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서 집으로
누공 수술 후 더 쇠약해진 어머니가 요양병원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어머니를 집에서 돌보아야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루 관리도 욕창 관리도 우리는 할 수 없는 일 같아서 병원의 의료진과 간병인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양병원에 코호트 격리가 발동되어 면회마저 중단되는 사태를 겪게 되니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격리가 풀리고서도 집단시설에서 흔히 걸리는 옴 치료를 마쳤는데도 쉬지 않고 온 몸을 긁어대는 가려움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처럼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맡겨두어도 괜찮은 것일까, 하루 하루 생의 불꽃이 꺼져가는 어머니를 이렇게 손놓고 지켜보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가고 정신은 흐려져 갔다. 2주일에 한 번 3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면회 시간이 터무니없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제라도 어머니를 직접 만지고 씻기고 먹이면서 돌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와도 혼자서 돌볼 수 없으니 동생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요양등급 1등급의 와상환자로 집중케어가 필요한 어머니, 관리하기 힘든 장루와 욕창 이슈가 있는 어머니를 집에서 돌보겠다는 것이 정말로 어머니를 위한 결정일지 잘 생각해보자는 신중론도 있었다.
동생들을 안심시키는 대안을 찾았다. 먼저 집근처 병원 중에서 2019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일차의료 방문진료 시범사업 참여병원 리스트를 뽑아서 가정간호가 가능한지 상담을 시작했다. 다행히 의사의 왕진과 욕창 관리를 위한 간호사의 방문진료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또 재가요양센터를 통해 24시간 어머니를 돌볼 입주 요양보호사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의논이 오가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자주 열이 나고 염증 수치가 오르내렸고 항생제 주사 처방을 받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집에서 돌보게 되면 이같은 응급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다른 한편 이러다 영영 병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초조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인지능력이 계속 나빠지고 있는 것도 나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어머니의 의식이 또렷하지 않아도 아직은 우리를 알아볼 수 있을 때 어머니를 모셔와야 할 것만 같았다.
요양보호사를 구할 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아버지의 존재였다. 환자 돌봄 만으로도 벅찬데 초기치매의 아버지도 있다니 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데이케어센터에 나가시도록 아버지를 설득했다. 우리 형제는 지금처럼 돌아가며 집안 살림을 비롯해 아버지의 식사와 돌봄을 책임지고 요양보호사는 어머니에게 집중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요양보호사도 자식들이 함께 기거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식사 준비에 별도의 비용을 청구했다. 면접은 우리가 요양보호사를 선택하는 절차가 아니라 요양보호사가 우리를 간택하는 절차였다. 전생에 무슨 공덕을 쌓았는지 다행히 우리는 간병 경험이 많고 정이 많은 중국동포 요양보호사의 간택을 받았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장기요양보험에서 제공하는 전동침대와 욕창방지 매트 등의 복지용구를 들여놓았고, 퇴원 다음날 왕진 의사와 간호사가 오도록 약속도 잡았다. 방수시트며 기저귀 등도 준비했다. 응급차 안에서 손을 잡고 이제 집에 가는 거라고 해도 어머니는 특별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어머니가 오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만지고 입을 맞추었다. 응급차에서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도 그 순간에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프면 당신이 나를 돌보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렇게 누워 있으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아내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욕망은 몸과 마음이 성치 못한 아내를 보고도 멈출 줄을 몰랐다.
과연 어머니를 잘 돌볼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어머니는 환자가 된지 20개월 만에 더 아픈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결정은 어머니가 아픈 2년 동안 보호자이자 딸로서 했던 수많은 결정 중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돌봄은 고통을 지켜보는 것
집으로 온 어머니는 더이상 이전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제대로 의사 표현도 못하고,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먹을 수도 옷을 갈아입을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희미하지만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은 감정을 표현했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머니를 위해 죽을 끓이고 생선을 굽고, 어머니의 입에 밥과 국을 떠먹이고, 몸을 씻기고, 똥오줌을 받아낼 수 있어서, 그 시간이 소중하고 고마웠다. 아픈 데가 있으면 찡그리고, 맛난 것을 먹거나 편안할 때 미소 짓는 어머니를 보고 그 몸을 만질 수 있어서 좋았다.
주말이면 요양보호사 없이 어머니를 돌보아야 했다. 역시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것이 장루 교환이었다. 장루교환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변이 찬 장루를 떼어내서 피부를 잘 닦고 건조시킨 후 장루를 붙이고 돌아서자마자 새로 붙인 장루가 새는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장루라는 것이 의료보험 적용대상이 아니어서 값이 무척 비싼 물건인데도 어머니의 배에 착 달라붙지를 않고 걸핏하면 떨어졌다. 특히 밤에 자다가 깨서 장루를 교환해야 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뒤척이다 간신히 잠든 어머니의 잠을 깨우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문제, 쏟아지는 졸음을 참고 실수하지 않고 제대로 처치하는 것도 문제였다. 장루가 새기라도 하면 옷과 침대 시트에 똥이 묻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의 옷을 갈아입혀야 하니 세탁기가 멈출 틈이 없었다.
욕창의 상처는 넓고 깊었다. 살도 없는 엉덩이가 욕창 때문에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간호사가 매일 와서 욕창 드레싱을 하고 새살을 돋게 하는 연고를 발라도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드레싱을 할 때면 어머니는 고통에 찬 신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요양병원에 계실 때 욕창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말을 듣는 것과 매일 어머니의 고통을 마주하는 건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집에서 어머니를 직접 돌보는 것은 어머니의 고통의 목격자가 되고 아무리 슬퍼도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마음에 새기며 기억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이 맑을 때 ‘아파야 죽는다. 아프지 않고 죽는 경우란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마 어머니가 정신이 또렷했더라면, 우리에게 또 다시 그 말씀을 해주었을 것이다.
