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애도가치의 불평등
2015년 1월 20일,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동영상 하나를 공개했다. 거기에는 일본인 기업가 유카와 하루나(당시 42세)와 프리랜서 전쟁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당시 47세)가 오렌지색 옷을 입고 손목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IS는 일본이 서방 군에 1억 달러를 지원했다는 것을 명분 삼아 이들을 체포했고, 몸값으로 72시간 이내에 2억 달러(한화 약 2천억)를 내라고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급하게 대책본부를 꾸려서 IS와 협상에 나섰지만, 시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유카와 하루나는 ‘처형’ 당한다.
1972년생 유카와 하루나(湯川遥菜)는 지바현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유카와 마사유키(湯川正行)였다고 한다. 그는 SNS 등에서 자신을 ‘밀리터리 컨설던트’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약간 다른 것 같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군용 헬멧 등을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으나 사업에 실패했고, 부인마저 암으로 사망하면서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곤경에 빠진다. 이후 그는 이름을 여성적 뉘앙스를 풍기는 유카와 하루나로 개명하고 제2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차원에서 시리아로 떠났다고 한다.
교토 겐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작은 비디오카메라 한 대를 들고 중동,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대를 찾아다니며 소년병의 참상 등을 취재해서 알렸던 프리랜서 언론인이다. 유카와 하루나의 피랍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러 시리아로 떠난 후 역시 IS에 체포되었다. 유카와 하루나를 살해한 이후 IS는 교토 겐지의 석방 조건으로 돈 대신 2006년 요르단 테러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돼 있는 사리자 알 리샤위라는 여성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겐지 역시 살해당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일본인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교토 겐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서점에는 그의 저서가 동이 나고 <나는 겐지다 (I AM KENJI)>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은 촛불집회를 열었다. 이에 비해 유카와 하루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가 일본 국민을 향해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ご迷惑をかけました. 申し訳ございませんでした)”라고 공개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말라는 곳에 간 것은 본인 책임이다”라는 식의 싸늘한 반응이 다수를 이루었다. 심지어 많은 일본인이 ‘사이즈 XL 밀리터리’, ‘페이크 솔저’, ‘실패한 모험가’ 등의 밈과 합성사진 등을 만들어 인터넷과 SNS에 유통하는 방식으로 그를 조롱했다.
2.요시오와 토루
연극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의 짧은 리뷰가 일리치 약국 뉴스레터에 실렸다. 난 마음이 동했으나 거리나 비용이 좀 부담스러워 망설이는 사이 공연은 끝나가고 있었다. 결국 난 막공을 보러 백만년 만에 대학로에 갔다. 하지만 그날 난 ‘힙’해 보이는 대학로 골목 사이에서 극장을 찾지 못해 헤맸고, 겨우 도착한 후엔 티켓 교환 줄과 화장실 줄을 혼동해서 우왕좌왕했고, 마지막엔 화장실에 티켓을 놓고 나왔다. 서울에 온 시골 쥐가 따로 없는 형국이었다.
연극에 대한 사전 정보는 많지 않았다. 한 일본인 젊은 작가가 위의 유카와 하루나 & 고토 겐지의 실화를 모티브로 극본을 썼고, 이것으로 신인 극작가 상을 받았다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초연을 했고 유례없는 성황 속에 올해 재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자, 컨테이너 하나가 달랑 있는 어느 집 뒷마당이 보인다. 그날은 그 집 가장인 키리노 켄토의 장례식 날이었고, 그의 납관을 도운 사람은 스물일곱의 초짜 장례지도사 사카모토 토루이다. 그는 고인의 옛 제자이자 고인의 아들 친구였다. 그의 앞에 갑자기 10년 전에 실종된 켄토의 아들, 요시오가 등장한다. 그리고 장면은 10년 전으로 플래시백 된다.
같은 뒷마당. 그곳엔 17세의 토루와 요시오, 요시오의 누나 카즈에와 그녀의 친구 유우카가 있다. 토루와 요시오는 절친이고, 함께 농구를 하고, 요시오가 슬쩍 훔친 자전거 때문에 한바탕 입씨름을 벌인다. 카즈에와 유우카는 오키나와로 여행하고 싶다. 비키니를 입을 생각에 설레지만 먼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야 한다. 토루는 친구 요시오의 누나, 카즈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느 10대들처럼 그들은 낄낄거리고 툴툴거리며 왁자지껄하다.
그러다가 끼익하는 날카로운 쇳소리. 어디선가 누군가가 차에 치였다. 달려 나가는 유우카. 다른 친구들은 머뭇거린다. 유우카는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를 수습해 주고 손에 피를 묻힌 채 돌아왔다. 어떻게 유우카는 죽음 앞에 망설임이 없지? 혹시 장의사 집 딸이어서 그런 걸까? 토루, 요시오, 카즈에는 여전히 사체 앞에 몸이 굳는다. 평온한 일상에 느닷없이 침범해 온 죽음이라는 사건은 낯설고 두렵다.
