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편적 돌봄을 질문하다
2020년에 발간된 『돌봄선언』(더 케어 켈렉티브 지음)은 펜데믹 당시 전 지구적으로 드러난 돌봄 체계의 허술함을 바로 잡으려고 쓴 책이다. 책에서는 “줄어든 공공 자원, 사람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문화, 개개인에 집중하도록 하는 사회⸱정치적 분위기”(책, 36쪽)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 결과 세상에는 배척과 혐오가 팽배해지면서 공동체의 결속은 급속히 약화되고, 돌봄은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 축소되었다. 선언에서는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돌봄을 재 개념화하여 ‘보편적 돌봄’이라는 모델을 내세운다. “보편적 돌봄이란 모든 돌봄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우리의 가정에서 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 되는 것을 의미한다.”(책, 41쪽) 이 중에도 국가는 지속가능한 돌봄 체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와 관련 우리 정부에서도 돌봄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여러 법 제도를 마련하고 시행을 앞두고 있다.
우선 내년 3월 전국에 통합돌봄지원법이 시행될 예정이다. 이 법은 노인·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집과 동네에서 필요한 의료·요양·일상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시행이 반년도 남지 않은 현재 준비가 미흡해서 제대로 시행될 수 있을지 염려되고 있다. 이 법에는 의료진이 환자의 집으로 직접 방문해서 진료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방문 진료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의원은 2.8%에 불과하다. 관련 비용이 수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사업을 진행할수록 적자가 쌓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나이듦 아카이빙 12월호 참조) 2026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될 예정인 간병비 급여화 정책도 세부적인 계획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두 법안 모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돌봄 선언』에서 접한 ‘보편적 돌봄’의 가치는 충분히 동의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더구나 정부의 발표와 비판 등을 접하다보면 점점 더 회의적이 되었다. 제도의 시행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기관들의 입장 차이를 좁힐 수 있을까, 예산을 늘리고 지불 체계를 정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질문이 늘어나는 와중에 인류학자 서보경이 쓴 『돌봄이 이끄는 자리』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태국 반팻 병원의 사례를 만나게 되었다.
2. 누구나 언제나 무조건 돌본다
반팻 병원은 태국의 치앙마이주 치앙마이 교외에 있는 공공병원이다. 1980년대 말 나무로 지어진 작은 보건소였던 곳이, 2002년 전국적으로 시행된 보편적 건강보험으로 공공 의료시스템을 갖춘 병원으로 탈바꿈했다. 저자가 현장 연구를 했던 2012년경에는 60개 병상규모에 응급실과 3대의 구급차, 신생아 집중치료실을 갖추고 있었다. 위의 책에서는 이 병원의 공공 의료를 통해 돌봄의 또 다른 가치를 재조명했다.
첫째, 반팻 병원에서는 돈이 없다고 치료를 거부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국의 공공 병원은 행정단위별로 최소 한 개의 지역 거점 병원을 운영하는 체계다. 저자가 보았을 때 병원의 직원들은 환자의 보험 상태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병동의 주임 간호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들이 다 나아서 집에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계속 돌보는 수밖에 없죠.”(책, 75쪽)라고 대답했다. 교통사고로 입원한 소년 조는 그의 가족 모두가 미등록 상태여서 보험이 없지만, 스무날이 넘게 입원해서 회복 중이었다. 소년의 엄마는 병원비가 얼마인지 알지 못했고, 병원에서도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밍 할아버지는 길거리 노숙자로 병원에 실려 왔다. 할아버지는 실려 올 당시의 염증 상태는 다 나았고 병원에서는 위탁 시설을 알아보고 있지만 마땅치 않아서 여전히 입원중이다. 계속 돌본다는 말이 완벽한 돌봄을 제공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기본적인 형태의 보살핌을 계속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현실적인 선택은 없었다. 그래서 병원은 만성적자 상태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돌보는 의무를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둘째, 반팻 병원에서는 치료를 위해 찾아온 환자라면 누구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 오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근처 농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미얀마에서 이주한 등록 이주민과 미등록 이주민, 태국 국적이 없는 소수 종족민들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가 인터뷰한 병원장은 공공 병원에서 의료 서비스는 상품이 아니라 권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의 최우선 과제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지역사회를 돌보는 것이다. 그는 지역 공공병원들에 요청해 기금을 모아 신생아 집중치료실을 만들기도 했다. 치앙마이 주 전체에서 가장 최신 설비를 갖춘 덕분에 상급병원에서 보낸 신생아들도 돌볼 수 있다. 특정 국가의 구성원 자격을 넘어 그 지역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돌보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셋째, 태국의 모든 의대생들은 정부로부터 학비보조를 받는 대신 3년간 지방에서 의무 근무를 해야 한다. 태국의 공공 병원 체계는 특히 의료기관이 부족한 농어촌지역을 최우선으로 두고 설계되었으며, 지역에서 일할 의료진을 충분히 양성해야만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의대생은 재학 중 최소 3-6개월을 공공 병원에서 실습을 하고, 커리큘럼에 내과학이나 외과학, 산부인과학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과정으로 편성되어 있다. 1994년부터는 의대 입시에서 의사가 부족한 지역 출신을 우선 선발하고 장학금을 지급하되, 출신 지역에서 최소 12년간 근무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어떤 이들은 높은 급여를 지급하는 민간 병원으로 가기 위해 벌금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공공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국가를 대신하여 돌봄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태국은 1인당 GDP가 한국의 4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 나라다. 그럼에도 공공의료의 현장에서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이들은 부족한 예산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연결된 사람이라면 아무 조건 없이 치료하면서 돌보는 일을 제일 우선시했다. 재정 적자를 이유로 지방의 공공의료원을 거리낌 없이 폐쇄(2013년 진주의료원)하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태국의 공공 의료 현장에서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일이기도 했다.
