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침대에서 누워 지낸지 석 달이 지났다. 꼬리뼈 쪽 욕창은 다행히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귓바퀴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친구 엄마가 욕창으로 수술까지 하는 것을 봤던 나는 욕창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가정간호서비스를 신청했고 간호사가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욕창치료를 해주었지만, 간호사들이 매일 오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욕창치료는 내 몫이었다. 다만 내가 혹시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을 약간 누그러뜨리는 정도의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식사준비나 시중, 배변 문제 까지는 집에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가 있지만, 엄마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계속 나빠지는 상황에서 그냥 처방약만 드시게 하면서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지 불안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엄마를 위한 것인지 매일 매일 고민이 깊어갔다.
요양병원으로
가족회의를 했다. 새언니가 아는 요양보호사가 ‘00병원이 욕창 치료를 가장 잘 한다’고 했다며 요양병원을 한번 알아보면 어떠냐고 해서 남편과 함께 그 병원을 방문했다. 의사를 기다려서 상담을 했는데, 욕창에 대한 자신감은 컸지만 재활프로그램도 별로 없고, 간병인 한 명이 환자 4~6명을 돌본다고 했다. 엄마는 욕창도 문제지만 재활이 필요하고 간병인이 거의 24시간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집에서 차로 40여분 이상 걸리는 거리도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결정하면 입원은 가능했고 새언니는 욕창 치료를 위해 입원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길게 보면 요양병원을 알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평판이 좋은 요양병원을 찾아갔다. 신경과 의사가 여러 명 있고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라 엄마가 입원하면 욕창뿐만 아니라 굳어가는 근육을 위한 재활치료도 가능할 것 같았다. 엄마랑 비슷한 수준의 환자가 6명 있는 병실에 3명의 간병인이 함께 돌본다고 했다. 시설이나 분위기도 밝고 따뜻해서 마음이 편안했다. 대학병원에서 받아온 엄마의 진료기록들을 갖고 가서 상담간호사와 상담을 했다. 입원할 수 있는 조건은 되는데 당장은 병실이 없었다. 바로 엄마를 입원시킬 생각은 아니어서 대기접수를 하고 돌아왔다.
한 달쯤 지나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병실이 났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오니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된 건 아니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은 미룰 수가 없었다. 엄마의 의사를 물어봤지만 엄마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여기가 병원이냐?”고 묻기도 하고, “엄마 여기 어딘지 아세요?” 하면 “병원”이라고 답하시기도 했다. 가족들과 나는 당장 욕창치료가 급하고 무릎 재활도 필요하니 우선은 입원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엄마가 싫다고 하면 언제든지 퇴원을 하면 되니까… 입원을 하기로 했다.
엄마는 PCR검사로 코로나 음성이 확인되어야 병실 입원이 가능했다. 병원에 가서 PCR검사를 하고 1인실에 하루 동안 있으면서 결과를 기다렸다가 음성이 확인되면 입원할 수 있다고. 그 하루 동안은 간병인이 돌볼 수 없어서 보호자가 필요했고, 보호자도 코로나 음성확인서가 필요했다. 나는 내과에 가서 신속항원검사를 했고 음성확인서를 받았다. 이것저것 간단히 준비하고 남편과 아들의 도움을 받아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병실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려고 했지만 엄마는 별 말씀을 안 하셨다. 아니, 말씀을 잘 못하셨다. 다만 그런대로 밝은 엄마의 표정을 스스로 위안 삼았다.
