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네 집, 딸네 집
지금 사는 집을 지은 건 14년 전이다. 집을 지은 가장 큰 이유가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이미 은퇴도 하셨고 연세도 있으셔서 곧 우리와 살게 될 것이라고, 아니 내가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하는 엄마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해 조용한 전원주택을 선택했고, 설계도 아래층은 부모님을 위한 공간으로, 위층은 우리들 공간으로 만들었다. 두 분은 집을 지을 때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시고 아빠는 상량문까지 직접 붓글씨로 써주시더니, 막상 집이 다 완성되어 같이 살자고 하니 고개를 저으셨다. 3~4년을 조르다가 아직 두 분이 살만하시니까 그러시는 거라고, 아직 건강하셔서 그런 거니까 오히려 다행이라며 일단 우리 생각을 접었다.
우리집을 참 좋아하셨던 아빠는 가끔씩 집에 오시면 바깥 데크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시다가 주변 숲과 나무들을 돌아보시며 흐뭇한 표정을 짓곤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한 달 정도를 우리집에서 지내셨을 뿐이다. 같이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엄마 아빠는 우리집으로 오는 대신 당신들의 집을 지으셨다. 엄마네 집은 원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고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동네가 개발지구가 되면서 집이 수용되었고 대토를 받았는데 그 땅에 집을 지은 것이다. 힘들게 집을 왜 짓느냐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빠가 대장암 수술로 병원을 들락거릴 때였는데도 기어코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설계부터 집짓는 과정의 모든 의사결정을 엄마가 다 했고, 병원에서 폰뱅킹으로 비용을 지불해가며 그렇게 집을 지었다. 집이 완공되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그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에 종가집(?)을 완성해놓고 싶으셨고 엄마도 거기에 동의하셨던 것 같다. 그 집을 쉽게 떠날 수 없는 엄마 마음이 짐작이 가기도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혼자 지내게 되자 손녀가 할머니랑 같이 살겠다고 그 집으로 가서 1년을 같이 지냈고 그 후에는 손자가 또 1년을 함께 살았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밀하게 지냈던 아이들이 스스로 그런 마음을 내주니 참 고마웠다.
“엄마, 이제 혼자 있지 말고 우리집으로 가자. 응?”
“너네 집에 가면 일해야 할 거 아니야. 나 일 시키려고 그러지?”
엄마는 왜 이렇게 말을 하실까? 심통을 부리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집에 가기 싫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시나? 아니면 딸한테 신세지기 싫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시는 걸까? 아마도 엄마는 스스로 아직은 일을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어디를 가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딸네 집에 가서 편안하게 지낼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또 워낙 독립적인 엄마라 할 수만 있다면 혼자 살고 싶었을 것 같긴 하다. 나라도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살던 곳에서 살고 싶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나는 엄마 입장보다는 내가 편한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어느 날 남편이 온실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집 마당에 온실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화초 가꾸는 게 유일한 취미인 엄마는 마당이 넓지 않은 새 집 옥상에 마당을 만들었다. 옥상을 디자인해서 다닐 수 있는 길만 빼고 모두 깊고 넓은 커다란 화분(?)으로 만들고, 한쪽에는 온실도 지어놓았다. 이사할 때 옮긴 화분만도 트럭으로 몇 대 분이었고, 블루베리 같이 키가 너무 크지 않은 관목들도 많이 심어 가꾸고 있었다. 남편이 엄마를 모시고 올 방편으로 온실을 생각해낸 것이다. 우리집에 온실을 만든다고 하니 정말로 엄마가 관심을 보였다. 온실에 엄마 화분을 다 옮겨드리고 나자 엄마가 우리집으로 오셨다. 드디어 나는 엄마랑 함께 살게 되었다. 집 지은 지 10년 만이다.
엄마 생각, 딸 생각
우리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엄마가 당신 집에 가보자고 했다. 우편물을 챙기고 은행에도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다. 원할 때는 언제든지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한지라 꼼짝없이 다녀와야 했다. 당연히 우편물은 별로 중요한 게 없었고, 은행은 가까운 지점으로 가면 되는데 아마 그것들은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를 우리집으로 모시고 올 때 엄마네 집은 그대로 두고 왔다. 살림살이는 물론 냉장고도 정리하지 않았다. 그냥 필요한 물건 몇 가지만 챙겨서 온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고 그랬던 것이고, 엄마는 사위가 온실까지 지으면서 오라고 하니 잠시 있어볼 생각으로 오신 것일 수도 있다. 아마 언제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오고 가는 데만 3시간 반 이상 걸리는데 거의 한 달에 한번 이상 가게 되었다. 효율적인 면에서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때는 엄마 마음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냥 모시고 다녔다. 한편으로는 자주 엄마네 집에 가는 게 우리집에 적응하는데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6개월쯤 지나자 엄마네 집 가는 빈도가 점점 줄긴 했다.
