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손주를 함께 돌보다
엄마가 집으로 오시고 몇 달 후에 아들 며느리가 집으로 들어왔다. 젊었을 때 아이 키우며 직장생활을 했던 나는 워킹맘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아는 터라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아들부부에게 아이 키우는 걸 도와주겠다고 자청했고, 3년은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그 다음해에 손주가 태어났고, 우리 집은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되었다. 1층에는 엄마가 계시고, 2층 한편에는 아들네 세 식구가, 다른 한편에는 우리 부부가 살았다. 설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 생각으로 지은 집이라 공간은 그런대로 살만했다. 문제는 모든 식구들을 다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거의 대부분 내 몫이라는 것이다. 나는 엄마와 이제 막 태어난 손주, 그리고 수유하는 며느리를 돌보면서 남편과 아들도 챙겨야 하는 돌봄 대장이 되었다.
손주가 태어나고 며느리가 아직 육아휴직 중일 때만 해도 엄마가 아직은 혼자서 움직일 수 있었다. 엄마 말벗은 주로 남편이 했고 나는 엄마 식사와 이런 저런 일들을 해결하는 집사역할을 담당했다. 그때는 엄마보다는 손주와 며느리를 돌보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 나는 하루걸러 하루씩 손주를 데리고 잤다. 나도 애들 키울 때 밤에 잠을 못자는 것이 가장 힘들었는데, 며느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밤에 여러 번 깼고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나날이 커가는 손주를 보는 기쁨으로 마음은 평화로웠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손주가 코로나에 걸렸다. 아들, 며느리, 남편 모두가 순서대로 코로나에 걸렸고 다행히 엄마와 나는 괜찮았다. 엄마는 잠시 엄마네 집으로 가 계시고(친척에게 부탁) 나는 손주를 데리고 병원에 입원했다. 음압병실에 갇혀 지내면서 결국 나도 코로나에 걸렸지만 내가 나오면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 이틀 밤을 타이레놀로 버텨냈다. 손주는 큰 부작용 없이 퇴원했고 코로나에 걸려 격리됐던 식구들도 복귀했다. 나는 코로나에 걸렸음에도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했고 쉴 수도 없었다.
1년 쯤 지나서 며느리가 복직을 하고 손주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 늘었다. 손주 이유식을 챙겨 먹이고 어린이집에서 먹을 간식과 점심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 부부가 출근하고 나면 엄마와 남편이 아침을 먹고 대충 정리한 후 손주를 태우고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일로 아침 일과가 끝난다. 손주가 어려서 혼자 아이를 태우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늘 남편과 나 두 사람이 함께 아이를 데려다 주어야 했다. 아침 일과만으로도 몸이 벌써 피곤하지만 곧 점심 준비를 해야 했다.
식구들이 많다보니 돌보는데 나도 모르게 우선순위가 매겨졌다. 남편과 아들은 순위에서 밀려났다.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손주-엄마-며느리? 엄마가 1순위가 아니라니 내가 봐도 좀 이상하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손주가 누구보다 우선이었다. 엄마는 내 엄마고 손주는 아들의 아들인데, 왜 나에게 손주가 우선인 거지?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마음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엄마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어도 손주를 보면 마음이 풀렸다. 손주를 데리고 자면서 잠을 못잘 때는 화가 나지 않아도, 엄마를 돌보느라 엄마 옆에서 자면서 잠을 설칠 때는 짜증이 났다. 몸이 힘들기는 마찬가지 인데 이건 무슨 분별심이란 말인가! 나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루이소체 치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손주가 아무리 예뻐도 엄마가 돌봄 1순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엄마의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고 인지장애도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었다. 엄마 방에 환자용 침대를 들이고 화장실 가는 길에 손잡이를 설치하고 보행기도 마련했다. 엄마는 침대에서 힘들게 일어나서 내려와 보행기를 의지해 화장실 입구까지 가고 거기서부터는 손잡이를 잡고 변기까지 간다. 불안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능하면 혼자 할 수 있게 기다리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자 엄마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화장실을 갈 수 없게 되었다. 