이후에도 연극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이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사실 요시오는 ‘아싸’다. 중학교 때 토루가 이사오기 전까지 학교 친구들은 매일 요시오를 놀렸다. 학교 농구 코치인 아버지도 아들을 몰아친다. 좀 더 사내답기를, 장래 희망이 분명하기를, 농구선수로 대성하기를 주문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버겁다. 유일하게 누나 카즈에만 요시오를 이해한다. 그녀는 요시오가 자기 비키니를 입고 놀아도 놀리지 않는다. 심지어 카즈에는 동생에게 다음 생일 때는 깜짝 놀랄만한 선물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 두 번째 죽음이 침범한다. 친구 유우카처럼 마음을 내고 용기를 내서 고양이를 구하러 길에 나선 카즈에가 뺑소니 차에 치여 죽은 것이다. 이제 요시오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는 방에 처박혀 밥도 먹지 않고 나오지도 않는다.
3.길에서 죽는 고양이
야생동물은 어떻게 죽을까? 노화? 질병? 상위 포식자에 의해?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야생동물의 사망원인 1위가 교통사고이다. 영국 노팅엄대학교 연구진에 따르면 야생동물의 사망원인 중의 무려 30%가 로드킬이라고 한다. 특히 멸종위기 동물 중 ‘최소관심(Least Concern, LC)’ 종인 여우청서와 버지니아주머니쥐는 전체 사망원인 중 58%와 46%가 로드킬이었고, ‘준위협(Near Threatened, NT)’ 종인 아일랜드여우는 48%, ‘위기(Endangered, EN)’ 등급인 아프리카들개는 38%가 로드킬로 죽었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수없이 많은 동물이 길 위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로드킬 1위 동물은 고라니이고 2위는 고양이이다.
“국립생태원이 2016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고라니 로드킬 발생 건수 추정> 논문은 매년 6만 마리 이상의 고라니가 길 위에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했다…매년 도로 1킬로미터당 한 마리씩 죽는 셈이다. 하지만 이 숫자는 현실을 다 반영하지 못한다. 약 15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1차선 도로와 도심에 있는 4만 8천 킬로미터의 도시 도로는 사고 발생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추정 범위에서 빠져있다.
차에 치인 동물은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가거나 부상당한 채 도로를 벗어나 죽는 경우가 많고, 이런 일은 가드레일이 없는 소형도로에서 발생할 확률이 더 높다… 특히 고라니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 즉사하지 않는 경우에도 거의 구조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친 고라니 중 상당수도 결국 죽게 된다. 대다수의 지자체는 고라니가 유해 동물이라는 이유로 구조하지 않는다.” (문선희, <이름보다 오래된>, p65)
2022년부터 도심에서의 로드킬을 공식 통계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거리에서 가장 많이 죽는 동물은 고라니를 제치고 고양이가 되었다. 한때 고양이는 곡물을 훔쳐 먹는 쥐만 잡을 뿐, 곡식엔 눈길도 주지 않아서 농사꾼들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는 “고양이, 특히 검은 고양이는 마녀의 상징이자 악마의 하수인으로 여겨져 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항해 시대에는 목제 범선을 갉아 먹는 쥐를 잡았기 때문에 다시 추앙받았다. (이은희, “바뀐 건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야”, <EPI 28호>)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급격하게 고양이 반려묘가 늘어 10년 사이에 약 63만 마리에서 254만 마리로 300% 이상 폭증했다. 문제는 그렇게 고양이를 많이 키우는 만큼 많이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키우기 힘들어서 혹은 도심 재개발 등으로 길에 버려진 길고양이는 전국적으로 100만 마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중 고양이 로드킬은 1만 7,527건으로(2021년) 전체 로드킬의 47%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로드킬 당한 고양이는 사체인 상태로 방치되거나 아니면 쓰레기로 수습되어 소각된다.
들고양이와 야생 고라니에 한정해서 말해보면 이들은 지금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 시민처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쟁상태에 놓여있다.
4.너의 쇄골에 잠들어도 돼?
아버지가 방문을 두드려도 친구 토루가 다스베이더 티셔츠를 들고 와서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졸라도 요시오는 문을 열지 않는다. 유우카가 문밖에서 가만히 말한다. “나 그렇게 많이 슬프지는 않아. 왜냐하면 카즈에가 죽은 건 사실이지만 그게 끝이 아니니까” 방문을 열고 요시오가 나온다. 유우카는 말을 이어간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있었어.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했어. 죽음이 뭘까? 심장이 멎는 것? 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죽음’이라는 말과 함께 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언어에 얽매여 있지 않는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역으로 언어의 힘을 믿는다면 언제든지 카즈에를 만날 수도 있지.
요시오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자 유우카는 요시오를 마주 세워 그를 보며 다시 말한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래, 어디가 좋을까? 아, 여기가 좋겠구나. 여기, 이 쇄골! 그리고 요시오의 쇄골에 손을 갖다 대고 유우카가 말한다. “너의 쇄골에 카즈에가 잠들고 있습니다” 요시오는 운다. 누나, 일어나봐. 한번만 일어나봐. 그러나 하이데거의 말대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제 요시오의 쇄골에는 죽은 카지에가 머문다.
