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눈을 뜬 여자가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당장 여기서 꺼지라고 소리를 지른다. 남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여자는 더 격렬하게 화를 낸다. 이 남자는 훈련받은 정신과 의사이자, 저명한 의료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먼이다. 허나, 50대 후반에 찾아온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아내 앞에서 그는 그저 충격과 비참함에 몸을 떠는 무력한 남편일 뿐이다.
종합병원의 여성 병동 5인실에서 남자 보호자를 본 적이 있다. 그 방에서 유일하게 남자 보호자를 둔 60대 여성은 말이 없는 편이었으나 남편과 아들은 시끄러웠다. 다른 보호자들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거나 환자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신경을 쓰는데 반해 이들은 병원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거나 간병이 힘들다며 투덜거렸다. 게다가 환자의 보호자에게 맡겨진 기본적인 의무(음식 섭취량과 대소변 배설량 체크, 용기 비우기와 세척)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늘 간호사에게 의존했다. 다른 환자들에 대한 배려나 예의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행태를 보며 내 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 올라오는 분노를 삼켜야 했다. 남자들이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저 사람들이 특이한 걸까 의문이 들었었다.
돌봄이 사람을 만든다
이 책을 접했을 때, 저자가 남자라는 점이 우선 흥미로웠지만 의료인류학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관찰기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런데, 10년의 간병 끝에 아내 조앤을 떠나보내게 된 아서 클라인먼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조앤의 주 간병인으로 살았던 그 10년의 세월이, 나라는 인간을 완전히 개조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진한 고통과 실망, 아픈 패배와 계속된 피로를 경험했고 난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난국이 찾아왔다. 그 사이 나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 나는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 배웠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글로 배웠던 돌봄을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돌봄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돌봄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알게 된 어느 전문가의 진솔한 이야기이다.
그의 아내 조앤 클라인먼은 유학으로 다져진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에 중국어를 전공해(그녀의 발병 전 마지막 작업은 <천자문> 번역 중이었다고) 동서양의 문화나 가치관에도 균형감이 있는 지성인이었으며, 열정적이면서 품위와 우아함까지 갖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병에 걸리기 전까지 남편의 일과 연구를 위해 보여준 헌신과 돌봄은 놀랍게도 그에게로 전이되어 그를 변화시켰다.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고 연구했던 사람이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가족을 돌보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한편, 그가 환자의 보호자로서 울분을 토하며 체험한 병원의 시스템과 의사들의 태도는 사실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환자들이 늘 겪는 일이라, 아니 이걸 몰랐단 말이야? 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신과의사이면서 의료인류학자이기도 한 그가 짚어내는 문제의식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발병 후 초반에는 의사들이 증상에 따른 병명을 끼워 맞추려고만 할뿐 환자의 공포나 개인적인 사정에는 무심한 것에 화가 났다. 친구들이 시시때때로 해주는 조언과 각종 정보들도 서로 어긋나거나 도움이 되지 않아 피곤했다. 그리고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만성화(chronicity) 질환인 알츠하이머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 너무나 딱딱하고 배려심 없는 의료진들의 태도에 실망한다. 그는 물론 이런 환자들을 매일 수십명씩 봐야하는 의료진들이 예의, 배려, 따스함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친절과 따스함이 없는 진료는 환자와 환자가족이 겪는 고통과 압박을 덜어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좀 더 전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좋은 요양보호사를 소개받아 고용할 수 있는 능력이 돌봄의 질을 높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 경제적 자원 외에 궁극적으로 한 인간에게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태도가 돌봄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환자의 보호자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깨닫는다.
인내력에서 나오는 돌봄의 호혜성
그는 돌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돌봄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고 하루하루의 소소한 일상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배웠다. 역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지만 그는 이 단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며 대신 ‘인내력(endurance)’을 이야기한다. 돌봄은 인내에 관한 일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심각한 질병과 힘든 간병 그리고 상실감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피해갈 수 없다. 저자는 인내를 통해 그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과거의 나 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더 나은 인간, 더 성숙한 인간은 어떤 것일까. 그는 아내가 가진 장점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남을 돌보는 마음, 세심한 관심, 누군가를 달래줄 수 있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또한 의사로서 진료의 핵심가치를 다시금 깨닫는다. 환자가 전문 의료진을 아무리 힘들게 해도 언제나 환자의 고통이 의사의 고통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의사로 일할 때, 환자들이 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병증을 기준으로 환자의 고통을 미리 재단하지 않고, 환자가 말하는 고통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돌봄의 호혜성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되었다고 봤다. 모든 돌봄의 관계에서는 감정적 도덕적 호혜성이 존재하며 그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생긴다. 호혜성의 경험을 통해 그는 더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으며 다른 이들과 관계를 더 잘 맺는 사람으로 거듭 나게 된다.