부축을 해서 몸을 일으켜 세워도 제대로 앉아있지를 못하고 한 팔로 등을 받치고 다른 팔로 다리를 침대에서 내려야 한다. 엄마 팔 아래에 내 팔을 넣고 부축해 일어나게 한 후 보행기에 의지해 화장실로 가는 그 모든 과정에 내가 손을 놓으면 안 되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나와 보행기를 잡으려는 순간 엄마가 주저앉았다. 내가 한 팔을 붙잡고 있어서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내 허리에 충격이 왔다. 나도 주저앉았다. 엄마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붙잡고 앉아서 잠시 쉬었다가 뒤에서 껴안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내 몸을 벽에 기대야 가능한 일이다. 뒤에서 엄마를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식탁까지 왔다. 휴~~ 엄마도 나도 기진맥진이다. 아, 어떡하나!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이제 정말 엄마를 돌보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두 달을 기다려서 예약한 대학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두 달 동안 엄마 상태는 더 나빠져서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가야했다. 관련 자료들을 모두 챙겨서 제출하고 다시 검사를 하자고 하면 거부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는데, 다행히 다시 MRI를 찍어 보자거나 이런 저런 검사를 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의사가 물었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나요? 아니면 파킨슨증이라고 했나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는데요.” 건강보험은 파킨슨병을 중증난치병으로 분류하고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을 10퍼센트로 낮춰 적용했는데 엄마는 진료비와 약제비용을 10퍼센트만 내고 있었다. 의사는 두 달 전에 이전 병원에서 찍은 뇌MRI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수련의들과 함께 휠체어에 앉은 엄마를 이리저리 살피고 팔과 다리를 들었다 놨다 움직여보기도 했다. “제가 보기에는 루이소체 치매입니다.”
루이소체 치매?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이제까지는 ‘파킨슨병과 이에 따른 치매’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 진단은 ‘루이소체 치매와 이로 인한 파킨슨증’이었다. 루이소체 지매는 알츠하이머 치매와는 다르게 초기에는 기억력 저하가 뚜렷하지 않고 병이 진행되면서 뒤늦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엄마는 파킨슨 증세가 뚜렷했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을 때는 인지장애가 거의 없었다. 루이소체 치매는 인지저하와 함께 환시, 수면장애, 파킨슨증이 핵심적인 증상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엄마는 환시, 수면장애가 진즉부터 나타나고 있었고 최근 들어 인지장애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엄마의 증세를 되짚어보니 루이소체 치매가 맞아떨어지는 면이 많았다.
사실 파킨슨병이든 루이소체 치매든 지금 나타나는 증상은 크게 다르지 않고 치료방법도 별 차이는 없다. 인지와 몸 상태가 동시에 나빠지는데 두 가지 상황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쉽지 않다. 근육 경직을 늦추기 위해 파킨슨증 약을 더 쓰면 인지장애가 심해질 수 있고, 인지장애를 중심으로 약을 쓰면 파킨슨증이 더 심해지는 길항작용. 새로운 의사의 처방도 이전과 크게 다른 방향은 아니었다. 결국 엄마의 증상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는 이야기다. 나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그때 부딪쳐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모-요양보호사에게 매달리다
엄마를 안고 주저앉은 일이 있고 나서 본격적으로 엄마를 돌보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으면서 나는 더 이상 혼자서는 엄마를 보살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요양보호사를 불러야 하는데 요양보호 3등급인 엄마가 받을 수 있는 요양보호서비스 하루 3시간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엄마 상태로는 거의 24시간을 붙어있어야 할 처지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몸이 견뎌낼 재간이 없을 것이었다.
친척 고모에게 사정을 했다. 엄마 상태를 말씀드렸더니 고모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한 달 후쯤 오겠다고 했다. 마침 요양보호사 자격도 갖고 있었다. 복지용구를 신청했던 센터에 연락해서 고모는 그 센터와 계약을 하고 일을 시작했다. 비용은 엄마가 받을 수 있는 만큼 공단의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우리가 보충해서 지급하기로 했다.
