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왕진하는 의사
“왕진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어느 날 진료실을 들어온 할머니 한 분이 거동이 너무 느렸어요. 그 분을 제가 부축을 하면서도 점점 마음이 초조해지는 겁니다. 3분이 지나고 있었거든요. 진료실에서 의사는 해녀와 비슷합니다. 해녀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숨을 참고 잠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5분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때는 5분에 한 분씩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던 거죠. 초조해지는 내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나온 양창모 의사의 인터뷰 중 한 장면이다. 이것을 보면서 최근에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안과를 모시고 갔던 일이 떠올랐다. 1년에 한 번 검진을 받는 터라 그간의 어머니 눈 사정을 시시콜콜 전하고 싶은 어머니, 하지만 의사는 컴퓨터로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검사 자료를 보느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는 별 이상 없으니 처방전 받아가라는 말로 진료는 끝났다. 어머니는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 하나도 얻지 못하고 진료실을 나와야 했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겪을 때마다 속이 상한다. 나는 괜히 어머니에게 의사가 듣지도 않은 말을 뭐하러 하냐고 짜증을 내고 말았다. 양창모 의사의 인터뷰를 듣자니 5분 진료를 불편해 하는 의사도 있구나 싶었다. 이 책은 그 불편에 질문하고 대부분의 의사들이 가지 않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양창모 왕진의사의 에세이집이다.
그는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의사 일을 시작한 이후, 춘천에서 10년간 재직했던 병원 일을 그만두고 시골 어르신들 댁을 찾아가는 ‘호호방문진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의사다. 하루에 방문 가능한 곳이 네 곳 정도인데다, 강원도 소양강댐 수몰 지역으로 다니느라 산길을 걷고 배를 타고 이동하기도 해야 하는 일이다. 산길을 걷다 운동화 위로 독사가 지나가는 걸 경험한 이후 등산화를 꼭 챙겨서 신고 다녀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병원에 오기조차 어려운 이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진료실을 떠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진료실 안에 앉아 있으면 모든 게 너무 쉽다. 그래서 이해를 못한다. 그 쉬운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모든 일이 너무 쉬운, 나 같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슬프고 또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진료실 밖 어디에선가는 나도 어려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모든 게 너무 쉬운 사람들이 아니라, 나에게서조차 이해받지 못했던 어려운 사람들일 거라는 점이다.(37)
5년 동안이나 의사를 만나지 못한 할머니를 왕진한 날, 그는 할머니의 아들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멀미가 심해서 병원으로 모시고 갈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의 상태를 보자면 단지 멀미 때문이라는 말이 잘 납득이 안 되었다. 하지만 그 집을 나서서 시내로 오는 길은 건강한 자신의 멀미가 날만큼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그제야 할머니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 만약 할머니를 진료실 안에서 만났더라면 그는 보호자를 너무 쉽게 나무랐을 것이다. 진료실 안의 진료는 병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결국 의료는 진료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 환자 사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포함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의 의학은 그의 이해를 의미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는 “내가 만나는 것은 질병이 아니라 환자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왕진가방을 들고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의사로 살고 있다.
2.아른거리는 얼굴들
의사가 된 이후 진료실에서 또는 왕진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은 그를 지금의 삶으로 이끄는 데 한 몫을 했다. 의료생협 시절 손가락 관절염이 의심되는 할머니를 진찰했을 때, 한 겨울에도 손빨래를 하고 있는 사정을 알게 되었다. 집에 세탁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탁기 구입과 손가락 통증을 참는 것, 둘 중에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삶”에서 필요한 의사는 어떤 의사일까. 그는 생협 게시판에 할머니의 사연과 함께 중고 세탁기를 구한다는 내용을 올렸고, 조합원들의 도움으로 할머니께 세탁기를 선물해 드렸다. 이런 경험은 “환자들의 삶에 밀착해 있는 의사가 좋은 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믿음을 가지게 했다.
병원 진료가 끝난 토요일 오후, 병원 문을 나서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나물을 캤는데 병원 직원들까지 나눠 먹을 양은 아니라 밖에서 기다렸단다. 감사히 받고 자동차를 타고 병원을 나서는 그의 백미러로 낡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저렇게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나물을 캐서 번 돈으로 우리 병원을 이용하고 계셨다는 것과 그런 분들이 낸 진료비로 내가 자동차를 샀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서 부끄러워졌다. 이런 생각은 퇴근길에 산 귤 한 박스로 이어진다. “이 귤에 대해 만오천 원을 지불한 나는 정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걸까.” 돈으로 모든 가치를 매기는 시대에 할아버지의 산나물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돈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우리’를 떠올리게 했다.
