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달에 한 번 책이 잔뜩 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전철을 세 번 갈아타고 아버지 집이 있는 일산으로 간다. 그 일주일 동안 아버지와 관련된 일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밥과 약을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약이 떨어지면 약을 타오고, 같이 TV를 보고, 대화를 나누고, 간식을 챙기고, 장을 보고, 빨래를 돌린다. 어쩌다 함께 집 밖에 나갈 때면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도 이제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어느새 돌봄 4년차. 함께 한 시간만큼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도 깊어지고 있다.
n분의 1 돌봄
2020년 겨울, 갑자기 닥친 부모님의 위기는 우리 형제의 위기가 되었다. 어머니의 입원이 아버지의 멘탈붕괴로 이어지는 몇 달 사이에 나는 동생들과 평생 나눈 대화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수시로 줌 회의를 열어 상황을 공유하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서로를 위로했다. 순식간에 금치산자와 같은 상태가 된 부모를 돌보는 일에는 종결이라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를 강제 입원시키자 어머니 간병을 하러 들어갔고, 퇴원과 동시에 어머니는 낙상사고를 당했다. 수술을 하고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사이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왔고, 크고 작은 문제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부모 돌봄의 생애주기에 접어 들었다는 것을. 막 시작된 돌봄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었다. 지속가능한 돌봄의 방식, 돌봄과 일상의 균형을 잡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동생 둘은 직장인이었고, 여동생은 농업으로 밥벌이를 하는 농사꾼이었으며, 나도 공동체에서의 공부와 일이 있었다. 가능한 돌봄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은 올케들까지 포함해서 누구 하나 자신의 삶과 일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각자의 일상을 지키면서도 안정적인 돌봄 시스템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용이 들더라도 가족이 아닌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3주간의 강제 입원 후 퇴원한 아버지는 분노와 공격성이 어느 정도 조절되었지만 여전히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였다. 밀착케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농한기를 맞은 동생네 집에서 잠시 생활을 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혼자 둘 수 없었던 우리는 돌아가며 일주일씩 아버지를 돌보기로 했다. n분의 1 돌봄의 시작이었다.
대화하자는 아버지, 피하고 싶은 딸
아버지는 우울하고 불안했으며,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강제입원 전처럼 통제불능 상태로 가지는 않았다. 신경계에 바로 작용하는 정신과 약의 신비로운 효과 때문인지, 또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버지의 무의식에서 자발적인 억압 기제로 작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강제 입원의 기억을 떠올리며 당신 자신과 우리를 괴롭힐까 봐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버지의 불쾌했던 입원의 기억은 오래지 않아 희미해졌다.
어머니가 2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의 멘탈은 늘 위태로웠다. 치매 이전이나 치매 이후에나 아버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지만 곧잘 망상 상태에 빠지곤 했다. 아버지의 망상은 억지가 아니라 나름 완결된 체계를 가진 논리적 망상이었다. 머릿속에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생각과 부정적 감정이 와글와글 일어나면 아버지는 내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혜영아, 이야기 좀 하자.” 아버지가 대화 좀 하자고 하면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아버지는 무작정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가 퇴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퇴원을 안 시키고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늘 “왜 엄마가 아직 퇴원을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로 시작되었다. 요양병원과 병원을 오가는 어머니의 불안한 상태는 아버지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 않았다. ‘이야기 좀 하자’로 시작하는 대화는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 같이 걱정하고 서로 위로하며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욕구불만과 좌절을 투사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 결론은 “너희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너희들 편하려고 엄마를 병원에 가둬놓고 죽기만 기다리는 것 아니냐?”로 끝났다.
