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후』이 저자 희정님과의 북토크 사전세미나가 열렸다. 진행자 인디언샘의 안내에 따라 13명의 사람들이 발제, 소감과 질문을 함께 나누었다. 늘 그렇듯 책은 혼자 읽기 보다 같이 읽을 때 또렷해지고, 깊어진다. 죽음, 돌봄, 나이듦을 내 관심사에 조금 나중의 일로 생각했다가 지난 달 아버지 장례식을 치루면서 관심을 갖게된 나는 지난 몇주간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앞에 놓였던 장례의 절차, 역사, 장례 노동을 하시는 분들의 마음, 산업화된 장례문화가 가족주의에 대해 망라해서 알 수 있었다. 이번 사전 세미나는 그간 오래 공부해오신 연구소 선생님들과 이제 관심을 갖고 임하신 여러 선생님들 틈에서 잘 경청하는 시간으로 참여하고자 했기에 말씀들을 열심히 타이핑했고, 그 내용들을 정리하는 후기를 써보려고 한다.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에서 이미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셨던 서해샘의 발제를 통해 책의 주요한 내용을 확인한 후에 각자 남긴 메모 혹은 질문을 공유했다. 반장님이신 유상님의 메모부터 시작했는데, 유상샘은 ‘장례가 복지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사회적 차원에서 애도가 가능하다.”(286쪽)는 저자의 글을 통해 사회보장제도로서의 공영 장례를 통해 죽음에서조차 애도받을 자격이 갈리는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보편적 복지로서의 공영장례로 애도의 불평등성을 해결해보려고 하는 접근법 과연 적절할까.
문탁샘은 장례 복지라는 접근법에 갸우뚱하셨다. 장례의 역사문화적 흐름 속에서 마을 공동체가 점차 사라지고, ‘무연고’가 불리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는 일과 그에 따라 필요한 법제화NGO단체들을 통해 추진된 것이 지금까지였다. 그런데 애도 불평등성의 대안이 복지제도, 국가가 관장하는 일로 방향을 잡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이제 점차 소박한 장례 문화로 정세가 바뀌고 있지 않나?
요요샘은 장례의 격차가 극심한데, 형식적이나마 보편적 복지 필요하지 않을까란 말로 읽혔다고 하셨다. 일본의 경우를 보았을 때 국민건강보험과 후기고령화의료제도에서 장례비용을 지원해준다는 점에서 장기요양보험처럼 누구나에게 제공하는 장례비용에 대해서 말하는구나 했다. 누구나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구나 했다. 다만, 애도를 제도로 보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복지제도로 보장된 애도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며 이해한 바와 비판의 지점을 동시에 말씀해주셨다.
문탁샘은 돌봄의 ‘공공성’에 대해서 논할 때 국가의 제도적 보장으로 연결짓는 여러 방식들에 대한 불편감을 말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요요샘은 그런 점에서 최현숙샘께서 자신의 장례희망을 ‘공영장례’라고 말했던 것이 이해되었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장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죽음과 애도를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에까지 깨어드는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깨기 위한 급진적 방식의 공영장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 개인의 죽음을 사회적 차원의 죽음과 애도, 사회적 존재의 죽음과 애도를 말할 때 이를 곧장 복지제도로 연결짓는 접근 방식에 대해 다시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도 근래에 장례를 치루면서 엄청나게 발생하는 장례 비용을 보면서도 알게된 장례식에 밀착된 자본주의적 문제 속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동시에 고민이 되었다. 소규모 장례식이 지금의 문제를 대체할 방식들로 등장하고 있지만, 매뉴얼화된 장례 절차 속에서 매뉴얼을 잘 익혀 양산된 장례지도사들이 치루는 장례문화는 여전히 남는 문제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기린샘들께서도 메모하셨던 문장. “장례가 상업화되고 있다는 말은 단순히 장례가 돈이 되는 사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죽음을 향한 우리의 감각과 정동이 시장에 들어섰다. 아니, 시장에 갇혔다.”라고 말씀하신 저자의 이 문장이 끝내 남겨질 숙제처럼 느껴졌다.
요요샘은 메모를 통해 팬데믹과 같은 상황이 올 경우 지난 코로나 때와 어떻게 다르게 사회적 죽음을 애도할 수 있을까, 다르게 애도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 는 것일까, 좋은 장례와 애도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단 말씀을 주셨다. 장례지도사들이 당시 감염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인간적으로 보내드렸어요’라고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셨다.
