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고
크리스티나는 2003년 10월, 자전거 앞바퀴 살에 나뭇가지가 걸려 노면에 처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얼굴의 뼈가 박살나고 척추뼈까지 부서졌다. 부러진 뼈에 척수가 긁혀서 사지마비가 되기에 이르렀다. 5개월간의 치료와 재활을 한 후 집으로 퇴원했지만, 이제 그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는 그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물리적 접근성을 높여주었고, 기존에 비해 절반의 시간을 일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 책은 쉰 살이 된 해 겪은 사고로 “자전거로 40마일을 달리고, 사막의 협곡을 하이킹해서 오르거나, 바다에서 카약을 타고, 오토바이를 타는 데서 비롯되는 만족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회고록이다.
사고 후 사지마비의 삶은 똑같은 처지로 살았던 오빠 제프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 살 터울인 오빠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놀이 상대이자 이기고 싶었던 경쟁 대상이었다. 여자아이들의 취미라 여기는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오빠와 쌍둥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그런 오빠가 스물 여덟에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서서히 몸이 마비되어 가는 병이었다. 사고를 당한 후 오빠와 같은 처지가 되어 자신이 상실한 것들을 인식하면서, 쌍둥이가 되고 싶어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우연의 일치에 놀라기도 했다.
2.돌봄
그는 레즈비언으로 자넷이라는 연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사고를 당한 후 그는 자넷의 헌신적인 돌봄을 받았다. 요리를 즐기고 집안의 고장 난 물건을 직접 고쳤던 일을 했던 그는 이제 사지마비가 되어 고스란히 돌봄을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서로의 몸에 대해 충분히 즐겼던 예전의 시간은 사고로 바뀌었다. 이제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육신은 촉감에 둔감해졌다는 것을 매번 인식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자넷이 우리 둘 다에게 혼탁하기만 한 체화된 삶에 불을 비추고, 에둘러 갈 필요가 있는 어두운 진실에 빛을 밝히기 위해 메타포에 손을 뻗은 것은 놀랍지 않다.” 언어를 통해 서로의 몸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일상의 다른 삶에서도 변화에 따른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멀쩡한 몸으로 집안일을 하면서 느꼈던 만족감을 더 이상을 느낄 수 없을 때, 삐뚤어진 커텐 블라인드를 고치기를 원하지 않기를 원하는 적응에서 그들의 삶이 지속되었다.
도나는 특수진료 전문병원에서 만난 간호조무사였다. 집으로 퇴원한 후 사지마비의 삶에 익숙해지는데 두 사람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도나는 집으로 와서 일해달라는 그들의 부탁을 승낙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도나가 처한 상황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부업으로 크리스티나의 집에 와서 일하면서도 병원에서 나오는 추가 근무도 뛰면서 연속 16시간을 근무한다. 그런데도 청구서가 쌓이는 삶이었다. 고되고 저임금에 치이는 삶, 이민자들이 주로 담당하는 일이었다. 도나는 뛰어난 역량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 뛰어남 때문에 어디서나 진이 빠지도록 일하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스트레스가 심한 일인 동시에 생계를 유지하기가 정말 힘든 길이다.” 크리스티나는 도나와 자신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관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도 함께 인식했다. 금전관계로 노동시장에서 만나는 사이. 그는 페미니스트이자 교육자로서 정치적 행동으로 조직의 부정의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돌봄 노동에 대한 가치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가르치는 일, 그로써 “나의 의존을 돌봄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폭넓은 범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수행했다.
3.글쓰기
이 책은 사고를 당하고 부서진 몸으로 새로운 삶을 재건하는 과정을 진지한 문장으로 밝히고 있다. 사고가 일어났고 세상이 바뀌었고 감당하기 힘든 절망을 이겨냈다는 기존의 서사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영문학자로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문학 작품의 비유를 쓰고, 여러 이론을 통해 인식을 확장하는 글들이었다.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스포츠를 만끽하고, 사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고, 수많은 파티에서 흥을 누렸던 자신의 과거를 글쓰기를 통해 변화를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과거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몸으로 다시 통과하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기도 했다. 자신의 음주 역사를 되돌아보며 그리움에 사무치는 만큼이나, 술로 인해 얻었던 효과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달라진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었다.
자신의 손상된 삶이 지극히 사무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자넷에게도 그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자넷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그러면 크리스티나는 자넷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도록 단련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은 여전히 힘들다. 그런 상태를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하지만 내 삶으로부터 나 자신을 축출하고 소외시키는 고통과 불편함이 침습하는 날이면, 세계에 대한 애착은 약해지고 육체적 정신적 쇠퇴를 수반하는 노화를 공포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순간이면, 죽음은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275)
그렇게 “함께 살기에 불가능한 존재가 될까 봐 두렵고 살고 싶지 않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을 다독이며 살기를 멈추지 않았던 크리스티나 크로스비는, 2021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척수 손상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나의 이해를 좌절시키며 나의 몸을 와해시켰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의미에서든 내가 좋은 삶을 살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척수 손상이 가져온 이 와해에 내가 얼마나 열린 마음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전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은 다른 사람들과 나날이 맺는 관계에 의존한다.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그렇다. 이제 나는 당신이 당신 내면으로부터 깨닫기 바란다. 이를테면, 아주 근본적으로 변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만일 내가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있다면, 어쩌면 나도 볼 수 있을 것이다.(39)
글쓰기는 나의 내면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내가 예상치 못했던 길을 택하도록 했다. 가족을 돌보며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공유한 나의 오빠인 제프와 특별한 친밀감을 쌓았다. 제프와 나, 우리의 이토록 불가해한 경함을 표현할 방법을 찾다 보니 나는 수도 없이 사전을 뒤적이며 서정시의 응축된 언어를 더듬고, 인간 주체성을 탐구하는 현상학과 정신분석학 같은 앎의 방식들, 관계적이고 체화된 삶을 고민하는 페미니즘적 퀴어적 사유를 모색하게 되었다. 나는 기억 속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지만 글쓰기 과정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미 써 버린 것들을 곱씹을 때조차 문장들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내 앞에 펼쳐진다.(281)
계속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과거의 우리와 다르지만, 항상 되어가는, 되기의 과정 속에 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충만하고 열정적으로 살기를 선택했고, 곧 예측 가능한 미래에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선택을 할 때마다 나는 과거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지며, 이전의 나와 점점 더 분리될 것이다. 이것은 지난한 과정이다.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