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미수연
지난달에 가까운 친척들을 모시고 아버지의 88세 미수연을 했다. 다들 나이가 들어 왕래가 어렵다 보니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뵌 후 2년 만에 만나는 분이 대부분이었다. 홀로 된 아버지를 걱정하고 계실 듯해서 겸사겸사 식사 대접을 했다. 축하 인사 후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말씀하실 때는 청산유수다. “예전에 어른들이 나이 80이 되면 무덤 속에 누운 이나 살아있는 이나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도 내년이면 90이니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니, 행복합니다.” 아버지가 데이케어센터에 갈 때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때때로 아버지의 심경을 적어 놓은 메모가 들어있다.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사는 낙이 없다. 빨리 죽고 싶다.” 밥도 잘 드시고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도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이 아버지의 평소 정조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증상에는 우울감도 포함된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로부터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었다.
친척들은 다들 아버지가 외롭지는 않은지,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궁금해했다. “큰아들이 옆에 살아서 아들과 며느리가 매일 아침에 오고 저녁에도 와서 챙긴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는 나는 어이가 없다. 자식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아버지 집에서 지내온 것이 벌써 햇수로 4년째! 큰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우는 것은 그래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허세일까, 아니면 자식들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그렇다고 믿는 것일까. 친척들 앞에서 연설을 할 때는 정신이 아주 맑은 사람 같았다가도 또 다른 말씀을 할 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 못하는 치매 노인 같으니 참, 아버지의 머릿속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해도 지난 4년 동안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가 요즘처럼 평온했던 적은 없었다. 4년 전 부모님 돌봄이 시작될 때의 폭풍우 휘몰아치던 나날들에 비하면 지금 아버지가 보이는 치매 증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웃어넘기면 된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나이 든 부모를 돌보는 일은 내일을 모른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평온한 하루하루가 더 아깝고 소중하다.
생신날 미수연을 한 뒤? 아버지가 쓴 메모
치매 진단,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부모 돌봄이 시작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84세였던 해 초겨울이었다. 어머니에게 갑자기 우울증 증세와 자해 충동이 나타났다. 위험 신호였다. 부모님 두 분만 있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자식들이 매일 가서 챙기는 돌봄이 시작되었다. 내가 가서 같이 자던 날 새벽 어머니가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무도 몰래 집을 나가는 일이 생겼다.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입원 치료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입원하고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아버지의 멘탈이 급격히 무너졌다. 어머니가 아프기 얼마 전 아버지는 초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장기요양등급 신청 결과 일상생활에 거의 문제없는 인지지원등급(6등급) 판정이 내려졌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아버지는 기억력이 좀 저하되었을 뿐 건강하고 말 잘하고 점잖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원과 동시에 곧바로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는 단 하루도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좀 이상하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돈 계산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그것이 걱정되었는지 통장관리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또 어머니가 외출해서 귀가가 늦어지면 화를 낸다고 했다. 동네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데도 하도 자주 전화를 거는 바람에 아예 전화기를 꺼놓기도 한다고 했다. 어느 날은 머리 손질하는 시간을 참지 못하고 미장원까지 달려와 여러 사람 앞에서 화를 내서 남사스러웠다고도 했다. 그러니 어머니는 온종일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 말을 들은 후 두 분이 다니는 신경과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아버지의 뇌 사진을 보여주면서 뇌가 쪼그라들고 있다고, 알츠하이머 초기라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치매 진단을 확인하니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이제 약을 먹고 정기검진을 받으며 추이를 지켜보아야 했다. 그렇지만 정신이 맑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약과 일상을 챙기고 있는 동안에는 사실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부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고, 어머니도 명랑하고 쾌활했기 때문이었다.
괴물로 변한 아버지
초기치매라고 해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어 보면 사태를 파악하는 판단력은 또렷했다. 그러나 그 판단력이 어머니와 관계된 일에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어머니가 입원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너희 엄마 어디 갔냐”며 아내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떼쓰는 아이처럼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몇 시간이고 지칠 때까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화를 내다 지치면 쓰러져 자고, 깨면 다시 시작이었다. 술을 드시다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해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집어던질 듯이 식탁 의자를 들고 바닥을 치기도 했다. 베란다 창으로 뛰어내리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며느리 앞에서도 초등생인 손주 앞에서도 아버지는 폭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는 길에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번에는 또 어떤 꼴을 보게 될까, 지레 겁부터 났다. 어머니가 입원하게 된 경위를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달래고, 애원하고, 울고 불며 매달려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 귀에는 어떤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급기야 어머니의 입원을 부정하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바람나서 집을 나갔다는 망상에 빠졌다. 아버지에게 그건 상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비난하고 욕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성적 상상들이 여과 없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분노에 찬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할 말 못할 말을 쏟아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혹시 평소에 어머니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까, 어머니의 우울증 발병의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자 아버지가 한없이 미웠다. 다른 한편 어머니에 대한 의존과 집착 때문에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무너져 가는 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문제였지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아버지와 말씨름, 몸씨름을 하다 동생 중 누군가와 교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봇물 터지듯 눈물이 쏟아지고 통곡이 터져 나왔다. 혼자서 꺽꺽 소리내며 운 것이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돌보러 가는 일을 멈출 수도 없었다.