기린샘은 화장기사 이해루씨의 인터뷰를 인상적으로 읽으셨다고 하셨다. 나 역시 메모를 했던 부분이었다. 스무살이 자신이 선택해서 여성 최초로 화장기사가 됐다는 이해루씨가 어머니 장례를 자신이 직접 진행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본인은 별로 눈물이 나지 않았던 일에 대해 말한 일, 한참 후에 어머니를 애도한 경험을 나눠주신 부분에서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방식은 다 달라서, 그 다름의 마음 씀이 곧 애도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하셨는데, 깊이 공감되었다.
또한 요요샘과 비슷하게 사실은 자신의 장례식은 남은 사람들에게 맡기겠단 평소 생각이 공영장례 활동가 인터뷰를 통해서 달라진 점도 말씀해주셨다. 내 장례식을 우리 가족들이 주관? 내가 정말 가족장을 원하나?란 질문이 생겼다고 하셨다. 그리고 문탁샘은 사전연명치료동의서를 쓰고 협의과정을 거치듯이 장례식의 경우도 가족들과의 사전 협의 과정이 필요한 일임을 말씀해주셨다. 나이듦연구소가 파지사유를 통해 장례식을 하는 비전에 대한 말씀을 듣기도 했는데… 비전에 응원을 보내면서도, 마냥 응원!!!을 하기에는… 뭔가 좀…. ^^;;
문탁샘은 메모를 통해 4장이 특히 좋았다고 하셨다. 전통적 장례 의례를 계속 담당해서 일해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볼 수 있는 장이다. (수의 제작, 상여소리, 화장, 장묘 등) 장례라는 의례는 사별자들의 슬픔을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 애도로서 완수하는 일이다. 그런데 시대와 정세에 따라 그 형식이 바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무엇은 바꿀 수 있고, 바꿀 수 없는 것인지 읽으면서 내내 질문이 생겼었다고 하셨다. 실제로 근래에 아버지묘 이장을 하고 난 후 왜 내가 이장과 합장을 했을까. 이는 장묘문화의 변화, 관리법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화장 기사 이해루씨의 애도를 보면서는 장례지도사란 직업인이 모두 이해루와 같은 절제의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현재는 장례지도사가 안정적 직업으로 여겨져서 대학의 학과까지 만들어진 상황이다. 그랬을 때, 마음이 아니라, 매뉴얼만 익히는 장례 지도사만 양산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아버지 장례식을 치룰 때 염 예식을 진행해주신 젊은 장례지도사가 떠올랐는데, 나이를 떠나서 매뉴얼대로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20여년 전 직접 염을 하는 것을 보여줬둔 할아버지 장례식을 경험하면서 생긴 감정들이 떠올랐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럼에도 미소 띤 아버지의 얼굴, 입술에 칠해진 립밤을 보면서 자연스레 아쉬운 가정이 무화되었고, 최선을 다해서 모셨다는 믿음을 갖고 싶었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평소 아버지를 생각하면서는 립밤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런 많은 것을 생각해볼 때 차라리 내가 부모님의 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 역시 불쑥 들었던 것 같다.
또, 문탁샘은 책에서 언급한 자살의 경우 생략되곤 하는 추모와 애도를 말씀하시면서 자살은 충분히 애도가 될 수 있을까 질문하셨다. 이 사람의 죽음이 이 공동체의 상실임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장례의 형식일텐데. 이런 부분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공영장례로 가능한 부분은 아닐거라 하시며 질문하셨다. 이미 결혼식도 본인이 주관하니 장례도 당대의 문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탈가부장 례식에 대한 이야기도 이미 하고 있지 않나.
은영샘은 나처럼 죽음, 장례에 대해서 평소 관심을 갖지 않다가 이번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저자 희정께서 글을 너무 잘 쓰셔서 놀랐고, 그분의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다고 하셨다. 또 기록노동자란 직업마저 궁금해져서 그걸 질문드릴까도 생각해보셨다고 한다. 책에서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인 채비에 인상깊게 보아서 채비 학교 과정이 궁금해졌다고 하셨는데, 마침 5월에 채비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를 나이듦연구소에서 준비중이라고 한다!