동네 의원에서 일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한 할아버지는 그가 병원을 옮길 때마다 따라 오셨다. 2년 동안 진료해주었던 아이의 엄마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면서 잼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동안 잘 치료해서 고맙다는 글을 붓글씨로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신 또 다른 할아버지. 그는 이분들이 그를 의사를 의사답게 만드는 환자들로 기억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3.진료실 밖의 세상
왕진에서 만난 두 노인.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 혼자 할아버지 병 수발을 하면서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하루 다섯 번씩 꼬박꼬박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기고 혈당을 체크하고 기록을 하셨다. 욕창도 거의 없었다. 할머니의 지극한 간병으로 할아버지의 삶이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인은 이런 환경에 놓여있지 않다. 가족의 보살핌은 기대할 수도 없고, 외로움과 비참을 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이런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첫째, 의사들의 왕진이 제도화되어야 하고, 둘째 노인들이 정치세력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진수가를 현실화하는 것은 물론, 왕진의 주체를 민간의료에서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꾸어야 한다. 선거 때만 대접받는 경로당 어르신이 아니라, 노인들의 일상적인 요구를 정치화할 수 있는 어르신 정당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인 인구 천만의 시대, 노인이라는 범주 자체가 무색하다. 나이 들어도 몸이 아파도 안전하게 자신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정치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위의 경우처럼 할머니에게 간병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도 해결책일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가족을 간병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가 여건을 보장해줘야 한다. “내가 그를 간병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그를 간병해줘야 한다. 만약 내가 간병을 선택한다면 사회가 치러야 할 공동체의 비용을 아무런 조건이나 장벽 없이 나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그는 공공의료의 확충을 주장한다. 최근 의료 개혁과 관련 정부와 의료계사이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4월에 한겨레신문에 그가 보낸 칼럼을 찾아보았다.
대도시에서 소위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으로 개업하겠다는 신념이 아니라 필수의료나 공공 방임지역 의사로 살겠다는 신념을 가진 ‘보통의 의사’는 결코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나타날 수 없다. 단언컨대 의사 수가 지금의 두 배가 된다 해도 이곳 시골에 방문진료 할 의사는 필요한 만큼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의사 집단을 아무리 비난해도, 정부가 의사면허를 취소한다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그런 의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의사를 만드는 것은 의사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를 둘러싼 시스템이, 진료실 밖의 사회가 의사를 만들어낸다. (2024. 4.26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발췌)
이 책에서 만난 양창모 의사는 내가 그간 만나보았던 보통의 의사는 아니었다. 너무 특별하고 훌륭한 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 같은 ‘보통의 의사’가 나오려면 진료실 밖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의 의사들을 만든 사회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 의사들만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왕진을 나서서 환자들의 삶에 연결되었을 때 알게 되는 수많은 사정이 그를 ‘보통의 의사’로 만드는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진료실 안에 머물지 않는 의사의 삶, 그의 왕진이 열어젖힌 다른 세상의 순간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왕진을 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곳에 앉아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감춰진 행복보다는 숨겨진 불행을 마주하는 일이 더 흔했다. 나도 저렇게 늙어가면 좋겠다 싶을 만큼 행복해 보이는 분도 많았지만 내가 저런 상황에 놓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불행한 분도 많다. 그럴 때는 내 삶이 노년의 모습으로, 마지막 모습으로 평가받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자식들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사연 없이 그냥 둘 사람은 없다. 그리 믿는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모습이 이렇게 많다는 건 우리 중 누구도 ‘나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고 자신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보면 어디로 나가떨어질지 알 수 없다.(207쪽)
환자들은 진료실을 나가도 환자로서의 삶이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의사의 역할은 진료실을 나가는 순간 끝나는 걸까. 의사가 진료실 문을 나설 때도 의사로서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의사의 삶이 시작될 뿐이다.(284쪽)
병원 진료실에서 만난 의사에게 실망만 느끼게 되었을 때
공공의료에 대한 실제 사례가 궁금하다면
‘보통 의사’에 대한 상상을 위해
우리 사회의 돌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