엄마에게 어떻게 해드리면 좋을지, 무슨 음식을 해드리면 좋아하실지 매일매일 궁리했다. 엄마랑 같이 온실을 들락거리고 마음에 들 만한 화분도 가끔 사다 드렸다. 날이 좋으면 분당에 있는 공원에 나들이도 가고, 가끔은 좀 멀리 담양으로 경주로 남해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평소에 엄마가 좋아하시는 멍게비빔밥, 녹두닭죽, 전복밥도 하고, 신맛을 유난히 좋아하는 엄마라 새콤하게 만든 반찬들을 여러 가지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엄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도 곧 바닥이 났고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돌아다니는 것도 시큰둥했다.
엄마는 자신의 속내를 편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자신의 생각을 자식들에게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편이라 나는 엄마 속내를 알아내느라 애쓰지 않아도 됐었다. 생각해보니 엄마랑 소통이 잘 되었던 건 일상생활에 필요한 대화나 어떤 일에 대한 토론이었고, 감정적인 소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엄마와의 대화는 대부분 감정이나 느낌에 관한 것이라 이런 불편함이 느껴지게 된 듯했다. 생각지 못한 난제였다. 난 늘 엄마 속내를 살피느라 온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세상 쿨~한 모녀
결혼을 하고 시어머니와 3년 정도 함께 살았었다. 시어머니에게는 자식들이 전부였다. 기준은 항상 자식이었다. 그런가하면 막내아들인 남편에게는 시어머니가 절대적인 존재였다. 시어머니는 큰 아들이 있는데 막내와 살면 큰 아들 면이 안 설까봐 걱정하셨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설득했고 겨우 허락을 받았다. 신혼집도 시어머니가 지내실 방을 기준으로 구했다. 함께 살면서 보니 시어머니는 늘 자식들에게 무엇을 해 줄까 생각하고, 췌장암 수술 후 항암치료로 힘드신 데도 이것저것 만들어 자식들에게 보내시곤 했다. 남편은 늘 시어머니를 세심하게 살폈고 퇴근 후에는 시어머니 곁에서 함께 TV를 보며 매일 뉴스해설자를 자처했다. 시어머니는 한 달에 한번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그 일주일동안 남편은 몸무게가 2kg씩 빠지곤 했다. 시어머니는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지만 남편은 시어머니를 저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함께 TV를 보다 잠들었다. 그때 알았다. 다 자라서는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본 적이 없다는 것을.
시어머니와 남편을 보면서 엄마와 나의 관계가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모든 걸 자식 중심으로 하지도 않았고 우리 또한 엄마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는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을 감당했지만 자식들과는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학교 때도, 대학 때도 친구들은 엄마랑 내가 친구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엄마랑 내가 친밀하게 지낸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떨어져 지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엄마나 나나 성격이 그리 다정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살갑게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또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랑 다투고 화내고 화해하고 이런 것도 나는 별로 해본 기억이 없다. 엄마는 공부하라고 채근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필요한 건 엄마가 거의 다 해주었고 나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어쨌거나 쿨하고 세련된 모녀관계였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오빠나 남동생과 차별한다고 불평했었지만 나는 엄마가 오빠랑 나를 차별한다는 느낌도 거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집을 떠나 있었고 늘 엄마 대신 아빠가 나를 보러 다녀가셨지만 그때도 내가 차별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재수하는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훌쩍 올라갔을 때도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었다. 어차피 나는 식구들과 떨어져 있었고 그곳이 어디든 별 상관이 없기도 했다.
