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읽었다. 1998년에 나온 소설집이니 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이 소설집에는 아홉 편의 단편소설과 한편의 콩트가 실려 있다. 나는 「마른꽃」, 「너무도 쓸쓸한 당신」,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끝나갈 때」 세 편이 좋았다. 어디서도 만나기 힘든 노년의 몸에 대한 솔직하고 투명한 응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을 펴낼 때 박완서의 나이는 67세였다. 우리는 이 책에서 노년이 된 여성 작가가 그려내는 ‘늙은이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책이 나온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박완서가 말하는 늙은이라는 게 겨우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정도니, 참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60대 중에 자신이 늙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60대가 되면 누구나 생물학적이면서 사회적 현상인 몸의 ‘노화’라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노화’만이 아니라 ‘몸’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터부시 되고 있다는 것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아주 가끔 노인이 주인공인 영화, 드라마를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노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드라마 <마이 디어 프렌즈>와 영화 <소풍>이 떠오른다.) 특히 나이 들어가는 몸 이야기는 더 드물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조차 노년의 몸은 아픈 몸, 의학적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몸일 때만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노인의 몸은 안티 에이징 성공신화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노인이거나 패션 센스를 뽐내는 시니어 모델 정도가 아니면 주목받지 못하니 말이다. 비록 이 책이 수십년전 작품이지만 박완서가 노년의 몸과 그 몸에 대한 감정을 포착하는 시선은 예리하고 투명하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노년 작가 박완서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늙어가는 여자의 몸
「마른꽃」의 화자는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60대의 여성이다.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마음이 잘 통하는 남자를 만나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설렘과 흥분이 새록새록 살아났고, 마치 열여섯 살로 돌아간 듯 통통 튀는 탄력을 지니게 된 것 같았다. 그 감정을 유희처럼 즐기던 어느날 그녀는 샤워를 하던 중 전화를 받으러 나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몸에서 물이 떨어져 발밑에 타월을 깔고 뻣뻣이 서서 전화를 받다 말고 나는 하마터면 아니 저 할망구가 누구야!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문갑 옆 경대는 시집올 때 해 가지고 온 구식 경대여서 거울이 크지 않았다. 거기에 하반신만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 쌍둥이까지 밴 적이 있는 배꼽 아래는 참담했다. 볼록 나온 아랫배가 치골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틀어 짜 말린 명주 빨래 같은 주름살이 늘쩍지근하게 처져 있었다. 어제오늘 사이에 그렇게 된 게 아니련만 그 추악함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욕실 안의 김 서린 거울에다 상반신만 비춰보면 내 몸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 그때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 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것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 하고 다짐했다.
달달한 연애감정이 무르익어 가는 서사의 절정에 갑자기 등장하는 나이든 몸의 현실! ‘죽는 날까지, 그것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내 몸. 화자가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혹감이야 말고 ‘노화’의 사실에 직면한 자의 놀람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노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본격적인 노화의 자각은 청년기가 지나면서 시작된다. 어느날 문득 선명해진 눈가 주름을 발견할 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깊어진 팔자주름이 보일 때, 드문드문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자리잡은 새치가 뭉텅이로 보일 때, 우리는 나이듦과 노화를 실감한다. 이런 이야기는 흔하다. 그러나 벌거벗은 자신의 몸, 그것도 출산경험이 있는 여성의 배꼽 아래의 몸을 이다지도 리얼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는 생경하다 못해 읽는 사람도 놀라게 한다. 마치 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이 덮친다.
나는 꽤 오래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화자가 거울에 자신의 나신을 비춰보는 장면에서 소설 속 화자 이상으로 놀랐다. 그래서 이 대목을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소설 속 화자와 비슷한 나이가 된 지금 다시 읽어도 예전처럼 강렬한 느낌이 들까, 궁금했다. 그런데, 여전히 그랬다! 아니, 더 강렬했다. 그런데 막상 내 몸도 화자와 같은 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이런 의문이 들었다. 탄력을 잃고 축 늘어져 볼품없이 늙어가는 몸은 추악한가? 부끄러워하고 감추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추악한 몸을 추악하다고 함으로써 작가 박완서는 추악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뚜렷한 노화의 표징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고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외면하면서도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는 없을까? 그 응시 속에 어쩌면 감출 수 없는 연륜의 당당함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늙어가는 남자의 몸
또 다른 작품 「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화자 역시 초로의 여성이다. 초등학교 교장인 남편의 교장스러움에 질린 그녀는 자식 교육을 핑계로 남편과 한집에서 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이 작품에서도 샤워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여성 화자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 샤워를 하고 나온다.
욕실에서 나오는 남편을 돌아보다가 그녀는 에구머니, 소리를 지를 뻔하게 놀라면서 얼굴을 돌렸다. 팬티만 입은 남편의 하체가 보기 흉했다. 넓적다리에 약간 남은 살은 물주머니처럼 축 처져 있고, 툭 불거진 무릎 아래 털이 듬성듬성한 정강이는 몽둥이처럼 깡말라보였다. 순간적으로 닭살이 돋을 것처럼 혐오스러웠다. 징그러운 것 하고는 달랐다. 징그럽다는 느낌에는 그래도 약간의 윤기가 있게 마련인데, 이건 군더더기 없는 혐오 그 자체였다. 살을 대고 산 적이 있는 부부 사이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너무도 쓸쓸한 당신」)
남편의 벗은 몸에 대해 그녀는 징그러움을 넘어선 혐오감을 느낀다. 「마른꽃」과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의 벗은 몸의 묘사는 마치 성별만 바꾼 데칼코마니와 같다. 여자의 몸이 출산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면 남자의 몸은 의무의 흔적을 숨기고 있다. 이 남자는 오랜 교직생활 끝에 교장으로 은퇴했다. 그럭저럭 품위를 지키고 살 만큼의 연금을 받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몫을 거의 남기지 않고 그대로 따로 산 지 오래된 아내의 통장에 꽂아 넣었다. 국철을 타고 가야 하는 궁벽한 시골에서 그는 지지리 궁상을 떨며 초라한 살림살이를 영위하고 있다. 소설의 화자는 “헐렁하게 낡아빠진 팬티만 입은 채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의 모기 물린 자국이 남아있는 말라빠진 정강이를 응시한다.