가려움증은 밤마다 어머니를 더 힘들게 했다. 퇴원하기 전에도 하도 긁어서 곪는 일도 있었다. 그 때문에 열이 나서 항생제 주사를 맞기도 했던 터라 또 염증이 생기면 어쩌나 내내 걱정이었다. 어머니는 특히 머리를 가려워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머리칼을 밀었다. 머릿속이 온통 울긋불긋 뾰로지 투성이였는데 점차 조금씩 나아졌다. 왜 일찍 머리카락을 밀 생각을 못했나 싶었다. 침대 옆에서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지 못할 때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어 상처를 낼까 봐, 장루를 뜯을까 봐 커다란 장갑을 끼우거나 끈으로 어머니의 팔을 침대에 묶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병원에서 팔을 묶은 어머니를 볼 때면 풀어 드리고 만져줄 수 있었지만 우리가 모시면서 어머니의 팔을 묶을 때는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저 미안함과 죄스러움, 부끄러움을 견뎌야 했다.
그동안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했다. 2주에 한 번 면회하는 것 이외에는 병동 간호사와의 통화나 의사 면담을 통해서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집에서 돌본다는 것은, 어머니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하지 않고, 우리 역시 각자의 번민과 괴로움을 안고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었다. 집으로 모셔왔다고 해서 모든 시간을 어머니의 돌봄에 쏟은 것도 아니었으며 자식이라고 해서 어머니를 더 잘 돌보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소멸과 해체를 향해 가는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고통을 내가 아는 일로, 내가 보는 일로, 내가 느끼는 일로, 내가 듣는 일로, 내가 눈물 흘리는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묘비명에는 밝고 웃음이 많았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새겼다.
작별
어머니가 집에 온지 3주가 되던 날 기저귀가 붉게 물들었다. 선혈에 가까웠다.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온 건지 자궁에서 나온 건지 육안으로는 알 수 없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태였다. 일단 방문 진료를 하는 병원에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다. 병원에서는 방문 간호사를 보내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요양보호사는 불안해 하며 응급실에 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내 마음은 반반이었다. 소변검사와 혈액검사의 결과를 보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병원 가는 것을 미루다가 문제가 심각해 지면 어쩌나 마음이 오락가락 했다.
그날 밤에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응급차를 불러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혈액검사, 소변검사, 엑스레이, CT 등 할만한 검사는 다 했다. 피검사 결과 수혈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 외는 특별한 것이 없다고 했다. 나는 신장이나 방광, 자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와 관련한 이상 소견은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입원시키지 않고 집으로 모셔왔다. 며칠 후 피가 멈추었다. 병원에서는 외래진료를 예약해주었으나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더 힘들어 하지 않는 한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겠노라고 결심했다. 다시 입원하게 되면 면회가 제한될 것이고, 콧줄이 되었든 항생제가 되었든 어머니의 몸에는 주렁주렁 온갖 줄이 매달릴 것이고, 우리는 의사의 처분만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제 더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점점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줄어들었다. 컵으로 물을 마시게 하면 사래가 들리기도 해서 빨대를 이용했는데 종종 물 마시는 법을 잊고 빨대를 그냥 물고 있기도 했다. 그 주말에 동생네 부부가 돌보면서 아무리 애원하고 달래도 식사를 거의 안하신다고도 했다. 워낙 짧은 기간에 겪은 일이라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이 임종이 가까워오고 있는 징후였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셨다면 아마도 콧줄을 달거나 산소마스크를 쓰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지 못했던 우리는 어떻게든 드시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먹을 것 마실 것을 거부하며 입을 꾹 닫아 버린 날, 요양보호사는 나에게 주사기를 주문하라고 시켰다. 주사기로 미음을 입에 조금씩 넣어 드리자고 했다. 간병인들이 종종 쓰는 방법인데 그렇게 하면 노인 환자가 기운을 차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날 밤 요양보호사로부터 어머니의 숨이 불안해 보인다는 연락이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실은 드라마나 소설 속 흔한 클리셰와는 달랐다. 어머니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동생이 어머니 곁에서 마지막을 지켰다. 어떤 고통도 없는 편안한 임종이었다. 내가 뵈었을 때 어머니는 두 눈을 감고 꿈 없이 주무시는 것 같았다. 슬픔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나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어머니의 몸을 끌어안고 어머니의 뺨에 내 뺨을 대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세요”라는 말이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어머니의 육신과 영혼을 끊임없이 갉아먹던 고통이 멈추었다. 이제 그 고통을 지켜보는 무기력과 비탄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당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온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생들을 기다리며 어머니의 몸에 붙어있는 것들을 떼어냈다. 가장 먼저 기저귀와 장루를 뗐다. 욕창과 몸 이곳 저곳의 상처를 덮고 있던 거즈도 벗겨낸 다음 어머니의 몸을 닦았다. 고관절 수술 후 걷지 못해서 근육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비틀어지고 굽은 다리도 폈다. 따뜻하고 부드럽던 어머니의 몸은 차갑게 식고 뻣뻣하게 굳어갔다. 그렇게 온기가 사라져가는 몸을 닦고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작별의 시간에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어느새 2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다시 떠올랐고, 내가 겪었던 돌봄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부모 돌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한달에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아버지는 올해 가을 어머니 2주기 제사를 기점으로 유난히 우울감이 심해졌다. ‘살아 있다는 것이 천형이다’는 말에 더해 ‘너희들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의 몸과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매번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나에게 애도와 돌봄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