돌봄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치매 노인이 퍼붓는 비난과 모욕에 그저 무덤덤할 수만은 없었다. 어떨 때는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최대한 아버지의 말에 공감을 표해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말도 안 되는 말씀 하지 말라고 조목조목 따지며 대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스스로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 바람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논리와 감정의 회로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분을 참지 못한 아버지가 화를 폭발시키고 나면 그 뒤 며칠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치매는 바보가 되는 것도 어린아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여러 성격 중에 어떤 성향과 욕망이 극단화 되어 나타났다. 머리로는 아버지의 상태를 이해했지만 감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 돌봄은 끝없이 감정 소모를 요구하는 시지프스의 노동과도 같았다. 동생들과 몫을 나누는 n분의 1 돌봄이 아니었다면 참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n분의 1 돌봄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아버지로부터 거리를 두는 시간과 공간이 확보된다는 점이었다. 돌봄을 쉬는 동안 아버지가 내게 퍼부은 비난과 모욕을 용서하고, 이 상황의 불가피성을 납득하고,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동생에게 연민을 보내면서 내 마음을 살폈다. 그러고 나면 3주 후 다시 아버지에게 갈 힘과 용기가 생겼다.
아버지의 피난처, 베란다 정원
우리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숨 쉴 틈이 필요했다. 아버지에게는 베란다 정원이 바로 그런 장소였다. 아버지는 평생 화초를 길렀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취미였다고 하니 아버지의 화초 사랑은 유별났다. 젊었을 때부터 아버지의 일상은 식물집사 그 자체였다. 은퇴 후에 마당 있는 집에서 아파트로 집을 옮긴 후에도 아버지는 집안에 넘쳐나는 화분으로도 모자라 아파트 화단을 가꾸는데 온정성을 다 쏟았다. 아버지는 이십여년 전 자식들이 사는 수도권으로 이사를 올 때 그 많던 선인장 화분을 이웃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빈손으로 올라왔다. 마치 영원히 식물집사를 그만둘 사람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베란다는 다시 화분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화려한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었다.
어머니가 있을 때도 그랬겠지만 어머니가 없는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온 마음을 다해 화분을 돌보았다. 베란다는 아버지의 공방이고 작업실이고 정원이었다. 좌우 양쪽 창고에 식물을 돌보는데 필요한 온갖 작업도구와 약품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고, 화분 분갈이를 할 때 필요한 자갈과 모래 등의 재료들도 구비되어 있다. 아버지의 기억은 자주 깜빡깜빡했지만 애정하는 식물들을 돌보는 루틴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베란다에서 몇 시간이고 화초 돌봄 삼매에 빠진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가 화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화초들이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것 같아 보일 정도다.
아버지의 화분에는 고유번호가 적혀있다. 아버지는 식물에 물을 주고 나면 마치 난수표처럼 숫자가 적혀 있는 달력 앞으로 가서 그날 날짜 칸에 미리 적어 놓은 화분 번호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리고 다음 물 줄 날짜를 찾아 화분 번호를 적는다. 화분 달력 옆에는 화분 번호와 식물 이름 그리고 며칠마다 물을 주어야 하는지 기록해둔 표가 있다. 새로운 화초를 사올 때마다 이 표는 업그레이드된다. 아버지는 기억이 아니라 기록을 중심으로 화분을 관리한다. 젊은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그러나 기록보다 더 중요한 건 몸과 마음에 새겨진 경험과 노하우다. 화초상태를 보기만 해도 물을 줄 때인지 분갈이를 해야 할 때인지 거름을 줄 때인지를 아는 직관은 기억이나 기록보다 강했다. 아버지가 손을 대기만 하면 화초들이 반짝반짝 살아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초기 치매 진단을 받은 직후 어머니는 이제 화분 관리도 힘들거라고 걱정을 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물주는 날짜를 챙기고, 베란다의 작업도구들을 정리하고, 정기적으로 분갈이를 하고 거름을 주는 일이 때로 아버지에게 힘에 부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평생의 취미이자 낙이었던 식물 가꾸기는 아버지의 인지능력을 붙들어 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달래주는 묘약이다. 하루 종일 켜놓는 TV 앞에서 멀어지게 하고, 어머니의 부재를 잊고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아버지에게 얼마나 축복인지! (물론 우리에게도!)