모기 물린 자국이 시뻘겋게 한창 약이 오른 것도 있고, 무르스름 가라앉은 것도 있고, 무수했다. 이 말라빠진 정강이에서 피를 빨다니, 아무리 미물이라도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떡하고 살기에 제 몸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때가 낀 손톱과 함께 그의 지나치게 초라하고 고달픈 살림살이가 눈에 선했다. 그렇게까지 안 살아도 될 만한 연금을 받고 있는 남편이었다. 스스로 원해서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마냥 얽매여 있으려는 남편에 대한 연민이 목구멍으로 뜨겁게 치받쳤다. 그녀는 세월의 때가 낀 고가구를 어루만지듯이 남편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너무도 쓸쓸한 당신」)
타자에 의해 응시되는 늙은 남자의 몸은 아버지의 몸이자 남편의 몸이 될 때에만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 남자 스스로 자신의 늙고 추레한 몸을 응시할 수는 없을까?
돌보는 몸과 돌봄을 받는 몸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에서는 늙어가는 여자와 남자의 몸이 아니라 돌봄의 대상이 된 어머니의 몸이 등장한다. 이 작품 역시 화자는 60대 여성이다. 그녀는 위암수술을 한 후 어쩐 일인지 항문의 괄약근이 풀려 뒤도 못가리게 된 어머니를 모시게 된다. 이 어머니, 평생 집 밖을 떠도는 남편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자존심 하나로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다. 동네 노인네들이 모여서 “내 발로 변소 출입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치매 안 걸리고 죽었으면” 하는 따위의 잡담을 나눌 때, 그 어머니는 “난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싶다우”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어머니는 늙은이 냄새가 날까 봐 옷장 속 옷갈피 마다 향내 나는 비누를 넣어둘 정도로 추레해 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자기관리에 철저한, 깔끔한 양반이었다. 그렇게 체면치레를 중시하고 품위와 위엄을 앞세우던 어머니가 괄약근이 고장이 났다. 소설 속 화자는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갔다. 간병인이 의식이 명료한 어머니를 구박하는 꼴을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떠맡고 싶은 건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똥구멍이었다. 생판 남이 어머니의 똥구멍을 진저리를 치며 구박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건 효도 따위보다 훨씬 진실하고 씩씩한 분노였다. 하필 항문의 고무줄이 빠질 건 뭐였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에게 그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대가로라도 그 치욕을 다소나마 가려주는 일을 맡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그렇게 딸네집으로 간 어머니는 온종일 똥구덩이에 빠져 악취를 풍기며 누워 지내야 했다. 아! 나는 이번에 이 소설집을 읽으며 이 대목에서 입에 쓴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을 때가 생각났다. 직장에 누공이 생겨 어머니는 질로 변이 새어 나왔다. 구멍을 막기 위해 수술을 했지만 어머니는 인공 대변 주머니를 차고 남은 시간을 살아야했다. 그 대변 주머니는 수시로 떨어지고 터졌다. 나는 무뚝뚝한 데다가 입성에 신경을 안 쓰는 편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와 전혀 다른 분이었다. 어머니는 명랑하고 다정했고, 예쁜 것을 좋아했다. 그런 어머니가 우울증과 치매로 정신줄을 놓고 똥냄새를 풀풀 풍기며 누워있을 때 얼마나 서글펐던가! 소설속 화자는 바람피고 돌아다니던 아버지는 멀쩡한데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어머니가 똥구덩이에 빠져 누워있자 주체못할 분노를 느낀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 딸네 집에 악취를 풍기며 누워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희롱해도 된단 말인가. 하필이면 우리 어머니를. 나는 천방지축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조화를 부리는 인간살이에 분노를 걷잡을 수 없었고, 그건 바로 아버지를 향해 폭발했다.(「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나도 그랬다. 우리 어머니가 왜 이렇게 인생 말년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참, “사람팔자는 관뚜껑 덮을 때까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난해한 숙제구나.” 화자의 이야기는 작가 박완서의 이야기이고, 나는 그 이야기에 깊이 공감한다. 오래전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이런 시간의 두께가 실린 이야기가 사느라 바빴던 젊은 내게 들어왔을 리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읽는 소설집임에도 마치 처음 읽는 듯이 읽을 수 있었다. 삶은 “공식이 통하지 않는 난해함”으로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삶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비밀로 쌓인 신비일 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것을 아는 것이 “연륜”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연륜은 감출래야 감추어지지 않는 것임에 확실하다.
“여기 수록된 단편들은 젊은이들 보기엔 무슨 맛으로 살까 싶은 늙은이들 얘기가 대부분이다.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그래주고 싶어 쓴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게 강변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사는 것을 맛있어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난 소리 같아서 대견할 뿐 아니라 고맙기까지 하다. 물론 내가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단맛만은 아니다.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너무도 쓸쓸한 당신』서문)
- ‘나이듦’을 문학으로 읽고 싶은 사람
- 박완서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
- 여름이 가기 전에 소설집 한 권은 읽어야겠다 생각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