돌봄은 원래 진료의 핵심이었다
환자의 가족이 된 그는 의사로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의료진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의사들은 진단하려고만 하고, 환자들을 돌보려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을 네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전통적으로 의학은 돌봄을 진료행위의 핵심으로 정의해 왔으나 첨단 기술을 이용한 진단과 치료는 환자를 대상화하고 비인간화함으로써 환자와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점. 둘째, 돌봄에 의술이 기여한 부분은 간호사나 보건 전문가 또는 가족의 기여에 비해 크지 않음에도 이 중요한 협력자들은 통상 병원에서 무시되고 있다는 점. 셋째, 돌봄의 원칙과 실천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충분한 자원을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그럴 계획도 없는 의학 교육의 문제. 넷째, 전자 의료 기록의 발전이 환자의 그날 감정이나 주변의 조건을 기록할 공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의사들이 환자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현상을 들었다. 이러한 시스템의 발전이 가져온 비극적 효과는 환자들이 의료서비스를 받는 소비자가 되고, 의료 행위가 관계가 아닌 거래가 된다는 것이다. AI가 돌봄서비스를 하는 지금, 의사들이 원래 돌보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면 분명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내게 돌봄의 의미로 다가오는 몇몇 의사선생님이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복수의 우주에는 복수의 돌봄이 있다
아서 클라인먼이라면 나를 분노하게 했던 남자 보호자들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아마도 나처럼 단순하게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복수의 우주(plural universe)에 살고 있기에, 모든 돌봄에는 그들만의 환경과 관계와 맥락에서 오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남자라거나, 남편의 입장에서의 돌봄을 구분지어 보려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돌봄에는 실존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마무리한다. 누군가를 돌보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 안에서 온유한 자비심이 생기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돌보는 일이 결국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는 말은 어쩌면 격언 같아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다. 돌봄이 만들어내는 자비심과 에너지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힘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돌봄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혹은 앞으로 돌봄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문장을 읽어주고 싶다.
“아내를 돌보던 몇 년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규칙적으로 운동했고, 더 오래 깊이 잤고, 진정한 자아 성찰의 순간들을 맞이했다. 초반에는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의식적으로 공들여서 스트레스를 관리했고 이 힘겨웠던 10년의 후반에 이르러 나는 정신적으로 더 강건해지고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졌다. (중략) 우리가 두려워하던 결과는 결국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우리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는 다시 일어나 그 현실을 맞았다.”(67)
돌봄을 주고받는 일은 우리가 평생 선물을 주고받는 것처럼 관심, 애정, 실질적 도움, 감정적 지지, 도덕적 유대를 주고받는 일이며 그에 따라오는 의미는 인생의 수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미완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돌봄은 행동이고 실천이고 수행이다. 대체로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15)
우리의 질병 서사는 절대 깔끔한 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비논리적이고 예측 불가하며 가끔은 완전히 아무 일이나 닥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순환하고 증상이나 변화는 발작적이고 단속적으로 나타나며 그때마다 배웠다가 다시 모르게 되었다가 다시 배운다. 비극과 승리의 경험이 음악의 주제와 변주처럼 반복해서 일어난다.(28)
우리는 “복수의 우주(plural universe)”를 물려받았다. 돌봄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수만큼 다른 경험이 있다. 나의 경험은 오직 나만의 경험을 드러낼 뿐이다. 각각의 상황은 그것의 특수한 세상에서 특수한 재정적 압박 속에서 그 가족의 관계 역학과 사회적 관습 속에서 각각 다르게 펼쳐지는데 그것들이 의사결정, 역할 분담 등 돌봄의 핵심 요소와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68)
이 사회 곳곳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돌보는 사람이라는 역할로 들어간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돌보는 형태가 가장 많지만 돌봄을 주고받지 않고 진공 상태로 존재하는 이는 거의 없다. 돌봄-옆에서 존재함, 마음 열기, 경청, 실천, 인내, 사람과 추억을 소중히 하기-은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지역사회에 잔물결처럼 퍼진다. 돌봄은 사회를 하나로 잇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다.(141)
돌봄은 우리의 의심과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절대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불편하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절대 유쾌하지 않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너무 많아 보인다. 가끔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숭고한 일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결국 우리에 관한 일이다. 누군가를 돌보고 살피면서 자신 또한 돌봄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300)
(1)돌봄을 해본 적 없는 사람
(2)자신의 가족을 돌보고 있는 사람
(3)그리고 의사를 꿈꾸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