고모는 요양원에서 일한 경험도 있어서 환자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부지런한 고모는 엄마 목욕도 자주 시켜주고 엄마 옷과 침구들도 자주 세탁하고 열심히 말벗도 하면서 틈틈이 집안 청소까지 해주었다. 나는 음식만 신경 쓰면 되니 숨 쉴 틈이 생겼고, 손주를 돌볼 수 있는 여유도 좀 생겼다. 그런데 한 달이 채 못돼서 고모는 이 일을 안 하고 싶어 했다. 엄마가 환각을 보거나 헛소리를 하면 무서워했고 수다를 떨고 싶은데 그럴 동료가 없어서 지루한 모양이었다. 남편은 고모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들어줘야 했다. 나는 고모가 그만두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우리 집이 대중교통으로 다니기 힘든 곳이고 집에 아들네 식구까지 있어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추석 때 고모는 예정보다 5일을 더 쉬고 집에 오지 않았다. 혹시 고모가 안 오실까봐 빨리 오라는 말도 못하고 나는 10일 동안 엄마의 매일을, 매 시간을, 몸을, 화장실을, 식사를 전담했다. 고모의 휴가가 내게는 고역이었다. 평소 고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수 있었지만 내 괴로움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잠을 못자서 괴로웠고 몸은 지쳤다. 밤에는 엄마가 화장실을 가지 않기를 바랐다. 고모가 원망스러웠다. 이 정도로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이 올라오는 나에게 실망하고 절망했다. 그것이 괴로움을 더했다.
추석 휴가가 끝나고 돌아온 고모는 부쩍 요양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요양원에서 6개월 동안 일해 본 경험으로 고모는 요양원이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고모는 기회가 있으면 엄마에게도 요양원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마땅치 않았지만 뭐라 말도 못했다. 이 일을 그만하고 싶은 고모가 추석휴가 동안 방법을 찾은 것이 요양원인 모양이다.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기도 하고 속이 상했지만 대놓고 뭐라 말할 처지도 아닌데, 엄마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모는 또 언제 그만두겠다고 할지… 주말에 고모가 집으로 갈 때마다 나는 불안하다.
고모가 일이 있다고 하면 평일에도 휴가를 주고 급여도 올려주면서 조금 더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고모는 연말까지는 있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또 이번 달까지만 있다가 가야겠다고 한다. 연말까지 있겠다고 한 약속에 대해서는 자신은 그렇게 확실하게 얘기한 게 아니란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절망 속에서 나는 센터에 연락을 해서 요양보호사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와상과 욕창
엄마는 병세가 계속 나빠졌다. 말도 어눌해지셨다. 말을 하다가 갑자기 끊기고 이어지지 않았고, 가끔은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엉뚱한 말씀도 하셨다. 뭔가를 물어도 대답을 들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고, 대답도 정확하지 않아서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루이소체 치매로 인한 파킨슨증으로 물리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생겼지만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고모가 오시고 두 달쯤 지나서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만 지내는 와상환자가 되었다. 어느 날 보니 꼬리뼈 쪽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연고를 발랐으나 상처가 생겼고 그것이 욕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모는 요양원에 있었지만 욕창치료는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가 다니던 내과 의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맙게도 왕진을 와주었고, 욕창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집에서 욕창을 치료하기는 힘드니까 가정간호 서비스를 신청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가정간호 서비스를 알아보니 담당의사가 필요하다고 해야 신청이 가능하고 그건 진료일에 의사에게 이야기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진료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고 매일 드레싱을 하며 욕창치료를 했다.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드레싱을 했지만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다스렸다.
혹시 다른 곳에도 욕창이 생기지 않았는지 살피려고 다리를 보니 두 다리 모두 무릎을 굽힌 채로 누워계셨다. 구부린 무릎을 펴드리려 했더니 엄마는 많이 아파했다. 무릎 관절이 굳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의 다리를 많이 문질러 드리면서 무릎을 조금씩 펼 수 있게 해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굽힌 두 다리 사이에 쿠션을 넣어 좀 편하게 해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욕창도 문제지만 엄마의 몸이 굳어가고 있으니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았다. 또 다른 불안감이 확 올라왔다.
대학병원 진료일에 엄마는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해서 나 혼자 의사를 만나러 갔고 가정간호 서비스를 신청했다. 간호사가 와서 욕창을 치료하면 좀 나아지겠지 기대하면서. 근육 강직에 대해서 의사는 루이소체 치매의 증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물리치료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근육 강직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의사는 엄마를 집에서 돌보기는 힘든 상황이라며 요양시설로 옮기는데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가라고 했다.
끊임없는 걱정이 공기 속에 존재하고 불길한 예감이 일상의 구성요소가 되는 나날들.?도망가고 싶었다.
아, 혼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