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팻병원에서 공공의료를 생각하다
반팻병원은 태국의 치앙마이주 치앙마이 교외에 있는 공공병원이다. 전통적인 벼농사를 짓는 지역이지만 도심에서도 20키로 정도 떨어져 있어 도시와 시골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2002년 전국적으로 시행된 보편적 건강보험으로 공공 의료시스템을 갖춘 병원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며, 미얀마에서 이주한 등록 이주민과 미등록 이주민, 태국 국적이 없는 다수의 소수종족민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2009년 인류학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태국의 의료개혁과 그 여파에 대한 연구를 위해 반팻 병원에서 현장 연구를 진행했다. 그때 병원에서 만난 직원들이 일상에서 환자의 보험 상태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보았다. 보험 없이 장기간 입원한 환자에 대해 물었을 때 병동의 주임 간호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들이 다 나아서 집에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계속 돌보는 수밖에 없죠.”(책, 75쪽)라고 대답했다. 병원 직원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업무 기조를 표방했다. 이러한 자세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공적 서비스의 일환”(책, 76쪽)으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병원 운영은 재정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현장 연구 당시(2010) 병원장은 “여기서는 우리가 정부이고, 그건 곧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책, 78쪽) 라고 대답했다. 의료의 최우선 과제는 위험에 처한 목숨을 구하고 지역사회를 돌보는 것이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으로 치앙마이에서 발생하는 신생아 환자들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2006년 반팻 병원에 신생아 집중치료실을 열기도 했다. 재정 적자를 이유로 지방의 공공의료원을 거리낌 없이 폐쇄(2013년 진주의료원)하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시골 우체국이나 파출소를 운영하면서 적자를 운운하지 않는 것처럼, 생명을 다루는 병원도 수익성을 따지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의료 처치를 제공해야 한다. 반팻 병원의 사례는 공공의료를 통해 국가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돌봄의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게 했다.
자기만의 되갚음을 통한 삶의 존엄
반팻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 오래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환자들은 당장 요구를 들어달라고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자신들이 공공병원에서 받을 수 있는 돌봄과 치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을 받아들였다. 저자는 이들과 함께 기다리면서 이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한 형편이라 치료비를 완납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 병원은 반환 약정을 위한 서류를 작성하라고 요구했다. 약정서를 쓰더라도 언제 갚을지는 병원 측에서도 환자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런 절차를 거치면 퇴원이 가능했다. 국가가 제공하는 보험제도를 통해 개인이 받게 되는 이러한 조치는 공적 선물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주고받음에 의무에 있어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 줄 수 없을 때 이 선물이 마냥 좋을 수 없다. 공공병원에서 장시간의 기다림은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원치 않더라도 주어진 조건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공 병원에서 치료 받을 때, 이렇게 받을 자격과 빚짐 사이에 생기는 불편함에 대해 미얀마 샨 지역에서 이주해 온 피이의 사례를 보자. 피이는 의료보험이 없는 임시 체류자 신분으로 세 살짜리 아들이 아파서 이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병원으로 와서 아내와 함께 아들을 보살폈다. 공사장에서 번 돈으로 치료비를 다 갚을 수 없었지만, 그는 힘이 닿는 한 그 빚을 갚아나가고 있었다. 예전에도 병원에 빚을 진 적이 있기 때문에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지만 피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자는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피이의 행동이 빚을 되갚지 못하는 불편함을 해결하려는 노력임과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살려낸 돌봄의 의무망에 그 역시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말겠다는 업에 대한 윤리적 감각”(책, 121쪽)도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등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상호성에 접근하려는 피이의 노력으로 삶의 존엄함이 보존되고 있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돌봄이라는 선물의 제공이 반드시 주는 자의 지배력을 강화하거나 혹은 받는 자의 권리와 권한을 강화하는 식의 양상으로 단순하게 양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받아야 하는 수동적 상태라고 하더라도 기다림 속에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필요를 끈질기게 알림으로써 버티어나갔다. 이들이 보여주는 돌봄을 이끌어내는 힘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서 국가의 지원과 사회적 지원이 구체화되는 중심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123쪽)
서로 이끌고 이끌리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돌봄
태국에서 보편적 건강보험(2021년 기준 태국 전체 병상의 80%가 공공병원에 속함)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왕실 중심의 후견주의적 권력과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새 정치 세력이 의료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면서 공공의료가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저자는 의료인류학자로 반팻 병원을 통해 이렇게 확산된 태국 공공 의료체계에서 ‘돌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병원의 운영 방식과 병원을 찾은 환자와 가족들 사이에서 서로 이끌고 이끌리는 과정 자체를 돌봄이라고 재정의했다.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돌봄을 주변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쓴다. 그렇게 자신의 필요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돌봄이 일어났다. 이 책에 등장하는 병원, 간호사, 의사,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 등은 모두 그렇게 연결되어 돌봄의 책임을 나눠지고 있었다. 저자는 현장 연구를 통해 돌봄을 특정한 직업집단이나 기관에 할당된 사회적 기능으로 보는 대신,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은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조건을 만나면 구체적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팻병원과 연결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다. 하지만 그 조건이 아프고 위험에 처한 자신을 방치하지 않도록 돌볼 수 있는 영역으로 공공 의료 체계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주민의 불안정한 조건에서도 신생아 집중 치료실을 통해 안전하게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 이주민 산모는 정기검진을 한 번도 빼먹지 않으면서 장차 태어날 아기의 안전을 도모했다. 정기검진의 기록은 아이가 시민적 권리를 인정 받는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돌봄을 이끌어내는 이들의 실천으로 취약함 속에서도 상호 의존하면서 삶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공공 의료체계 속에서 서로 이끌고 이끌리는 돌봄을 통해 삶을 지속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돌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더 다양하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