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첫머리는 아주 유명하다. 이 소설은 고등법원 판사인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받은 동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가로 시작한다. 그의 부고를 듣자마자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과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부고를 들은 동료들의 생각을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그려내었다. 그의 동료들은 각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 일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계산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은 걸. 어쨌든 나는 아니잖아.>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이반 일리치와 아주 가까웠던 이른바 친구라는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이제 예절이라는 이름의 대단히 지겨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추도식에 참석하고 미망인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상기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부고란을 통해 뉴스를 통해 매일같이 죽음을 접하지만, 그 죽음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럴 때 죽음은 사회적 현상이고 통계적 사실에 지나지 않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범속한 사건일 뿐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누구나 언젠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는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바로 이런 태도를 ‘죽음’의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3인칭적 관점이라고 구분하고,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일상성이라고 표현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비본래적 삶은 일상에 빠져 있는 세인들,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현재의 일에 몰두해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그들에게는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질기게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다.(『존재와 시간』)” 그들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곧 괜찮아져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상의 무사태평이 방해되거나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타인의 죽음에서 속수무책까지는 아니어도 일종의 사회적 언짢음을 보게 된다.”(『존재와 시간』) 이반 일리치의 절친한 동료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문상을 가서 죽어 있는 이반 일리치를 보고, 그의 부인에게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사흘간의 단말마적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역시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사흘 밤낮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이건 언제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내게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일순간 소름이 쭉 끼쳤다. 그러나 그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일어나서도 안 되며 일어날 수도 없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타인의 죽음을 통해 느끼는 언짢음이야말로 비본래적 삶을 자각하고 자신의 실존론적 본질을 성찰할 기회다. 그러나 일상성에 매몰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비겁한 두려움, 음울한 세계 도피”로 생각하고, 삶에서 죽음을 몰아냄으로써 다시 일상의 안정감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그 불안에 직면하는 것은 어떨 때 가능해지는 것일까?
레프 톨스토이
죽음 앞에 선 인간, 이반 일리치
이반 일리치는 집안에서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교양 넘치고 품위 있었으며 사회적 처세도 뛰어나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다. 만인이 연모하는 여인과 결혼도 했다. 아내와 자식들과의 관계가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에 몰두함으로써 성취감을 느끼고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었다. 승진하여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집을 꾸미다 우연한 사고로 옆구리를 다친 후 그는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린다. 병석에 누워 이반 일리치는 논리학 시간에 배운 삼단논법을 떠올렸다.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너의 죽음이 현재형이거나 과거형인 것과 달리 나의 죽음은 언제나 미래시제로만 존재한다. 죽음은 그토록 멀리 있다. 이반 일리치 역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 사실에 익숙해질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생각한다.
“그렇다. 카이사르는 분명히 필멸의 인간이니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 바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이반 일리치에게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찾아와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마주한다. 죽음과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그는 할 수 있는 갖은 노력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죽음은 모든 벽을 뚫으며 침투해 들어와 그 무엇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것 같았다.” 죽음 앞에 선 인간, 이반 일리치는 육체적 고통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의 고통은 세상이 모두 거짓으로 가득하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 역시 거짓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을 본다.
“그가 보기에 주변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무섭고 끔찍한 의식을 그저 어쩌다가 발생한 불쾌한 사건, 품위가 떨어지는 일 정도로 격하시켰다. 그가 평생토록 지키려 애썼던 ‘품위’라는 게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가엾게 여기고 보살펴 주기를,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법원 동료가 찾아오면 이반 일리치 그 자신 역시 근엄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를 맞았고, 재판의 이런저런 사항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고집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외면하는 세상의 거짓에 치를 떨었지만, 그 자신 역시 그 거짓의 놀이를 구성하는 일부로 살았다.
자신의 존재를 무화(無化)시키는 죽음을 긍정할 수 없었던 이반 일리치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일을 겪는 것일까, 항의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다 그는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침묵의 대화 속에서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이미 알지만 아직 모르고, 알면서도 새삼 깨닫고, 들어와 있으면서도 불쑥 찾아오는 메시지”(장켈레비치,『죽음』)였다. 그 메시지 앞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는가를 되새기며 그 이상한 생각을 바로 떨쳐버렸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자신이 죽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부조리한 죽음을 자신에게 적용하려면, “아찔한 도약“(『죽음』)이 필요하다. 죽음의 확실성을 자신의 일로 실감하는 것은 그토록 급격한 전환, 하나의 심연을 건너뛰는 실존적 전환을 요청한다. 그 전환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죽기 전 사흘 동안 이반 일리치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이반 일리치에게 그 기간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사흘이었다. 그는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고통은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아니라 구멍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데서 왔다. 그를 방해하고 있던 것은 “자기의 삶이 좋은 것이었다는 생각이었다. 지난 삶에 대한 정당화가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어 그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떤 힘에 의해 그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저쪽에서 무언가 환한 빛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로잡아야 하는 <그것>이 뭐지’, 질문하는 그때, 그는 아들이 그에게 다가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고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죽어가고 있는 자신과 달리 건강하고 생의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심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반 일리치에게 연민의 마음이 솟아났다. 지금까지 살고 싶다는 욕망, 남들을 향한 복수와 원한의 감정, 억울하다는 마음 등 그를 괴롭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고 아내와 자식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고,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마침내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무화의 절망’에서 벗어났다.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통증은?>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통증은 어디로 갔지? 이봐, 너, 어디로 간거야? 그는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에 있었군, 그래, 뭐, 거기 있으라고 해.>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로 갔지?> 그는 그동안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는 두 시간이나 더 사경을 헤매는 것으로 보였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숨을 멈추었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무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죽음』)을 맞이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한다면 죽음 앞에서 본래적 실존을 회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장켈레비치 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죽음은 삶의 장애물이면서 삶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 삶의 ‘유한성’은 신비가 된다. 죽음은 존재를 잃는 것인데, 그 잃음이 바로 존재를 구한다는 역설! 그리하여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톨스토이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않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톨스토이의 원숙한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이데거와 장켈레비치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인용한 것 역시 톨스토이의 실존론적 문제의식과 통찰에 깊이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한편으로는 너무나 멀리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까이 있다. “이토록 멀고 이토록 가까운 죽음!”(『죽음』) 우리도 삶과 죽음의 시간을 이반 일리치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라고 말한 것 같은 깨달음을 얻는 기회로 바꿀 수 있을까?
= 병과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
= 죽음이 아직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 문학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궁구해 보고 싶은 이 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