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고집을 떠올리다
쉰다섯,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대학 졸업장을 받았고, 독서논술 지도사, 미술, 문학, 심리상담 자격증과 전통 요리 자격증, MBTI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예순둘, 취업준비생이 되어 일자리센터를 찾았다. 두 장 빼곡하게 적힌 이력과 온갖 자격증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간의 이력을 모두 지우고 ‘중학교 졸업’ 한 줄을 마감했을 때야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실버 취업준비생이 된 이순자 작가는 이후 취업의 경험을 <실버 취준생의 분투기>라는 수기로 써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분에 당선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내가 이 수기를 처음 읽은 것은 이 작가의 유고 산문집에서였다. 당선이 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두 번째 심장판막 수술을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도 글은 남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되던 끝에 유고집까지 나왔다는 기사를 보았다. 작가의 문체는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병약한 몸에 청각장애까지 있어서 난관이 많았던 삶에서도 늘 희망을 잃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헤쳐나갔던 강단이 느껴졌다. 황혼 이혼 이후 경제적 독립을 하기 위한 취업이었다.
3년간의 약국 일을 정리할 즈음 새로운 일자리에 도움이 될까 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1년 반의 기간이 걸리는 과정에 올 8월에 160시간의 실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역아동센터에 실습 자리를 구해서 이십일 가량 매일 아침 분당선 모란역에서 내려 센터까지 걸어 다녔다. 아침 시간에 모란역 음식점 거리 주변에서 쓰레기를 줍는 어르신분들이 있었고, 센터에서는 매일 오전 공간을 청소하러 오는 어르신들도 뵙게 되었다.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하는 일자리라고 했다. 그분들을 보면서 예순이 넘어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 글이 다시 떠올랐다.
실버 취준생의 분투기
일자리센터에서 처음 소개해준 일자리는 수건을 세탁하는 공장이었다.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던 작가에게 그 일은 너무 고되었다. 결국 닷새 만에 포기하고 그간 일한 임금도 못 받았다. 다음은 백화점 청소부 자리. 사방에 걸린 CCTV의 감시에 대걸레는 항상 앞으로 하고 바닥에 끌기라도 하면 당장 지적을 받았다. 유리 닦는 걸레로 소파를 닦았다고 짝꿍에게 혼나면서 일을 익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몸이 받쳐주지 못했다. 열흘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신규 입점하는 건물 청소를 소개받아 가보니 지하 7층에서 지상 4층까지 혼자 해내야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는 일이라고 항의했더니 대충하지 뭘 열심히 하냐고 오히려 짜증을 냈다. 이후로도 일자리센터는 계속 문자로 일자리를 주선했다. 그제야 의심이 들었다. “며칠씩 일하고 그만두는 노인 취업자를 쓰면 임금도 없이 일 시키고, 절세도 되고, 꿩 먹고 알 먹기 아닐까”(162) 취업률을 올리려는 일자리센터와 고령자 고용 보조금을 챙기려는 업체들의 잇속이 들어맞는 사이, 능력을 고려한 일자리가 주어질 턱이 없었다.