3. 기다리고 되갚는다
태국은 공공 병원 체계만으로 보편적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위해서 의료 제공자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누구나 공공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필요보다는 의사의 지시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돈이 있으면 원하는 치료를 위해 민간 병원으로 가면 된다. 현재 태국민의 10% 정도는 그럴 수 있는 반면, 90%의 사람들은 어쨌거나 공공 병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반팻 병원에 가는 사람들에게 기다림은 일상이다. 말기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르언은 상급 병원에서 투석을 받기 위해 전원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지만, 불만을 털어놓거나 병원에 항의하지도 않았다. 병원이 상급 병원 전문의와 협상할 힘이 없기도 했다. 르언의 기다림이 한편으로는 일방적으로 병원에 종속된 관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병원이 그를 돌볼 의무를 계속해서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상호 연결된 관계의 조건 속에서 고통스런 기다림 끝에 그는 마침내 복막투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들에게 병원의 무조건적 돌봄은 되갚을 수 없는 선물을 받아야 하는 불편함을 수반하기도 했다. 미얀마 샨 지역에서 이주해 온 피이는 의료보험이 없는 임시 체류자 신분으로 세 살짜리 아들을 이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는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병원으로 와서 아내와 함께 아들을 보살폈다. 공사장에서 번 돈은 치료비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는 힘이 닿는 한 그 빚을 갚아나가고 있었다. 예전에도 병원비를 내지 못했던 적이 있어서 모른 척 할 수도 있었다. 피이는 “그렇게 살라고 배우지 않았거든요. 돈이 있으면 빚을 갚아야 맞는 거죠.” 라고 했다. 저자는 피이의 행위가 “자신의 아들을 살려낸 돌봄의 의무망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말겠다는 업에 대한 윤리적 감각”(책, 121쪽)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일방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가능한 한 되갚는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불편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기도 했다.
반팻 병원에서는 만성적인 적자를 아랑곳 하지 않고 국적 불문하고 모두에게 보편적인 의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천에는 태국의 정치 조건과 지역적 풍토, 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교육환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단순히 수익 구조를 개편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잡성이었다. 병원에서는 그 얽힘을 토대로 “부정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사람”(위의 책, 307쪽)들을 조건 없이 돌보았다. 서보경은 이러한 실천이 “기존의 배제 논리를 넘어서서 한 지역 내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확장된 의미의 책임감을 지닐 수 있다는 정치적 잠재력”을 상기시켰다고 밝혔다. 나에게도 실재하는 보편적 돌봄의 연결망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였다.
4. 돌봄의 얽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십여 년간 고향에서 혼자 사셨던 어머니의 돌봄을 도맡았다. 주로 병원에 모시고 가거나 일상에서 필요한 소소한 것들을 도와드리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전화가 오면 일단 짜증부터 일었다. 또 어디가 불편하신가. 일어난 짜증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전해졌고, 결과적으로 어머니를 많이 서운하게 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돌봄을 나에게만 전적으로 맡겨놓고 신경 쓰지 않는 형제들에게 일어난 짜증이었다. 그나마도 올해 어머니가 예기치 않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끝나고 말았다.
올해 돌봄을 주제로 삼아 책을 읽고 리뷰를 하면서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는 도저히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방대하고 또 복잡한 세계를 만났다. 관련 주제를 아카이빙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언론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개인이나 가족에 치중되었던 돌봄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려는 변화가 눈에 띄기도 했다. 그럼에도 허술한 정책이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접하다보면,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와중에 태국의 반팻 병원의 공공의료 사례를 알게 되었다. 돌봄은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역설을 품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돌봄이 어느 쪽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책임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동시에 남의 고통에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애쓰기도 하는 모순을 품은 존재이다. 보편적인 돌봄과 관련한 공공 의료 정책도 이렇게 모순에 얽힌 관계를 토대로 마련되어야 한다.
시사IN 952호(2025. 12. 16 발간)에 전남 무주군 부남면 장안보건진료소의 기사가 실렸다. 박도순 소장은 1989년부터 보건진료소 일을 시작해 현재 이 진료소에 근무 중이며 2026년 6월 정년을 앞두고 있다. 매일 문을 열면 관내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모셔온 어르신들을 진료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하지 말라’는 말보다는 다정한 위로를 전하려고 애쓴다. 오후에는 집밖으로 운신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을 찾아가는 방문 진료도 한다. 기본적인 건강 체크와 안부를 살피고 일상의 하소연에 맞장구도 치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쌓아간다. 이러한 관계는 신뢰로 이어져 웬만한 통증은 멀리 있는 병원보다 가까이 있는 진료소로 향하게 하고, 집에서도 늙어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신이 해온 역할과 노력이 자신의 세대에 끊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라고 했다. 병원은커녕 약국조차 없는 지역에서 의사를 대신하여 지역민들을 돌보는 간호사, 대부분이 무용하다고 여기는 제도였지만 사람이 그것을 묵묵히 수행해냄으로써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보살피는 돌봄이 피어났다.
돌봄이 이끄는 자리는 국가의 일방적인 제도와 관리 체계나 개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련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만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돌봄은 그 취약성을 기반으로 “서로가 서로의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는 열린 합의”(책, 122쪽)의 자리에서 펼쳐질 수 있다. 이러한 합의는 서로의 필요를 끈질기게 알리는 분투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는 선의와 주어진 의무에 대한 책임이 얽혀 이끌고 이끌리는 돌봄의 자리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으면서 보편적 돌봄으로 나아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