낯선 아버지의 몸
아버지와 외출하면 화장실이 늘 문제다. 오줌이 마려우면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급하면 어디서든 차를 멈추어야 한다.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 중에도 몇 번이고 중단하고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 참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속옷이나 바지에 소변을 묻히는 실수를 자주 한다. 그런데 소변을 옷에 묻히고서도 그걸 모르니 냄새가 나는 옷을 계속 입는다. 냄새가 나지 않게 하려면 자주 옷을 갈아입고 씻게 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샤워를 하거나 속옷을 갈아입으라고 하면 바로 어제 갈아입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말을 안 들어서 속이 터지지만 사실 아버지는 우기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그게 진실이다.
그래서 아버지 모르게 수시로 아버지 옷장을 검사해서 냄새나는 옷을 골라내 빨래하는 수밖에 없다. 옷을 입고 벗으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두기 때문에 입은 옷과 입지 않은 옷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아버지 바지에 코를 대고 냄새나는 옷을 골라내고 있다는 걸 아버지는 결코 모를 것이다. 만일 안다고 하면 몇 번 입지도 않은 옷을 빠는 괜한 수고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간혹 아버지가 대변 실수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속옷을 애벌빨래한 다음 세탁기에 툭 던져 넣곤 한다. 당신이 실수한 걸 우리가 눈치채길 바라지 않는게 분명해서 아는 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변 실수를 해서 냄새가 난다고 차마 말씀드리지 못한다.
한 번은 아버지가 옴에 걸렸다. 동생들로부터 아버지가 가려움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내가 가서 보니 온몸을 밤낮으로 긁어서 울긋불긋한 게 심상치 않았다. 동네 피부과에 모시고 가서 사타구니 확인을 해달라고 했더니 아무래도 옴인 것 같다고 했다. 옴 검사를 받고 옴 연고를 받아왔다. 항문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까지 포함해서 꼼꼼하게 옴 연고를 바르고 하룻밤을 잔 뒤 씻어내기를 몇 번 반복해야 했다.
아버지는 평소에 옷을 갈아입을 때도 방문을 닫는다.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약을 발라 드리겠다고 하니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는 표정이다. 나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대충 바르면 효과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가슴과 배, 등, 팔과 다리에는 약을 발라 드렸지만 그래도 차마 아버지의 사타구니에 약을 바를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팬티를 내리라고 하고 엉덩이와 항문에는 내가 직접 약을 발랐다. 부모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아도 되는 돌봄은 없다. 어머니를 간병하며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도와드릴 때도 기저귀를 갈 때도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색깔의 감정이 일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약을 바를 때는 제법 덤덤했다. 딸에게 처음으로 엉덩이를 보인 아버지도 그랬을까? 아버지가 곧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아야 하는 착잡함은 온전히 나의 몫일 수밖에.
4인4색 돌봄
아버지는 짠돌이다. 손주들에게도 용돈을 주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돈쓰는 것에 벌벌 떠는 아버지도 맛있는 걸 먹을 때는 호쾌하게 지갑을 연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건강하던 시절 부모님 집을 방문하면 아버지는 항상 새로 찾은 맛집에 데리고 가서 밥을 샀다. 평소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썼다. 겨울에는 곰국을 끓이고 대구알젓을 담고, 봄이 되면 가죽순 장아찌를 담고, 방아잎이 나올 때면 장어국을 끓이고 한여름에는 콩을 삶아 콩국을 만들었다.
우리 넷 중에 아버지 밥을 가장 잘 챙기는 건 둘째딸이다. 늘 냉장고에 김치가 있는 것도 둘째가 김치를 담그기 때문이다. 나는 둘째 다음에 당번을 할 때가 제일 편하고 좋다. 맛있는 반찬이 냉장고에 그득하기 때문이다. 반면 막내 다음에 갈 때는 일단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 청소부터 한다. 막내는 요리를 하지 않고 식당이나 반찬가게에서 사다 먹는 경우가 많아서 냉장고 안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 야채와 오래된 반찬통을 정리해야 한다. 물론 그런 다음엔 어깨가 빠지도록 장을 봐와서 먹을 걸 만드니 좀 힘이 든다. 아마 나 다음에 당번하는 누군가도 야채반찬 밖에 없는 냉장고를 보고 장을 보러 갈지도 모른다.
