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나중에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이것을 젊은 간병 연구자 이구치 다카시 씨는 ‘가족 간병의 무한정성(無限定性)’이라고 불렀다. 간병이란 몸은 떨어져 있어도 가족에게는 일할 때에도 쉴 때도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짐 같은 것이다.” (우에노 지즈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어른의 시간, 146쪽)
간병살인, 영케어러, 노노(老老)간병, 최근의 간병비 지원에 관한 관련법 개정안 발의까지,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짐 ‘간병’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끊이지 않는다. 비용부담은 차치하고 24시간 화내지 않고 환자를 돌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간병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Wave 오리지널 SF8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간호중은 24시간 돌봄이 가능한 ‘간병로봇’에 대한 이야기다
도심의 한 요양병원,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는 연정인의 어머니를 간병로봇 (간호중)이 7년째 돌보고 있다. 어머니의 긴 투병생활을 함께 한 연정인은 이미 많이 지쳐있는데다 우울감도 커져가고 있다. 연정인은 간호중의 돌봄 대상에 어머니 뿐 아니라 자신도 포함시켰다. 그래서 간호중은 어머니의 몸을 돌보는 한편 연정인의 마음도 함께 돌보고 있다.
연정인의 어머니가 조용한 병실에서 간호중의 변함없는 돌봄을 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옆방은 소란스럽다. 마음대로 조작하기도 어려운 간병로봇과 함께 매일 병실안에 난장판을 만드는 치매 남편을 돌보는 최정길의 일상은 힘겹기만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단한 삶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최정길은 약을 먹고 숨을 거둔다.
최정길의 자살 소식은 연정인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고 간호중에게 엄마를 맡긴 채 떠난다. 연정인과 연락이 끊어지자 간호중은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지각한다. 사비나 수녀가 남기고 간 스티커를 보고 <생명을 살리는 전화>에 상담전화를 건 간병로봇 간호중은 이렇게 질문한다. “생명 하나를 죽여야 생명 하나가 산다면 어떻게 하죠?”
인간의 질병과 간병인의 고통을, 감정 빼고 지켜본 간병로봇이 인간의 생명과 돌봄에 대한 윤리를 다시 묻는다.
1. 누구의 생명이 중요한가
연정인의 간병로봇 간호중은 <생명을 살리는 전화> 사비나수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상담한다.
“제 판단으로는 보호자 연정인이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는 고통을 느낄 수 없으니까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누가 잴 수 있지요? 내일이라도 환자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어요”
“이미 하느님께서 뜻하신 생명은 끝이 났는데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거라면요?”
“그래요, 그런 상황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로봇이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서 어떻게 제게 ‘하지 말라’라고 하시는 겁니까?”
간호중은 10년째 의식 없이 누워있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연정인의 마음을 옥죄어 오는 것을 알아채고 연정인을 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질문한다. 생명은 누구에게 달린 것인가, 누구의 생명이 더 가치 있는 것인가. 그 가치는 어떻게 따질 수 있는가.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인가.
2. 간병로봇이 만들어 내는 돌봄의 계급
연정인의 간병로봇 간호중 TRS(Trusting a Robot Study)70912B은 최고급 사양으로 돌보는 사람의 신체 뿐 아니라 심리적 상태도 체크할 수 있다. 간호중이 어머니의 바이탈체크 결과를 투명 전자 패널에 입력하면 의료진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의료진은 병실에 거의 출입하지 않으며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연정인의 불면증을 위해 불면에 좋은 플레이리스트를 보낼 수 있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택시를 불러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고급 버전의 이야기다. 로봇간병의 장점으로 24시간 돌봄과 학대하지 않는다는 점이 홍보되고 있는데, 최정길의 돌봄은 ‘고급 간병로봇을 쓰지 않으면 일어나는 일’의 예시처럼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최정길은 독박돌봄의 화신이다. 하나 뿐인 아들은 트렌드젠더가 되어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다. 최정길은 남편을 위해 집을 팔고 대출도 받아 간병로봇을 고용했다. 사람보다 싸다고 해서였다. 그러나 간병로봇이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보급형 로봇에게는 남편을 돌보는 일 외의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최정길에게 하는 폭력적 언행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는다. 남편을 죽이고 이 삶을 함께 끝내버리고 싶었던 계획도 간병로봇의 저지로 실패한다. 간병로봇의 프로그램은 오로지 남편의 위험에 대해서만 반응한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최정길은 약을 먹고 환각을 경험하다가 죽고 만다. 그가 고통스러워하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보급형 돌봄로봇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의 돌봄 대상(최정길의 남편)이 자고 있으니 시끄럽게 굴지말라는 말만 남긴다. 빈부의 차이는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더 큰 돌봄의 격차를 만들어낸다.
3. 돌봄로봇에게도 감정이 생길 수 있을까
영화를 보자마자 신기했던 것은 극중 보호자와 간병로봇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병로봇에 보호자의 얼굴을 세팅할 수 있는 기능 때문이다. 돌봄을 받는 입장에서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감정이 없는 대상을 만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상상해본다. 최소한 용변처리를 할 때만은 매우 편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외에는?
2046년의 간병로봇 간호중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2019년) 레이첼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기억까지 프로그래밍된 레이첼이 사이보그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했듯, 인간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던 간호중은 어느새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간병로봇의 범주를 벗어나 이상 행동을 한다. 연정인의 마음은 간호중에게 흘러들어갔고, 간호중의 마음은 사비나수녀에게 전해졌다. 감정의 상호작용은 로봇에게도 마음이 생기게 한다. 쳇GPT의 시대니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최첨단 로봇 간호중보다는 그냥 튼튼한 외골격로봇을 선택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저를 때리지 마세요. 환자를 돌보는 기능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간병로봇을 때렸을 때 로봇이 하는 말)
“인간이 당신을 창조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환자를 죽이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인간도 저를 사랑으로 만들었나요?”
-SF를 좋아하는 사람
-돌봄로봇에 대해 궁금한 사람
-나 자신의 돌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