환자와 보호자
내가 직접 병원에 가볼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엄마가 입원할 병실을 포함해 병원을 이리 저리 살펴볼 수 있었고 사람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담당 간호사는 밝은 표정에 아주 친절했다. 엄마한테는 간호사가 중요한데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간호사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었다. 담당 의사가 왔다. 엄마는 의사에게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내 판단이지만… 의사는 엄마의 상태를 설명하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고 병원에서 받게 될 재활치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본인이 보기에도 엄마는 루이소체치매가 맞는 것 같다고 했고 파킨슨증이 많이 진행되어서 팔 다리 재활과 함께 연하장애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재활치료도 필요하다고 했다. 파킨슨증이 더 진행되면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데 필요한 근육들도 굳어지기 때문에 연하장애와 관련된 재활치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입원하기를 잘 했다는 마음이 들면서 망설였던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오히려 좀 더 빨리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번에는 간병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의 관리자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간병비용 등 보호자가 알아야할 간병서비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사인을 받아갔다. 병실로 전화해서 통화는 가능하지만 간병인과 개별적인 접촉은 하면 안 되고 환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은 간호사실과 소통하라고 했다. 엄마를 가장 가까이서 돌보는 사람이 간병인인데 이들과 소통하지 말라는 것은 뭐지?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서 간병인이라는 위치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들은 병원 안에서 환자에게 가장 밀착해서 직접적으로 꼭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지만 그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병원외부의 시스템이다. 병원진료와 관계된 비용은 병원에 지불하지만 간병비는 간병서비스업체의 계좌로 보낸다. 환자나 보호자는 결국 각각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소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음날 엄마는 코로나 음성이 확인되고 병실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를 그렇게 두고 병원을 나왔다. 의료 시스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간병인들에게 엄마를 맡기고…
이삼일 동안은 병원에서 계속 연락이 왔다. 휠체어가 필요하다. 실내화가 불편하다. 이러저러한 형태의 스카프가 있으면 좋겠다. 다리를 고정시킬 수 있는 띠가 필요하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서 병원에 전달했다. 병원 입구에는 택배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아마 멀리 사는 보호자들은 택배로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제 엄마가 병원에 계신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엄마는 환자, 나는 보호자가 되었다.
엄마는 좋아지고 있을까
온 식구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엄마는 코로나를 잘 피해갔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한 후 석달쯤 지나서 엄마가 코로나에 걸렸다. 1인실에 격리되어 치료를 받았고 증세가 심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병실로 돌아온 후 일주일쯤 지나서 열이 나고 식사를 잘 못하셔서 애를 태웠다. 옆에서 직접 보지 못하고 상태를 전해 듣기만 하니 답답하고 더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코로나 후유증 같은데 집에서도 걸리지 않은 코로나를 병원에서 걸리다니 화도 나고 속상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매일 의사와 통화하고 상태를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2~3일 지나서 열도 내리고 식사도 잘 하시게 되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면회를 간 어느 날은 엄마가 간호사실 옆 처치실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계셨다. 염증수치가 높아져서 24시간 항생제를 주사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에 걸린 이후 엄마는 가끔 미열이 나고 염증수치가 높아진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그때그때 증상에 대응할 뿐이다. 해열제나 항생제를 처방하고 며칠 후에 다시 검사해서 수치를 확인하고…
다행히 욕창은 깨끗하게 나았다. 양쪽 귓바퀴의 상처도 다 나았고 다른 곳에 욕창이 새로 생기지도 않았다. 무릎과 손은 재활치료를 하지만 점점 더 굳어져가는 것 같다. 손을 잡으면 힘을 주기는 하시는데 마음대로 손이 펴지지는 않는 것 같고, 다리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신다. 의사는 고민을 많이 했고 파킨슨 약을 조금 늘렸다고 했다. 의사의 관심은 이제 인지문제보다는 육체적인 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의사를 만나면 몸무게가 늘었다고 좋아하거나 줄었다고 걱정하곤 했다. 나는 의사가 하는 대로 지켜볼 뿐, 의사에게 의견을 낼 수도 없다. 아는 게 없으니까… 그래도 엄마가 자기에게 웃어줬다거나 대답을 했다거나 하는 표현에서 세심하게 엄마를 살피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는 한다. 입원 한 지 6개월 쯤 지났을 때 입원할 당시와 비교해 엄마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의사는 많이 나빠지지는 않았고 그런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면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것이 집에서 돌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이 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엄마를 돌보고 있는 걸까? 엄마는 환자가 되었고 나는 보호자일 뿐인데…
엄마의 무표정
내 핸드폰은 토요일 아침 8시 58분에 알람이 울린다. 엄마 면회 예약을 위해서다. 9시부터 예약 페이지가 열리는데 주말 예약은 빨리 해야 해서 거의 오픈런이다. 2주 후까지 예약이 가능하다. 입원 후 한동안은 일주일에 한번 로비층 면회실에서만 면회가 가능했다. 코로나 음성 키트를 제시하고 4명까지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면회 시간은 30분. 가족 톡에 일정을 올리고 면회 갈 사람을 조직하는 일이 내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요즘은 3일에 한 번씩 면회가 가능하다. 코로나 검사는 하지 않아도 되고 병실 옆 휴게실에서 엄마를 만난다. 엄마랑 병원 정원으로 나가 산책을 할 수도 있다. 평일은 사람이 많지 않아서 예약이 그리 어렵지 않다. 수요일과 토요일을 면회일로 정하고 수요일은 주로 나와 남편이 면회를 간다.