먼불빛샘 역시 화장 기사 이해루씨 인터뷰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셨다. 죽은 다음 또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존엄이 달린 문제라는 것, 고인과 사별자 모두가 기획자가 되는 장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직계 비속은 가장 중요한 관계이긴 하다. 그렇지만 가족주의를 넘어서서 내가 맺고 있는 관계도를 펼쳐서 더 다양하게 엔딩플랜을 고민하고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하셨다.
이번에 처음 뵙게 된 고은경님은 감이당에서 공부하시다가 오셨다고 했다. 글을 읽으면서 장례 노동자들의 현실, 태도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셨고, 사전장례식에 대해서 인상깊게 읽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럼 나는 언제 그런 장례식을 할 수 있을지, 시점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고 하셨다. 한편, 일본에는 무덤 친구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같이 무덤에 들어갈 사람을 말하는데, 고령화사회에서 필요한 형태의 장묘임을 다른 샘들께서 소개해주셨다.
조제님은 어떻게하면 짐이 되지 않고, 존엄하게 잘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고 하셨다. 그것이 남은 사람들을 위한 애도일 수 있겠다란 말씀이 개인적으로 공감되었다. 책의 저자께서 존엄한 죽음, 애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애쓴 장례 노동자들을 직접 찾아가 남긴 이 기록으로 인해 새롭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감을 말씀해주셨다.
이승현님은 죽음하면 가장 먼저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하며 읽었다고 하셨다. 염습하는 과정을 실제로 할수도 있고, 지켜볼 수 있단 말에 직접 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어떻게 북토크에 접속하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기도 하셨는데, 삶을 명랑하게 살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고미숙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오게 되있다고 하셨다. ^^
발제자 서해님께서는 실제로 장례지도사를 배울까 생각을 했다고 하셨다. 어떤 지도사는 기저귀도 빼지 않고 염을 한단 말에서 내가 배워야하나라는 생각들었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희정 작가에게도 어떤 두려움 있었냐는 질문을 드려야겠다 말씀도 해주셨다.
남은 주제들은 서해님의 고민처럼 실제로 대안적 공영장례를 고민할 때의 구체적인 고민과 설계였다. 이념과 현실에는 언제나 틈이 발생하기에. 채비 혹은 언니네 네트워크의 ‘탈가부장:례식’과 같은 대안적이고도 동시에 가족을 배제하지 않는 공영장례를 고려한다면, 예를 들면 1일장이 될 것이고, 장례식장이 없기에 시신도 다른 곳에 보관하고, 시신의 염은 누가, 어디에서 할지와 같은 고민들이 생길 거란 거다. 염을 하는 곳과 추모의 장소가 달라질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고민들까지 들었던 사전세미나였다. 내 앞에 놓여져 있는 애도와는 별개의 일처럼 내용들이 떠나니기도 했지만, 좋은 책을 만나 읽고 나누는 자리가 있었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아직 내 안으로 깊게 들어오기 어려운 내 상태를 알아차리게 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감정으로 머물러 있는 일들을 언어화하며 애도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충실한 만남과 꼼꼼한 기록으로 장례 노동 현장의 사람들, 단체들을 소개해주시고, 장례 현장을 향해 화두를 던질 수 있도록 저변을 넓혀주신 저자 희정님과의 북토크를 기대해본다.

사전북토크를 위한 사전 질문모음:
천유상
2026-01-28 09:15
(1) “장례식이란 결국 한 사람의 삶, 특히 ‘정상가족’의 삶을 평가하는 최종 시험장이 아닐까?” (291쪽):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 권한부터 장례를 치를 때의 상주 문화 등 현재의 가부장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장례 문화에 대해 많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탈가부장:례식> (300쪽) 에서 이야기한 ‘실무자를 위한 평등한 장례 매뉴얼’과 같은 시도가 많이 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동생 두 명이 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떤 위치로 참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2) “장례가 복지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사회적 차원에서 애도가 가능하다.”(286쪽): 사회보장제도로서의 공영 장례가 책에서의 이야기처럼 보편적으로 자리잡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죽음에서조차(?) 애도받을 자격과 자격이 없는 것으로 나뉘어지는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야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요
2026-01-28 09:28
희정의 <죽은 다음>을 읽고 나니 좋은 장례가 우리 시대의 또하나의 화두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동안 우리의 장례는 오랫동안 만들어져 온 전통의식인 줄 알았는데, 그 또한 일제시대와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장례법에 의해 변모된 것이었다는 것도 새로웠습니다.코로나 19가 죽은 다음과 장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엄청난 실천과 인식의 전환을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 뒤늦게 깨닫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고요.다시 팬데믹과 같은 상황이 올 경우 코로나때와 다르게 사회적 죽음을 애도할 수 있을까, 다르개 애도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어떤 장례가 좋은 장례인가를 묻는 것은 죽은이의 ‘있었음’에 대한 기억과 애도라는 소중한 배움을 얻었습니다.애도가 죽은이를 기억하고 나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타자에 의존하고 의지하며 서로 돌보는 삶을 만들어 나가는 실천이라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 공영장례, 공동체 장례, 시민상주와 관련된 챕터였던 것 같아요. 죽은 다음의 애도에 대해 좀더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습니다.(어디선가 최현숙 선생이 자신의 장례희망이 공영장례라는 말을 했다는 걸 보았을 때 확 와닿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뒤늦게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지는군요.)
