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소유』, 정찬주, 열림원
오도송과 열반송
얼마 전 아버지 구순을 맞아 가족여행을 하던 중 고성의 화암사를 방문했다. 일주문을 지나 절 경내로 들어서기까지 1키로 남짓한 길 양쪽에는 선사들의 열반송과 오도송을 새긴 석비가 이어져 있었다. 길을 가며 그 오도송과 열반송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도송은 선사들이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한 시이고, 열반송은 열반에 들기 전에 남긴 시이다. 열반송은 임종게라고도 한다. 오도송도 열반송도 그 사람의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준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치달려왔고 보지 못하였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괴로운 생은 거듭되었다.
집 짓는자여, [이제] 그대는 보여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법구경』)
『법구경』에 실린 부처님의 오도송이다. 여기서 집 짓는 자는 갈애와 무명을 뜻한다. 부처님은 그동안 번뇌적 생존인 윤회를 거듭해 왔지만 이제 번뇌의 원인이 된 무명과 갈애를 끊어내어 번뇌의 삶이 다하였음을 이 시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중국의 선사들은 대개 열반송을 남겼다. 그러나 열반송을 남기지 않은 선사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오극근(1063~1135)과 대혜종고(1089~1163)이다. 이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다. 북송시대 선사인 원오극근은 선어록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벽암록』의 저자이다. 원오의 임종이 다가오자 제자들이 관례에 따라 열반송을 남겨달라 청했다. 원오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무 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데, 게송을 남길 이유가 있겠는가. 오직 인연에 따를 뿐이나 진중하고 진중하도다.
已徹無功 不必留頌 聊爾應緣 珍重珍重(『죽음을 철학하는 시간』, 이일야 지음, 불교신문사)
아마도 원오는 선사들 사이에서 죽기 전 열반송을 지어 남기는 것이 당연시되던 풍토를 경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상식과 통념을 깨는 선사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대혜종고도 따로 열반송을 남기지 않았다. 원오극근이 『벽암록』으로 유명한 것 이상으로 대혜종고는 간화선의 주창자로 선종의 역사에 끼친 영향이 심대한 사람이다. 간화선은 당시 유행하던 묵조선에 대항하는 새로운 수행법이었다. 묵조선은 묵언과 좌선을 통한 관조를 중시하는 수행방식이었다. 대혜 종고는 묵조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비판의 요지는 고목이나 불 꺼진 재처럼 좌선하는 데서 과연 무슨 새로운 것이 나오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혜는 선수행이 형식화되는 것을 비판하고, 활발할한 수행의 방법으로 화두를 드는 간화선을 주창했다. 대혜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이 열반송을 청했다. 대혜는 게송이 없으면 죽지도 못하는가, 라고 일갈했다.
삶도 죽음도 그대로인데, 게송이 있든 없든 그 무슨 상관인가.
生也只恁麽 死也只恁麽 有偈與無偈 是甚麽熱大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

법정스님
무소유의 작가, 법정스님
원오극근과 대혜종고는 열반송이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버린 절집 문화에서는 하나의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열반송을 남긴 선사들이 모두 형식에 매몰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가까운 우리 시대를 보아도 경허스님, 성철스님, 효봉스님 등이 임종 전에 열반송을 남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내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법정스님의 유훈이다. 얼마전 나이듦 연구소에서 엔딩노트 워크샵을 준비하면서 나는 법정 스님이 자신의 장례에 대해 남긴 유훈을 접하고 감동을 받았다.
이번에 법정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무소유』와 에세이들을 읽기 전에 나는 법정스님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그분이 한때 무소유 열풍을 불러 일으킨 책, 『무소유』를 비롯하여 많은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라는 정도였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죽은 후 자신이 쓴 책을 절판시키라는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죽은 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마저 경계한 기상에 놀랐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뒤 일까지 지시하고 간 걸 보면 너무 까칠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분의 유훈을 보기 전에 스님의 생애를 간단히 짚어보자. 스님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우리 사회를 할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4년 22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당대의 대스승이었던 효봉선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운허스님의 부름을 받아 『불교사전』 작업에 참여하고 이후 동국 역경원의 역경사업에 역경위원으로 활동했다. 『사상계』 등을 통해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어 불교계가 정권과 유착되어 있던 1970년대 초 함석헌, 장준하 선생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청년들이 하루 아침에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서울살이를 접고 송광사로 돌아갔다. 그 뒤 송광사 불일암 거처하며 18년간 수행하고 글쓰는 생활을 했다. 이름이 알려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더 조용한 곳을 찾아 1992년 강원도 오대산 산골의 수류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 수행자가 몸담아 사는 생활공간을 얼마만큼 최소화할 수 있는가를 나는 이 집에서 실험해 보고 싶다. 수행자에게 어떤 것이 본질적인 삶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삶인가를 순간순간 나에게 물으려고 한다.(『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문학의 숲)
수류산방으로 거처를 옮길 때 마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법정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보살이 전 재산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법정은 자신은 주지가 되어본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며 몇차례 사양했다. 그러나 평소 뜻한 바를 사회적으로 실천하겠다는 마음으로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든 후 대원각을 기증받아 1995년 그 자리에 길상사를 창건했다. 법정스님은 주지직을 맡지 않았을 뿐더러 길상사에서의 범회와 활동에 참석하는 경우에도 단 하룻밤도 길상사에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글에는 자신이 절에 들어와 출가자로 살면서 이 세상에 시은施恩(시주의 은혜)을 진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내용이 자주 보인다. 50년을 밥이며 집이며 옷이며 공짜로 얻어쓰고 많은 빚을 졌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공양 때마다 절집에서 외는 ‘오관게’를 자기 식으로 바꾸어 외웠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심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위해 이 공양을 받습니다