밥상에 올라오는 국과 반찬만 다른 것이 아니다. 형제들의 성격에 따라 아버지와 관계 맺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둘째는 아버지에게 싹싹하고 다정하다. 셋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의 오래된 옛 기억을 불러내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채집하는 데 진심이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고 답사도 좋아했던 아버지인지라 동생이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면 매우 기분이 좋을 성 싶다. 반면 나는 무뚝뚝하고 조용해서 아버지를 혼자 두는 때가 많다. 내가 있을 때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혹시 내가 말을 안 걸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우리 형제는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서로 독립적인 생활을 해 왔다. 아버지집에서 일주일 먹고 자는 돌봄 릴레이 덕분에 동생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전 일은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지만 막상 어제 일은 금방 희미해지는 아버지에게 우리 형제와 아버지가 따로 또 같이 만들어 가는 이 시간들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을까. 설령 아버지가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잊는다 해도 우리의 4인4색 돌봄이 아버지의 삶에 행복한 기분을 남길 거라고 믿고 싶다.
아버지의 평화
자식들의 성격 따라 4인4색의 돌봄을 받는 아버지를 보면 참 복 받은 노인이다 싶다가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코끝이 시려오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머니는 입원 후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2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했다. 낙상으로 고관절 수술을 했지만 다시 일어서서 걷지 못했고, 장루 수술후에는 대변 주머니를 떼지 못했다. 정신이 맑지 못한 가운데 긴 와상 생활을 하다가 생긴 욕창의 고통도 극심했다. 우리는 병원에 있는 것이 어머니의 몸에도 마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어머니를 집에서 돌보기로 마음을 모았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데이케어센터(이하 센터)를 권했다. 그래야 어머니를 돌볼 간병인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온다는 기쁨에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아침에 센터에 나가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종종 아버지는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내가 아프면 당신이 나를 돌봐야 하는데 왜 누워만 있냐. 빨리 일어나라”고 했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는 어머니를 돌볼 생각을 하지 않고 돌봄 받을 생각만 하는 아버지가 밉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머니를 먹이고 씻기며 돌본 시간은 너무 짧았다. 어머니는 집에 온 지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아버지는 마침내 어머니에 대한 오랜 집착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곁에 두고 싶어했던 아내가 죽자 찾아온 평화라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아버지 돌봄은 계속되어야 했다. 마침 코로나가 풀려가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생들도 재택을 접고 출근을 했고 늦게 퇴근하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센터에 나가게 된 뒤로 아버지의 점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직장 다니는 동생들은 돌봄의 부담이 좀 가벼워졌다. 나도 낮시간에 여유가 생겨 마음이 편해졌다. 여기에 더하여 아버지가 다니는 센터에서 재가통합서비스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재가통합서비스는 아버지가 센터에 결석하고 혼자 집에 있을 때 몇 시간 요양보호사를 파견하는 서비스다. 이렇게 가족 돌봄의 빈틈을 재가통합서비스가 채워주니 아버지가 혼자 있는 시간이 줄어 안심이 된다. 가족 외에 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생기니 아버지의 컨디션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역시 구순 노인에게도 가족을 넘어서는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아버지를 돌본지 4년째,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버지와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얼마 전 일산에 있던 토요일에 일 때문에 나갔다 와야 해서 아버지 혼자 점심과 저녁을 드시게 했다. 내가 집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큰 소리로 화를 터뜨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비난하는 건 내가 아니고 가까이 사는 동생(아들)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있는데 들여다 보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아들이 당신을 챙겨야 마땅하다는 무의식의 발로였다.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아들에게 집착하게 되는 건 아닌지 순간 머리털이 쭈뼛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버지를 달랬다. ‘내가 나갈 때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한다고 해서 동생한테 연락을 안 했다. 동생은 잘못이 없고, 내 잘못이다. 잘못했으니 화를 푸시라’고 몸을 최대한 낮추어 빌자 아버지는 토를 달지 않고 금방 마음이 풀렸다. 아버지에게 평화가 왔다는 기쁨의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생긴 일이다. 노인의 몸과 마음은 수시로 달라지기 때문에 돌봄의 상황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내게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주일은 돌봄에 대해 묻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