사족: 장례지도사가 된 박재익 선생이 이소선 어머니와 김용균을 염했다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기린
2026-01-28 11:42
1)화장기사 이해루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직업을 선택하는 소신에서 출발해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깨우치고 성장하며 현재의 자신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언어에 힘이 있었다. 경험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해 낸 결과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마음 속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인터뷰어의 능력이 놀라웠다. 이해루가 경험에서 터득한 언어를 골라 적어보았다.
157쪽일을 시작했을 땐, 고인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라든가, 남들이 하기 꺼리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취해 있을 때도 있었어요. 장갑도 안 끼고 염습하고 그랬어요. 나는 시신을 더러운 걸로 취급하지 않을 거야, 이런 마음으로. 그러다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머니 시신을 입관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때의 나와 같다면, 나는 싫다. 내 어머니의 죽음과 무관하게 자기감정에 취해 있는 거잖아요.그 이후로는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해요. 실수 없이 깔끔하게만. 담백하게 일하려고 노력하죠. 좀 사무적인 느낌으로 일하는 게 차라리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160쪽저는 장례의 방식을 주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례에 대해 잘 모르고, 다 상조를 써야 하는 줄 알잖아요. 상조를 써서 맡겨버리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거 같아요163쪽장례식장을 짓고 싶어요. 한 번에 한 집만 들어오는. 지금의 장례식장들처럼 여러 상주가 몰리지 않고 하루에 한 상주씩만 장례를 치르는 곳이요.
2) 이해루의 인터뷰이후 점점 구체화된 작가의 질문도 기억에 남는다. 장례에 ‘전문가’가 필요한가?(230)그리고 작가는 이 질문을 밀고 나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32쪽흔히 생각하듯, 도시는 단순히 시골의 반대말이 아니다. 근대 이후 형성된 도시는 ‘시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다. 시장은 공간이 아니다. 모든 존재가 사고 팔리는 상품이 되는 세계의 작동 원리이고, 이곳에서는 인간마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 장례가 상업화 되고 있다는 말은 단순히 장례가 돈이 되는 사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죽음을 향한 우리의 감각과 정동이 시장에 들어섰다. 아니, 시장에 갇혔다.
3) 책을 계속 읽어가면서 점점 자신의 죽음에 걸맞는 장례식을 상상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생각이 올라왔다. 죽은 다음의 일은 남은 사람들에게 맡기겠다는 담백하게 남겨두는 것은 어떨까. 그러다 공양장례 활동가의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었다.
283쪽우리가 살아오며 지닌 다양한 정체성이 유지되고 인정되고 지켜지는 게 존엄인 거고. 특정한 시선이나 외면으로부터 상대의 고유함을 지켜주는 과정도 존엄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사후에도 지켜져야 존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과 죽은 이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에요.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 애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나와 맺어온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싶을 텐데. 부고가 알려지지 않으면 관계가 전환될 계기를 끊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자신의 장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은, 그동안 자신이 맺어온 관계들을 헤아려보는 시간이며, 죽음이라는 과정이 그간의 관계를 전환 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죽음과 관련한 의례를 헤아려보는 일이 다시 삶을 환기시킨다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4) 그렇게 생각이 흘러가다 마지막에 이르니 이런 문장에 마음이 꽂혔다.