코로나로 대면접촉이 최소화된 상황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직접 간병인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누구도 폐쇄병동에 입원한 어머니를 만나러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전화도 금지되었다. 만일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입원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면 아버지는 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다.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건 자식들이 두 사람을 떼어놓고 있다는 아버지의 억측과 독설이었다. 아버지의 비난은 가슴을 후벼파는 듯했고 우리를 향한 폭력적 언사는 두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어머니를 병원에서 모셔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둘째와 아버지
우리도 살고 아버지도 사는 방법을 찾아서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고, 우리 형제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왜 우리 같은 돌봄 초보자들을 돕는 곳은 없는 걸까? 지인들 중에서 부모 돌봄의 경험이 많은 선생님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내에게 의존성이 높은 남성 치매 노인이 주로 그렇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집에 불을 지르는 어르신도 있다고 했다. 부모님이 아픈 것이 장기화되면 돌봄 제공자들, 특히 며느리와 딸들이 속이 곪아 피폐해지고, 비용 분담과 관련된 문제로 자식들끼리 의가 상하는 일도 흔하다고 했다.
장기적인 관점도 좋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격리 차원에서 요양병원에 모시는 방법과 함께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힐 수 있는 적절한 약물을 찾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솔깃했다. 약물을 찾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외래 진료를 계속하면서 딱 맞는 약을 찾는 것. 다른 하나는 입원해서 맞는 약을 찾는 것. 평소 내가 의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느냐와 상관없이 막상 이런 일을 겪게 되자 아버지의 분노를 조절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아버지를 정신과에 모시고 다니며 외래진료를 받고 있었다. 보통 정신과 약은 2주 정도 지켜보면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이 다 되어가고 복용량을 늘렸는데도 우리가 기대하는 효과는 없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선택지로 정신과 입원을 고려하면서 의사를 만났다. 아버지의 상태를 듣더니 의사는 대번에 입원 치료가 좋겠다고 했다. 자식들이 동의서를 쓰면 정신과 강제 입원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강제 입원을 시키면 아버지에게 트라우마가 남지는 않을까, 자식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후 관계가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의사는 치매가 진행되는 노인들의 경우 정서 상태가 안정되면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뭐가 맞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매일이 아버지와의 전쟁인 나날들에서 벗어나려면 방법이 없었다. 우리도 살아야 했고 아버지도 살려야 했다.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었다. 기댈 곳이라고는 의료시스템 뿐이었다. 입원 결정을 두고 매일 저녁 동생들과 줌회의를 했다. 우리는 망설임과 주저, 여러 번의 번복 끝에 아버지의 입원치료를 결정했다. 그러려면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나는 그 일을 남동생들에게 부탁했다. 이 일만은 피하게 해 달라는 누나들 대신 남동생들이 아버지의 입원 수속을 밟았다. 아버지는 아들들과 함께 가서 강제입원을 당했다. 아버지는 아내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과 불안감으로 인지적 정서적 기전이 망가져 버린 치매 노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강제 입원을 공모하고 실행한 우리 형제는 서로를 위로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라는 감옥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응급 돌봄에서 일상의 돌봄으로
다행히 아버지는 3주 정도 병원 생활을 한 후 입원 전보다 한결 순해진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퇴원한 아버지의 상태를 계속 지켜보며 의사와 소통하려면 밀착 케어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우리 네 형제는 번갈아 일주일씩 아버지 집에 머무는 24시간 돌봄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매달 한 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주일이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의 발병부터 지금까지 두 달여의 돌봄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닥친 상황에 긴급 대응하는 응급 돌봄이었다면 이제부터 돌봄은 일상의 루틴이 되어야 했다. 큰 딸인 나는 어머니의 입원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병원과 소통하는 주보호자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긴 어머니의 보호자로 그리고 아버지의 일주일을 돌보는 사람으로,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돌봄의 시간이 왔다.
그렇게나 가혹했던 코로나 상황은 이제 우리 형제들이 24시간 아버지와 일상을 함께 하는 데는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 돌봄을 위해 일상을 재구성해야 했는데, 직장에 매인 동생들도 코로나 덕분에 한동안 재택근무가 가능했고, 나 역시 줌으로 회의와 세미나 등에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주일에,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휴화산 같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약물로 관리되는 아버지의 치매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