스님이 손수 만든 불일암의 의자
수의와 관을 쓰지 말고 삼일장도 치르지 말라
법정스님은 75세가 되던 2007년 폐암진단을 받았다. 병고와 함께 하겠다고 생각했으나 주위의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미국으로 가서 폐암치료를 받았다. 언젠가 법정은 병이 들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병자 혼자서만 앓는 것이 아니라 친지들도 친분의 농도만큼 함께 앓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에세이를 읽으며 법정스님이 평소의 지론과 달리 병을 치료하기 위해 멀리 미국까지 갔던 것 역시 주위 사람들과 함께 앓는 과정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늘 치열하게 사는 수행자로서 고독과 침묵을 추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의 굴레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2008년 치료가 되었다는 판정을 받고 귀국하여 글도 쓰고 법문도 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으나 2009년 검진차 들른 병원에서 병이 재발한 것을 알게 된다. 병의 재발을 알기 전 2009년 봄, 길상사의 초파일 법문이 공식적인 마지막 법문이었다. 이 법문에서 스님은 아름다운 봄날을 찬탄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런 기회가 우리 생애에서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한때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설 때마다 고맙게 여겨지고, 언젠가는 내가 이 자리를 비우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법문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갑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일기일회』, 법정, 문학의 숲)
병을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몸 상태는 나빠지기만 했다. 의사들은 연명치료를 권했으나 스님은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입적하기 전 스님은 병원을 떠나 그동안 단 하룻밤도 묵은 적 없었던 길상사로 가서 그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세상 나이 79세, 법랍 56세였다. 법정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무소유』는 임종 전날 제자들에게 남긴 유훈을 이렇게 전한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일체의 번거로운 장례의식은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라. 화환과 부의금을 받지 말라. 삼일장 하지 말고 지체 없이 화장하라.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고 사리를 찾지 말고, 탑도, 비도 세우지 말라.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고승들의 다비식을 뉴스에서 보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유명한 스님들의 경우의 장례는 기름에 적신 장작을 높이 쌓아올리고 그 위에 관을 안치한 후 불을 붙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면서 기도를 올리고 염불을 한다. 그리고 불이 꺼진 후에는 오색 영롱한 사리가 얼마나 나왔는지를 앞다투어 보도하곤 했다. 사리는 죽은 스님의 수행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런 장례문화는 사실 부처님의 장례에 기원을 둔다. 『니가니까야』에 실린 「대반열반경」을 보면 부처님은 자신의 장례를 세속의 왕의 예로써 치를 것을 지시했다. 화장 후 나온 사리는 여덟 부족에게 분배되었고, 사리를 모신 불탑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찾고 의지하는 예배처가 되었다. 우리나라 고승들의 장례는 종교의 위세를 자랑하듯이 마치 부처님의 장례처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법정스님은 자신이 추구해온 무소유의 삶을 배반하는 성대한 장례를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법정스님은 장례를 번거롭게 치르지 말라고 부탁했다. 관과 수의 없이 화장하고, 삼일장이 아닌 즉시 화장을 요구했다. 장례를 치른 후 사리를 찾지도 말고 자신을 기리는 그 무엇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스님의 유훈이 그대로 엄수되지는 못했다. 길상사에서 돌아가신 후 스님의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유해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삼일장을 치렀다. 수의도 입히지 않고 관을 짜지도 않았지만 다비장까지 시신을 옮기기 위해 평소 쓰던 평상에 눕혀 운구해야 했다. 만장도 없고, 영결식도 없고, 상여도 없었다. 일체의 장례의식은 생략되었다. 스님의 유골은 49재 후에 인근에 산골되었다.

강원도 수류산방
에세이집 『아름다운 마무리』에 실린 ‘임종게와 사리’라는 글에서 법정스님은 조주 선사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세상을 뜨고 나면 불태워 버리고 사리 같은 걸 골라 거두지 말라. 선사의 제자는 세속인과 다르다. 더구나 이 몸뚱이는 헛것인데 사리가 무슨 소용이냐. 이런 짓은 당치 않다!” 법정스님은 같은 글에서 “타인의 죽음을 모방할 수 없듯이 마지막 남기는 그 한 마디도 남의 글을 흉내낼 수 없다. 그의 한 생애가 그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가장 그 자신다운 한마디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혜능선사의 제자인 남양의 혜충국사가 임종게를 원하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말해 온 것이 모두 내 유언이다”라고 했다는 말도 소개한다. 법정스님 스스로도 자신이 남긴 글과 말, 그리고 삶이 자신의 임종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임종 자체가 의료화된 현실에서 존엄한 죽음을 위해 내가 바라는 임종의료와 장례, 유산의 처리 등을 기록한 엔딩노트를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엔딩노트는 좋은 죽음을 위해 좋은 시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나의 삶이 곧 나의 유언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수행자로 살았던 법정스님이 남긴 말과 글을 통해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