375쪽나는 내 죽음마저 선택하고 결정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그런 혼자 알아서, 어느 날 언제 갈지를 정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살아갈수록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어온 토대와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장례는 우리가 생전 만들어온 유대와 관계, 정치와 가치관을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서 만들어온 것들을 살펴 이별할 준비를 하고 싶다. 그 준비를 완수하고 싶다.
:<죽은, 다음>을 읽고 나서 장례식을 치르는데 연결된 수많은 노동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면서, 죽음에 관한 생각이 조금 더 깊어지는 기회이기도 했다.
문탁
12:14
뒷부분은 다른 분들이 많이 메모를 달 것 같아서 나는 4장 발인 중에서 집중적으로 질문할게요.키워드는 전통과 변화 혹은 형식과 내용 혹은 터부와 애도 등이에요. (다 비슷한 이야기임^^)
1. 이장
-얼마 전에 <무덤의 미래>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11062207005거기서 나는 “이번의 이장과 합장은 사후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해드린다는 애틋한 정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간 상당히 바뀐 장묘문화의 변화, 즉 ‘간소하고 관리하기 편하게’가 반영된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장묘업체 운영자 최현 역시 “산 사람들이 저희 편하자고 하는 거죠”라는 말을 하면서 산소를 관리하기 어려우면 차라리 묵히지, 자기들 맘 편하자고 묘를 파지 말라고 한다.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진짜 그 말이 맞나? 아니지 않을까?
2. 명당
-45년 전의 아버지 매장묘는 모란공원 산 꼭대기여서, 이장업체 사람들은 지게에 삽 등과 뼈를 수습할 작은 나무상자를 지고 걸어서 올라갔다. 그리고 혹시 물이 차고 육탈이 안되었을 수도 있다고, 그걸 대비해서 커다란 비닐도 함께 가지고 갔다. (물이 흐를 수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45년이 지나도 육탈이 안되었으면 어떡하지?-그런데 땅을 파다보니 관이 봉분 아래에 있지 않고 앞쪽으로 밀려가 있었다. 무슨 지질학적 판의 이동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이번에 책을 통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역마다 토양이 다르고 지관들은 “흙의 밀도만 보고도 개장해야 할 무덤의 시신이 어디까지 쓸려 내려가 있는지를 짐작한다”) 그래서 그런건지, 원래 그런건지, 이장업체 사람들은 묘를 판 후후 관을 꺼내 유골을 수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관이 나오면 곡갱이로 관을 쪼개고, 그 안의 뼈만 수습했다. 나는 너무 너무 이상했지만, 관을 꺼내기 위해서는 땅을 훨씬 더 엄청 파야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파묘가 아니라 관을 곡갱이로 쪼개는 그 행위가 망자에 대한 어떤 존중도 경외감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좀 슬펐다.-마지막으로 관 속에서 나온 유골은 다행히 모두 육탈되었다. 그런데 ‘흑골(黑骨)’이었다. 이장업체 사람들은 습기가 많으면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 묘는 당시 아버지 친구들이 지관까지 모시고 가서 찾은 자리지만, 남향이 아니라 북향이어서 당연히 습기가 많았을 것이다..좀 놀라긴 했지만, 오히려 검은색이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었다.
3. 터부와 수의
-연구소에서도 수의 만들기 워크숍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꼭 전통수의여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스몰웨딩에서 평상복을 입고 결혼하는 것처럼 수의도 평상복 중 하나를 채택하든지, 아니면 살아있을 때 삼베가 아닌 형식으로 각자가 원하는 수의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80년간 수의를 만들었던 한상길의 며느리 임미숙은 죽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몸에 지니는 유일한 수의를 제작하는 일은 “마음이 쉬우면 안되구” “산 사람이 입는 것보다 더 엄격하게” “다양한 금지를 고려하며” “윤달/윤년에 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요즘 같은 시기에 금기를 지키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모든 전통적인 금기는 다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임미숙씨가 이야기하는 “간결하게, 그렇지만 정성들여”는 어떻게 가능한가?