나는 자식이 없어서
함께 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파킨슨병인지 아닌지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의사의 진단과 뇌MRI 사진 결과로 파킨슨병 진단이 내려졌다. 좀 걱정스러웠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고 나이 들어 온 것이니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의사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인지검사도 함께 했는데 엄마는 경도인지장애로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다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는 자식이 없어서…” 헉! 자식이 없다고? 그럼 나는 뭐란 말인가? 솔직히 아직까지도 나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엄마랑 살면서 예민해져서 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별로 말을 많이 하지도 않는 엄마가 이런 말을 내뱉었을 때는 내면에 뭔가가 쌓여있어서 일 것이다. 이 말을 곱씹고 곱씹으며 내가 알던 엄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고등학생 딸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도 한 번도 안 와보던 엄마가 재수하는 아들은 직접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일도 예사롭지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집에 안 오려고 버틴 것도 아들네 집이 아니어서 였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나간 걸까?
기억이 왜곡되기도 한다지만 내 인생에서, 그리고 엄마 인생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제헌절 연휴인 그날 엄마네 집 거실. 남편과 나는 엄마 아빠를 모시고 두 돌 지난 딸과 함께 광릉수목원에 다녀와서 점심을 먹고 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았다. 친구부부와 놀러간 새언니였다. “안수 아빠가 물에 들어갔는데 안 나와요…” 멍해진 내게서 수화기를 가져간 아빠는 통화를 하다가 부정맥으로 쓰러질 뻔했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엄마 표정이나 반응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날로부터 1년간 우리는 엄마네 집을 떠날 수 없었다.
결혼 후부터 계속 엄마아빠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휴가도 보내고 있었지만, 오빠 사고 이후 부모님을 챙기는 것은 확실하게 내 몫이 되었다. 사실 오빠가 있을 때도 엄마아빠를 돌보는 일은 일찌감치 내 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빠는 대학 때부터 야학운동을 하더니 대안실업고등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느라 엄마아빠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는데 거의 5년 정도가 걸렸다. 그동안 사라진 엄마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기도 하고 쓰러진 아빠를 119로 태워가기도 하고… 모든 안테나는 엄마아빠를 향해 있었고 늘 불안했다. 어느 순간에는 차라리 내가 오빠 대신 사라졌으면 좀 나았을까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엄마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깊은 상실감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를 반성하면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하고 살다가 이번에 이때의 느낌이 나도 모르게 살아나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엄마에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지금껏 의무감과 책임감에 쩔어 살았는데, 그것으로 다가 아니었나 보다. 엄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엄마를 모신다는 게 뭘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엄마를 돌보고 있는 거지? 내 엄마고 엄마를 돌볼 사람은 나뿐이고 그러니까 당연히 해야지. 그래, 엄마가 원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나는 돌보는 사람, 엄마는 돌봄 받는 사람이라는 일방적 관계로. 관계는 늘 상호적인 것인데 엄마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독립적인 엄마는 우리집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왔는데 난 당시의 엄마 마음에 대해서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좋은 거니까’라고 합리화하면서 내가 판단해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모셔왔으면 그의 갈증을 달래줘야 하는데, 엄마의 갈증을 달래주겠다면서 물은 내가 마시는 격이랄까.
부모 봉양은 육신을 봉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봉양하는 것이라고 했던 <맹자>가 생각났다. 엄마가 좋아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 엄마의 일상을 불편 없이 해드리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느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는 상대적으로 무감했다. 사실 엄마와의 대화는 남편이 더 많이 하는 편이었다. 예전에 시어머니께 했던 것처럼 함께 TV뉴스를 보며 엄마에게 맞장구를 치고 이것저것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하고 또 해도 남편은 잘 들어주었다. 오빠 사고 이후 남편은 스스로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나보다 남편을 더 편하게 여겼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좀 자신이 없다. 엄마 생각이 어떤 건지 내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살면서 우리 가족을 가장 힘들게 했던 오빠의 부재.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고,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그 상처를 서로 감싸주며 애쓰고 살아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의 그 큰 상실감을 알 수도 없고 또 채워줄 수도 없다. 엄마가 오빠에게 했던 것들,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내가 그 빈 부분을 메워준다는 건, 내가 아무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어불성설이다. 다만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감당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무게가 아닐까 싶다. 30년 넘게 안고 살아온 그 상실감의 무게를 이제 엄마는 감당할 힘이 없나보다. 쿨한 엄마가 이 악물고 견뎌온 그 상실감이 자식이 없다는 한숨으로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것이다. 눈물이 난다. 이제야 새삼스럽게 엄마의 상실감을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살갑지 않은 딸에게 털어놓지도 못한 깊고 깊은 그 마음. 엄마의 그 마음도 이제 내가 감당해야 할 인생의 무게일 것이다. 엄마를 모신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