요시오는 일상을 회복한다. 하지만 더 이상 ‘아싸’의 상태를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는 화려하게 입고 화장을 한 채로 학교에 간다. 일종의 커밍아웃! 아버지는 기함하지만 요시오는 기죽지 않는다. 급기야 학교를 때려치우고 이제 다른 삶을 꿈꾼다. 우연히 만난 프리랜서 종군 사진 작가인 타쿠지가 그의 새로운 친구가 된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타쿠지는 있는 그대로의 요시오를 찍어준다. 사실 타쿠지도 한 때는 ‘아싸’였고,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매일 죽음을 꿈꾸기도 했었다.
요시오는 타쿠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리아로 간다. 타쿠지도 결국 동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체포되고 고문받고 화염방사기로 ‘처형’된다. 세상은 발칵 뒤집히고 그들과 가족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호기심과 조롱거리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줄곧 스스로에게 묻는다. 혹시 요시오가 죽은 건 나 때문 아닐까? (토루), 혹시 타쿠지를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닐까? (타쿠지 부인), 카즈에를 죽게 한 것은 나였을 거야! (유우카). 그렇게 십 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요시오는 누나의 마지막 선물인 화려한 꽃무늬 유카타를 입고 나온다. 온몸이 녹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이국땅에서 버려졌을 요시오를 뒤늦게 친구 토로가 장례를 치러준다.
“탕관(湯灌)이라는 것은, 현세에서의 번뇌, 아픔, 고통 등을 씻어내는 의식입니다…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요시오가 응답한다. “토루, 이 모든 것이 끝나면 너의 쇄골에 잠들어도 돼? 이 모든 의식이 끝나면 립스틱을 발라줘”
모든 관객이 울고 있다. 나도 따라서 운다.
5.애도의 공동체
주디스 버틀러는 9.11 이후 누가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되고, 누가 공적 애도의 대상에서 탈락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9.11 테러의 희생자는 전 국민의 공적인 애도를 받았지만 미국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은 공적 애도의 장에 진입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름도 얼굴도 지워진 채 죽는다. 그러나 얼굴도 없고, 애도 가능성이 무한히 연기된 그 삶 앞에서 우리가 무감각해진다면, 즉 애도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면 “폭력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삶에 대한 그 이해를 잃게 된다.” (버틀러, <위태로운 삶>, P18)
“폭력에 대한 반대는 곧 그 생명이 가치 있는 생명이라는 확인이다. 누군가가 폭력으로 인해 죽었을 때 그 죽음이 손실로 인지되려면, 그 누군가가 살아 있을 때 그 누군가의 생명이 가치 있는 생명으로 인지되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가치 있는 생명이란 죽은 뒤에 애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생명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 세상은 생명의 가치를 평등하게 매기지 않는다. 부상당하거나 살상당하지 않을 권리가 항상 인지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애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생명, 애도가치를 인정받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생명이 애도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와 트랜스 혐오, 여성 혐오, 가난한 사람들과 기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구조적 경시는 그 여러 이유 중 몇 가지다.”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P44)
애도는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취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해진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겪은 상실이 자기를 영원히 바꿔놓으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애도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행위인 이유는 모든 삶의 취약성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부터 더 깊고 넓은 상호의존과 비폭력적 연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끝났다. 관객은 모두 기립박수를 쳤고 커튼콜로 불려 나온 배우들은 상기된 상태로 인사를 한다. 요시오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배우가 말한다.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저의 쇄골에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고양이와 요시오와 카즈에와 타쿠지와 겐토의 죽음을 함께 애도했던 그날 그 장소의 200명은, 적어도 연극이 상연되던 두 시간 동안 모든 생명의 애도가치를 동등하게 여기는 애도의 공동체를 구성했다. 연극이 끝나고 흩어진 이후에도 애도의 공동체는 유지될까?
나는 각자가 집에 돌아가면서 자기 쇄골에 잠든 사람들을 떠올렸으리라 생각한다. 돌아가신 부모, 자살한 친구, 요절한 형제, 나아가 퇴근길 도보에 서 있다가 느닷없이 교통사고를 당한 시청 공무원, 이태원의 159명 사망자, 세월호의 299명 사망자, 강남역 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칼에 찔려 죽은 젊은 여성, 성전환 후 강제 전역당하고 자살한 변희수 하사, 가자 지구 전쟁 사망자 3만 9천 명, 로드킬 당한 고라니, 농약을 먹고 떼죽음 당한 독수리….
나의 쇄골에 이들 천사가 잠들어있기를 깊이 기원했다.
-연극 시작하고 바로, 10년만에 토루앞에 나타난 요시오가 말한다.
요시오 : “영국인들은 이렇게 말해. 왓 디드 유 두 투다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토루: “글쎄, 죽기 위해 뭘 했냐는 건가?”
요시오 : “아니야. 투데이를 투다이라고 발음한다고. 이건 What did you do today? 그냥 인사야. 처음엔 나도 무슨 말인가 깜짝 놀랐다니까.”
-유우카로 요시오에게
"너의 쇄골에 카즈에가 잠들고 있습니다"
-애도가치의 동등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남겨진 자의 상실과 슬픔에 고통받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