4. 애도와 직업 – 장례지도사
-책에도 나오지만 영화 <굿바이>에서 주인공 장례지도사는 실직 후 얼떨결에 그 직업을 갖게 되고 친구와 아내에게 “할 일이 그것밖에 없냐”고 비난을 받지만, 사수와 함께 시체를 염하는 일을 하면서 죽음에 대해 사유하고, 진정한 애도의 마음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책의 화장기사 이해루는 처음엔 자신을 장례(=애도)의 관장자로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물러서 있는 직업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선택한 직업이어서 그런지, 이해루의 직업으로서의 장례지도사는 마치 학전의 김민기같은 ‘뒷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직업으로서의 장례지도사가 모두 이해루같은 ‘뒷 것’이 될 수 있을까?-같은 이야기이지만 요즘 장례지도사 과정이 각 전문대학에 많이 생긴다. 청년실업이 극에 달한 시대에 장례지도사는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지닌 안정적 직업으로 매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앞서 가는 걱정. 매뉴얼만 익히는 장례지도사가 양산되는 것은 혹시 아닐까?
5. 염
-마지막으로 모두가 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지… 그런데 왜 나는 어머니 염을 내가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상조업체에서 이걸 허락할까,라는 생각도 함께. 하지만 이게 법적인 문제나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상조업체와의 관계의 문제라면,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듬
서해
15:08
<죽은 다음>과 관련한 저자의 인터뷰와 서문요약그리고 함께 이야기해볼만한 주제를 책내용에서 발췌해보았습니다.
2026년-2월-포럼_죽은다음_세미나-질문.hwp(165.5 KB)
김은영
2026-01-28 15:30
죽음 이후의 과정들을 아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를 생각하며 내내 읽었다. 읽기가 쉬운 건 아니지만, 이 분의 글쓰기는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역동적이고, 밀도가 있지만 무겁지는 않다. 대체 어떤 분일까, 생각하며 읽어나갔다.
얼마 전 어머니의 뇌에 문제가 생겨 갑자기 병원으로 호출된 일이 있은 후, 요양보호시설에 대해 온갖 정보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대처방법을 공유하는 블로그와 이웃을 맺는 것의 연장선으로, 이 책을 읽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의 삶과 죽음의 문제로 읽혀졌고, 나의 죽음과 삶이 나의 것이 아니게 되는 많은 일들에 무지한 채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면서 복잡하고 흥미진진해졌다.
특히 무연고자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비혼인 나의 경우에도 유일한 형제인 동생이 나보다 일찍 죽을 경우 그리고 나의 시신을 관리할 자격을 가질 사람이 법적으로 마땅치 않을 경우, 무연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죽음까지도 사회적, 법적 체계라는 것이 확연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죽음 이후에도 정상가족의 범위로만 죽음과 관련된 절차와 애도를 허용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한다.
노을
2026-01-28 17:07
들어가며 – 없음의 노동
상조가 상조업이 되면서 편의와 편리의 외피를 쓴 장례식장에서 저자는 장례식장의 감정노동, 돌봄노동에 대해서 말하고, 계급과 성을 중심에 된 정상성으로부터 빗겨나고 소외된 장례식에 집중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죽음은 삶을 각성시킨다. 왜냐하면 죽음을 둘러싼 일은 마음을 쓰는 일, 마음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의를 짓는 일, 상여를 메는 일, 노래를 부르고, 묘를 쓰고 화장을 하는 일 모두 죽음과 삶을 다시 음미하게 만든다.
->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이미 계급과 성차별과 정상가족에 대한 환영이 강력하게 드리워져 있기에 죽음 이후의 장례 과정에서도 다를 바 없이 낯설지 않고 유별나지 않은? ‘관례’와 ‘정상성’의 기준으로 장례를 치루게 된다. 나 역시 아버지 장례를 치루면서 ‘제가 장녀인데, 왜 묻지도 않고 남동생을 상주를 지명하시죠?’라고 묻지 않았고, 상조에서 진행하는 목록들에서 해야한다고 하는 상품의 A,B,C를 보고 적절하게 고르는 일들을 하며, 장례식? 장례 산업? ‘이거 맞나’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협동조합의 장례식, 작은 장례식에 관심이 가기는 했는데, 저자는 말씀하셨듯이 장례는 내가 주관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 내가 속한 사회와 가족/이웃들의 문화가 반영된다는 점에서 나는 나의 죽음, 장례식을 생각하며 무엇을 해보면 좋을까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장례’라니 너무 유별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동시에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저 잠깐 있다가 다른 물질로 분해되어 어딘가로 가는 삶과 죽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잠깐 애도할 수 있는 정도라면 어떨런지. 자연에게도 사람에게도 너무 부담주는 방식이 아니면 좋겠다(330)는 무지개정류장지안의 말을 되새긴다면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나의 경우 형제, 자매 혹은 엄마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에 대한 불편감이 생기는 거다. 