그 후 광고를 보고 찾아간 어린이집 주방 선생님, 부모들에게 배부하는 식단과는 전혀 다른 밥상을 차려야 했다. 상하기 직전인 쌀로 어떻게 밥을 하냐고 항의해도, 원장은 14개월 된 자기 아이에게 보란 듯이 먹이며 괜찮다고 우겼다. 일주일을 넘기고 나오면서 교육청에 신고라도 할까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같은 동네 사는데 껄끄러운 일 만드는게 부담스러웠다. 아기 돌봄도 했는데 아기의 외할머니 구박이 너무 자심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두어야 했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가 싶은 억울함에 이생을 저버리기로 했다. 술 힘을 빌어 집안의 약을 다 털어 넣었다가 이상한 예감이 든 친구가 와서 병원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다시 힘을 내어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고 요양보호사로 나섰다. 허리를 다쳐 요양등급을 받아놓고도 할아버지의 등쌀에 밭일을 쉬지 못하던 할머니, 2층에 사는 자식의 집을 올라가서 볼 수 없는 1층의 할머니, 어머니 몫으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가 필요해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지 않는 아들까지 천태만상의 삶이 그의 돌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급여가 더 좋다고 해서 하게 된 장애인활동지원사 일은 지원사를 제멋대로 부리려는 보호자의 횡포에 시달렸다. 호흡기 환자였던 할아버지는, 기계를 조작해 호흡에 이상증세를 일으켜가면서 가까이 온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경험에 몸과 마음이 견뎌내기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그나마 늦은 공부를 통해 글쓰기를 배우고, 글로 벼려낸 그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닿은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고단했던 이생을 마무리했다. 기초생활수급자도 되었으니 원 없이 글만 쓰면서 남은 인생을 살겠다던 결심을 남겨 두고.
일하고 싶고 일해야만 하는 노인들이 늘어난다
약국 일을 정리하고 나서 예전에 했던 독서 논술 일을 해볼까 했었다. 학원에 문의 전화를 했더니 내 나이를 듣고는, 요즘은 학부모들이 나이 든 선생님을 불편해한다고 단번에 거절했다. 기존의 경력이 더이상 쓸모가 없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쓸모를 찾는데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전체 고령층(55세-79세) 약 1600만 중 일하기 원하는 고령자는 약 1100만 명이었다. 10명 중 7명은 계속 일하고 싶다는 것이다. 모란의 길거리에서 센터에서 마주쳤던 청소하는 어르신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거기에 나의 미래 모습이 비춰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 이순자 작가의 수기는 60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의 거의 모든 일자리를 섭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력서 두 장을 채운 이력과 수많은 자격증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청소일이나 저임금으로 해결하려는 돌봄 노동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모란역 주변이나 센터에서 만난 어르신들도 한두 시간을 넘기지 않으니 용돈 벌이 이상은 아닐 것이다. 1인 가구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이들에게 지금의 환경은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면서 “고단한 삶의 끄트머리에서 나를 치유하는 시원한 은단향으로 피어나리라”는 기대를 품었던 작가였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작가의 고군분투가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일하고 싶고 일해야 하는 고령자로서 나의 처지를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당사자에게는 고단함을 치유해주었다면, 독자에게는 제 앞에 놓인 막막한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쓴 효과였다. 좋은 글이다.
나는 누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 몸이 아파도 뛰어간다. 몸도 마음도 아파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줄 게 없더라도 손 한 번 발 한 번 잡아보러 간다. 밤이 이슥해져 사위가 고요한 시간, 아픈 사람들은 내게 전화를 건다. 나는 창에 기대 전화를 받으며 나를 필요로 하는 이의 벽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해도 절대 전화를 먼저 끊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우리가 서로의 등에 기대고 있는 걸 아니까. 하나가 등을 떼면 벽이 무너지니까. 건강한 몸끼리 마주 안는 것은 기쁜 일이요, 아픈 몸을 껴안는 건강한 몸은 보기에 좋다. 아픈 몸이 아픈 몸을 껴안는 일은 서로의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건강할 때 아픈 몸을 껴안으려 하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가만있어도 누군가 살며시 기대온다면 반을 성공한 삶이요, 멀리 있으나 생각만 해도 누군가가 힘을 얻는 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 없어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든든한 벽이고 싶다.(143)
어머니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으로 주변 사람들의 긴장을 녹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마음 깊이 감춰놓은 삶의 이야기를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풀어놓곤 했습니다. 잘 듣지 못하시는데도 말이지요. 장애는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이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한계는 한 존재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이를 용기 있게 마주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상처마저 잘 녹이고 곰삭혀 사랑으로 내놓는다는 삶의 진실을요. (유고집에 딸에 쓴 서문 중에서)
노년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시도해 보기 전에 읽어보기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노년의 삶을 생각해 볼 때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그리울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