레를 오가며 부모의 삶과 돌봄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직접 모든 간병을 떠맡기보다, 90대 아버지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간다.
나오코는 만약 어머니의 간병을 자신이 전부 떠맡았다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녹초가 되었을 것이며, 결국 모든 것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고 어머니를 미워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치매 돌봄에서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사랑으로 시작한 돌봄이 오히려 사랑을 소진시킬 수 있다는 것.
처음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돌봄은 어느 순간 의무가 되고, 의무는 피로가 되며, 쌓인 피로는 짜증과 원망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오코는 미리 간병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말한다. 때로 가족으로서 간병을 쉬는 것은 환자를 포기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치지 않도록 나를 지키는 것은 결국 내가 돌보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좋은 간병은 얼마나 많은 일을 혼자 해냈느냐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내려놓고, 나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래야 그 치매 있는 분에게 간병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가족을 돌보면서 이 문제를 여러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쇠약해진 아버지를 보호자로서 돌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몇 차례 목욕을 시켜드린 기억이 특히 선명하다. 당시 아버지는 인지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심근경색을 앓은 뒤 심부전까지 겹쳐 몸이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집에 간병인이 오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목욕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를 씻겨드렸다.
목욕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몸은 쇠약했지만, 관절과 근육은 경직되고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자세를 바꾸려고 하면 몸이 뻣뻣해졌고, 조금만 중심을 잃으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아버지의 몸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물을 뿌리고 닦았다. 미끄러운 욕실에서 혹시라도 넘어질까 온몸에 힘을 주었다. 목욕을 끝내고 옷까지 입혀드리고 나니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때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마음과 잘 돌볼 수 있는 능력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쇠약해진 아버지를 안전하게 목욕시키는 일에는 서툰 간병인이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돌봄을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렇다면 가족이 모든 것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면, 가족은 무엇을 해야 할까. 목욕을 전문가에게 맡기고, 이동이나 배변 관리를 도움받고, 때로는 식사와 약을 챙기는 일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다면 가족의 역할은 줄어드는 것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돌봄을 나누는 것은 가족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가족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다.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는 일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쇠약한 몸을 안전하게 옮기고 낙상을 막는 데에도 경험과 요령이 필요하다. 이런 일은 훈련받고 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가족보다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다른 역할이 있다. 그 사람을 끝까지 ‘환자’로만 보지 않고, 내가 평생 알고 지낸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치매가 진행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점점 병으로 설명하게 된다. 기억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대소변을 가릴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삶이 어느새 인지기능과 일상생활 수행 능력의 목록으로 바뀐다. 그러나 가족은 그 목록에 적히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람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젊은 날이 있었으며,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고 자식을 키우며 웃고 울던 시간이 있었다.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어떤 일을 자랑스러워했고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했는지를 가족은 기억한다.
치매 돌봄에서 ‘사람 중심 돌봄(person-centred care)’에 큰 영향을 미친 영국의 심리학자 톰 키트우드는 치매가 진행되어 기억과 판단력이 떨어져도 그 사람의 ‘사람됨(personhood)’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사람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진다. 누군가가 여전히 나를 한 사람으로 알아보고 존중해 줄 때, 치매가 있어도 나는 여전히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가족의 역할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치매는 그 사람의 기억을 하나씩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가족의 기억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어머니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잊어도 나는 기억한다.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누구를 사랑했고 어떤 일에 웃고 마음 아파했는지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치매 환자’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로 알아볼 수 있다. 과거의 사진을 함께 보고, 좋아하던 노래를 듣고,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어주고,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것은 단순한 정서적 위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내가 알고 살아온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것을 확인해 주는 일이다.

사랑이 남는 돌봄을 위하여
전문가는 돌봄의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 가족은 그 치매 어르신의 삶을 기억하고 관계를 지킬 수 있다.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 잘할 수 있는 일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을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전문가에게 돌봄의 일부를 맡기는 것은 사랑을 외주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전문가의 기술을 빌리는 것이다.
치매가 깊어지면 언젠가는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어가더라도 나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다. 어쩌면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돌봄은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 사람을 알아봐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환자가 되어도 여전히 나의 아버지이고 나의 어머니라는 것. 기억을 잃어도 한평생을 살아온 한 사람이라는 것. 그것을 잊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좋은 돌봄은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오래 해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머니 곁에 앉아 손을 잡는다. “엄마, 나 왔어.” 이 한마디만큼은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돌봄을 나누어야 사랑이 남는다.
인용한 문헌
노부토모 나오코 저/ 최윤영 역,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시공사, 2021
Kitwood, T. 『Dementia Reconsidered: The Person Comes Fir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