그런 점에서 매해 유언장을 쓰는 일에 대해 언급한 언니네 네트워크의 기획의 일부가 눈에 들어오기는 했다. 매해 쓴 유언장을 가족들에게 남겨 볼까?규범화된 삶의 정형, 그에 따른 편견과 소외(자본주의적)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 무연고 장례에 대한 법적, 문화적 탈바꿈이 절실히 필요하단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3장 의전관리사가 되다저자가 의전 관리사 팀장들에게 인터뷰를 했다. 15년차 경력직들에게도 어려운 질문은 자신의 장례에 대한 것이었다. 무빈소에 대한 이야기, 깨끗하게 몸을 닦고,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고 떠나고 싶다는 말, 가족장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을 위한 추모와 애도에는 보통 응당하고 있는 의전 절차들과 다른 자신에게 맞는 의전과 추모, 애도에 대한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그런 마음으로 죽은 이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고, 마른 입술에 자기 립스틱을 꺼내 발라주겠구나. 감정이 깃든 돌봄 노동은 결코 ‘바닥의 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전 결정의 과정에서 의전 관리사와 상주 간 고인을 어떻게 추모할지 의전 방식을 둔 사전 질문과 대화가 더 촘촘하게 이뤄져야하지 않을까, 아직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죽음 이전에 생각해보고 나눠볼 주제이지 않을까. 나의 몫만은 아닌 각자의 추모와 애도의 의미 그리고 방식에 대해 이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계속 나누고, 실천할 주제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4장 발인수의. 어떠한 전통을 따르든 틀린 것은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를 이어 삼베 수의를 보통사람들의 기준으로 단호하게 만들어온 임미숙씨가 자신은 정갈한 수의를 입고 싶다 한 말이 인상적이다. 번잡스럽지 않은 생의 마지막을 살기 위해, 번잡스럽지 않은 수의를 살아생전에 미리 짓는 마음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과 삶을 잘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정갈하게 수의를 준비하는 마음이 전통보다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각 개인의 전통과 방식에 대해서 오히려 생각해보게 되는 장이었다.
위로. 당사자의 죽음과 무관하게 자기 감정에 취해 하는 일과 달리, 실수 없이 깔끔하게 담백하게 일하려고 노력한다는 의전사들이 말에 공감이 되었다. 그렇게 일하는 게 차라리 상대방에게 위로가 된다는 생각은 오랜 돌봄의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배려이자 위로처럼 느껴졌다.
죽음이라는 ‘무지’의 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장례 절차를 밟고, 단지 기본적인 것이라 제시된 항목들에 줄줄이 서명하고 결정, 결제하는 것이 죽음 이후의 절차들이다. 나의 개인적 감정과 맞닿아 있는 일에 어떤 장례를 치를 것인지를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단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화장장 이해루씨의 꿈은 한 번에 한 집만 들어오는 장례식장을 짓는 것이라 했다. 온전히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공간. 이해루씨가 일터에서 담담하고도 사무적 태도로 만들어 내는 정동이 가진 위로와 애도가 마음에 와닿았다.
인생의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내 안의 본연한 나를 상실하는 일이다. (<인생수업>인용) 이해루씨는 화장 일을 하면서 천천히 그 사실을 자각한 후에야 울수 있었다.자기 답게 살고, 자기 답게 죽는 일이어야 조금은 덜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먼불빛
2026-01-28 18:55
**타인의 죽음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욱 절절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죽은 다음’은 산 자가 아닌 내가 생각할 일이 아니지 않을까? 죽을 사람이 어디까지 내 죽음 이후를 설계하고 그것에 대해 사별자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지, 시장화로 얼룩진 장례를 보면 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리송했는데, 화장기사 이해루 부분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죽은 다음 또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존엄이 달린 문제라는 걸. 고인과 사별자 모두가 기획자가 되는 장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 책을 읽으니 올해는 나의 엔딩플랜의 초안을 엉성하게나마 만들어볼 수 있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죽음이 있는 삶에 한 발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음. 그런데 아직도 나는 가족주의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음. 그것도 직계 비속. 물론 가장 중요한 관계이긴 하지만, 자꾸만 딸을 대상으로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도를 펼쳐서 더 다양하게 엔딩플랜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생각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