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인 수지 아파트촌에서 산다. 올해 초 동네에 ‘용인 반도체 산단 이전 반대’ 현수막이 내걸리고 엘리베이터에도 반대 서명지가 붙었다. 여기서 한참 먼 산단이 아파트값과 무슨 상관이라고? 좀 의아했지만 가볍게 넘겼다. 문제를 본격적으로 느낀 것은 올여름이었다. 반도체만이 나라를 구할 것처럼 떠들썩한 와중에,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재검토와 초고압 송전탑 건설반대 전국행동’이 7월30일부터 22일 동안 해남에서 용인을 거쳐 서울까지 행진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단은 전기와 물을 하염없이 잡아먹는다. 용인 산단에 필요한 전력은 2041년까지 원전 10여기의 설비용량에 맞먹는 14GW 이상, 계획 용수 수요는 하루 약 134만t이다. 그 전기와 물을 다른 지역에서 끌어오려면 누군가의 산과 논밭에 송전탑을 세우고, 상류 댐의 물까지 확보해야 한다. 행진에 나선 주민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수도권을 위한 희생을 강요하지 마라.”
나는 그 연극에서 언급된 장소를 직접 보고 싶었다. SK 산단이 있는 원삼면으로 향하는 길, 어느새 덤프트럭이 끝없이 나타났다. 공사 현장에는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로 뻗는 타워크레인”들이 어지러웠고, 변신 도중 멈춰 선 트랜스포머 같은 송전탑들이 뿔처럼 솟은 어깨를 위풍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허허벌판에 달랑 서 있는 편의점 지붕 바로 옆으로도 초고압 송전선이 지나갔다. 가슴 아팠던 것은 이 지역의 백년 된 초등학교였다. 학교 앞에는 산과 들 대신 거대한 공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울타리는 이중 철망이었다. 아이들은 어떤 길로 학교에 다닐까? 비산먼지는? 공장이 가동되면 학교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학교 옆 가게 주인은 돈을 벌어서 좋아한다고만 했다. 삼성 산단이 들어설 이동읍으로 갔다. 추석 직전인데도 마을은 기괴할 정도로 적적했다. 음식점 주인은 “주민들, 다 땅 팔았어요”라고 말했다. 연극 대사처럼 산을 넘어온 거인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을과 논밭과 개천을 먹어 치우고 있는 것일까?
9·19 기후행진을 앞두고 공동체가 분주했다. 인문학 공동체답게 기후위기와 관련된 이슈를 시리즈로 정리했고, 세미나 회원들은 소창에 구호를 적고 그림을 그려 작은 깃발을 만들었다. 나도 공동체 친구 수십명과 함께 시청 앞으로 갔다. 수어와 문자통역이 제공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집회는 평등하고 알차고 재밌었다. 발언 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하지만 발언자들 너머로 보이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는 전깃줄도 송전탑도 없었다. 집회 뒤쪽 빌딩의 거대한 전광판에서는 모델같이 생긴 사람들이 경치 좋은 호수에서 한가롭게 배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싱어송라이터 예람이 가만가만 불렀던 ‘뜨거운 날’이 오래 남았다. “오늘을 견디는 건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랑을 원해, 평화를 더 원하는 세상” 그 가사가 사무쳤다.
행진이 끝난 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탄소중립 선언문을 쓰고 학교 안에 기후동아리를 만든, 기후행진에서 발언도 한 마을 대안학교 청소년들을 인터뷰하려고 한다. 동네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다. 맛있는 밥도 사줘야지. 난 여전히 사랑을 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