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엔딩노트’를 처음 접한 것은, 2016년 유시민씨가 참여하면서 입소문이 났던 <엔딩노트, 삶은 기록을 남긴다>라는 다음 포털의 스토리펀딩을 통해서였다. ‘죽는 데에도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설득당해 펀딩에 참여했는데, 리워드로 두 권의 엔딩노트가 배송되었다. 엔딩노트에는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결정과 장례방식을 비롯하여 내 가까운 사람, 소중히 여기는 물건, 금융정보나 주요한 사이트의 비번과 같은 것 등 채워야 할 정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여튼 그 엔딩노트를 받아 든 이후 내 머리 속에는 죽기 전 내 스스로 남기고 싶은 것과 버리고 싶은 것을 고민해보고, 누군가에게 알려줘야만 하는 정보들을 미리 정리한다는 to-do list가 생겼다. 그리고 2017년에 당시 사설기관에서 주관했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하지만 그것은 법적 효력이 없어서 법제화 이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에서 다시 작성했다.)
그 엔딩노트의 기원은 일본의 종활(終活, 슈카쓰)이다. 말 그대로 인생의 마지막을 위한 준비 활동이다. 종활은 2009년 경 처음 소개되었는데 2010년에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노인 돌봄과 고독사가 사회 문제로 등장하면서 종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종활의 대표적인 활동인 엔딩노트는 2010년에 상품으로도 출시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여기에 2011년에 경험한 대참사, 동북대지진은 노인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죽음을 한층 가깝게 들여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노후에 가족이나 친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며 노후의 돌봄과 사후 장례나 장묘에 대해 미리 준비하는 것을 종활의 기본으로 여긴다. 여기에 상속, 재산정리, 연명치료, 간병, 치매, 유품정리까지로 확장되면서 최근에는 큰 비즈니스 분야로 자리잡았다.
작가의 종활일기
이 책은 「오싱」 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의 엔딩노트 겸 종활일기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한국의 경성에서 태어난 하시다 스가코는 9살 때 공부를 위해 아버지와 헤어져 일본에서 살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태평양 전쟁의 포화 속에서 20대를 보냈다. 대학 재학 중에 겪었던 전시의 고난, 그리고 전쟁에 대한 책임감이 훗날 드라마 오싱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여자대학교 국어과를 졸업후 와세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가 연극에 대한 관심으로 예술과로 전과했다. 그리고 쇼치구 영화사에 최초의 여성 각본가로 입사해 고군분투했다. 이후 집필한 TV 소설 <오싱>이 평균 시청률 52.6%를 기록하면서 그는 국민작가가 되었고 30년 이상 방영된 <세상살이 원수 천지>와 같은 초대형 히트작 등을 남겼다.
오랜 세월 인기 작가로서의 지위를 누렸지만 노년이 되자 더 이상 자신에게 작품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그는 “내 역할은 이미 다했다. 이미 역할을 다한 사람이기에 진지하게 반성하고 이런저런 정리도 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90대의 1인가구로서 죽음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장례식을 바라지 않았다. 또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 죽기를 소망했다. 매년 생일 케이크를 사듯 죽음에 관한 평소의 생각들을 두 세줄 씩 적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종활(終活)일기이다.
존엄한 안락사를 희망하다
작가는 90세가 되던 해인 2016년에 「분게이 슌주(文藝春秋)」 12월호에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를 기고했다. 그러자 수많은 독자들이 그 생각에 동의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안락사의 법제화를 위해 인플루언서로서 활동해주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반응에 놀라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그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사회분위기로 바꾸자고 주장하거나 그런 일에 앞장서겠다고 결심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그저 이렇게 죽지 않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개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안락사를 희망하는 글로 큰 주목을 받게되자 ‘안락사’가 사회적 약자에게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을 우려했다. 빈곤이 안락사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보장 비용이 늘고 관련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안락사의 필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자신은 그저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안락사를 원할 뿐, 다른 사람에게도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못박으며 사회에서 이러한 입장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한편 이상적인 안락사제도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복수의 의사와 간호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변호사 등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팀이 판단하는 제도를 희망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증상만으로 안락사의 가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삶의 양상, 삶을 대하는 태도 등이 함께 감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곁에서 지켜봐온 ‘주치의’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평소의 모습은 모른 채, 아플 때의 모습만을 보는 의사가 그 사람의 생명 여탈에 관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그 의사에게는 임상 경험 뿐 아니라 세상경험이나 인격도 중요하며 죽음과 마주하고 간병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안락사는 극심한 고통 속이 동반되는 불치병 환자나 고령의 환자가 대상이며 젊은 사람이나 장애인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제한을 두기도 한다.