면회를 갈 때는 엄마가 드실 수 있게 부드러운 과일을 잘게 잘라간다. 면회 시간에 엄마가 과일을 잘 드시면 좀 안심이 되고 잘 안 드시면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걱정이 된다. 병실에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소모품을 문자로 알려주고 나는 면회 갈 때 그것들을 챙겨다 준다.
엄마는 멀리서 온 손녀에게 “뭐 하러 왔냐”고 할 때도 있고, 증손주를 보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고 “이쁘다”고 할 때도 있었다. 사촌 동생들이나 내 친구가 왔을 때는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보여드리며 “00이예요” 라고 이름을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엄마가 사람들을 알아보는지 어떤지 매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00 왔어요. 00 알죠?” 하면 어떤 날은 베시시 웃으며 ‘내가 그걸 모를까’하는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엄마의 표정, 엄마의 대답여부가 나의 희비를 결정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해졌다. 물어도 대답을 듣기가 어렵고 어쩌다 한마디 말씀을 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여러 번 물어보면 힘주어 “응”이라고 대답을 하시는 것을 보고 알아듣기는 하시는구나 생각한다. 아마도 말하는데 관련된 근육도 점점 굳어져 가는 것 같고 그래서 말하기가 힘드신가보다.
목요일 오전에 의사가 전화를 했다. 엄마가 사과를 드시다가 목에 걸려서 석션으로 빼냈다고 했다. 깜짝 놀라는 내게 의사는 찬찬히 설명을 했다. 연하장애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다행히 작은 조각이라 작은 기구를 썼고 별 문제는 없었다면서,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래도 걱정이 돼서 엄마를 한번 보고 오려고 병실에 전화를 했더니 간호사실에서 허락하면 모시고 내려가겠다고 했다. 간호사는 엑스레이도 찍어봤는데 괜찮으시고 지금 점심식사도 하고 있으니 그냥 쉬게 해드리는 게 좋겠다고, 토요일 면회 잡혀 있으니 그때 오라고 한다. 답답하지만 보호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엄마 생각을 한다. 무표정한 엄마가 보인다. 엄마의 무표정은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것이 파킨슨증의 주요 증상이라는 것을 알아도 무표정하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 나는 마구 흔들린다. 엄마가 마치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너는 나를 돌본다면서 지금 이렇게밖에 못하는 거냐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어디 있느냐고. 나는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점점 납작해지고 희미해져 가고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끔은 엄마를 집으로 다시 모셔올까 이런 생각도 한다. 엄마가 혹시 집에 오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집으로 모셔 와서 더 좋아질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증손주를 데려가 한번 이라도 더 웃게 해드리는 것이나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을 잘게 다져가 입에 넣어드리는 것(이제 이것도 힘들어졌다!) 말고, 의사나 간호사, 간병인에게 엄마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