안락사를 허용할 경우의 잇점도 소개한다. 안락사의 허용이 오히려 당사자의 삶에 자유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휠체어 육상선수인 마리케 페르보르트의 사례를 든다. 그는 10대에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는 퇴행성 척수질환으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 2008년에 안락사 허가를 받았으나 2012년 런던 장애인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이네루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해 총 4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서 금메달을 딴 후 삶을 마감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목표를 이룬 후 3년만에 그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안락사를 허가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당장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안락사가 허용되는 미국의 오리건주에서 안락사 약을 받은 사람의 40%는 복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생일에는 엔딩노트를 적어보자
할 일을 다 끝냈고 삶에 미련이 없다고 선언했지만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아흔살이 넘도록 작가가 건강을 매우 열심히 챙겼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식사 때마다 고기를 200그람씩 먹고, 건강검진도 매년 받았으며, 매일 열 종류 이상의 약을 먹고, 30년간 매일 아침 1000미터씩 수영을 했다. 깔끔하게 죽고 싶은 소망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건강한 삶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무살 생일부터 생일이 올 때마다 지나온 삶의 의미와 기쁨을 곰씹으면서 죽음과 마주할 것을 권한다. 자신이 태어난 날에 죽음에 관해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멋진 습관이냐며.
어떤 방식이 되든 간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여기까지’라고 선언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나름 괜찮은 엔딩이라는 생각이 든다. 엔딩노트는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생명은 가족의 것도 아니고 친구의 것도 아니고 당사자 개인의 것이므로 죽게됨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일 때 가능하다.
그는 2021년 4월 급성 림프종으로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고 추모식도 열지 않았다. 그는 신문에 실리는 부고도 원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을 경험한 우리 세대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물건이라도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남겨둔다. 그래서 정리하는 일이 몇 배로 힘들었다. 무려 2년이 걸렸고 마분지 상자를 열 개도 넘게 버렸다. 그러니 정리정돈은 체력이 충분할 때 미리 해두시라.
(나이 아흔, 삶을 정리할 때)
나는 장례식도 회상 모임도 원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사교의 빌미로 이용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내 장례식을 치른다 해도 어차피 의리상 찾는 사람밖에 없을 터이니 굳이 발걸음을 하게 만들기가 미안하다. 의리 때문이라면 굳이 안 와도 된다. 그냥 화장해서 무덤에 넣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제발 장례식은 사절!)
내가 쓰는 드라마는 구시대가 배경이라 이제 각본 의뢰도 들어오지 않고, 나 또한 더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노년 부부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쓰고 싶지만,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배우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 버려서 적합한 배우가 없다. 설령 맞춤한 배우가 있더라도 “그 사람이 주연이라면 기획이 잘립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은 젊은이가 주연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 내 시대는 이미 가버렸다.(가족 드라마에불륜, 살인, 베드신 따위는 필요 없다)
안락사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에서는 의사가 홈닥터라고 부르는 일반의와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의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홈닥터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반드시 등록을 해야 한다. 몸 상태가 나빠졌을 때는 먼저 홈닥터의 진찰을 받고 필요에 따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소개받게 돼 있다. 많은 사람이 죽을 때 병원이 아니라 자택에서 가족과 홈닥터의 간병을 받는다고 한다. 안락사의 판단도 홈닥터가 한다고 들었다. (중략) 네덜란드의 홈닥터는 내가 말하는 방문 진단의 같은 존재다. 평소에 친분이 있고 내 성격이나 가치관, 생사관을 이해해주는 의사라면 신뢰할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기 전에 안락사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것이다.
(안락사 A,B,C 살아 있을 때 명확한 의사 표시를)
안락사라는 말을 사용하니 어딘가 거창하게 느껴지는데, 간단히 말하면 이러하다.
“나는 ‘평안하게’, ‘즐겁게’ 죽고 싶다.”
(평안하게, 즐겁게 죽고 싶다)
*괄호안 내용은 해당 글의 소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