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로 가는 중간역
월요일, 기차역 대합실 같은 곳에서 대기하던 22명의 사람들이 하나씩 면접실로 불려간다.
“당신은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이곳에 오시면 일주일간 계시게 됩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하실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추억을 딱 하나만 선택해 주세요. 다만 시간제한이 있습니다. 사흘 내에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한 추억은 저희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영상으로 재현합니다. 토요일에는 그 영상을 시사실에서 관람합니다. 그 추억이 선명히 되살아난 순간 그 추억만을 가슴에 안고 저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사후세계 중간역. <티벳 사자의 서>에 나오는 바르도 같은 건가? 바르도는 49일인데 여기는 일주일이다. 여기서 일주일동안 망자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을 선택하는 과정과 이들을 돕는 직원들을 통해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이 영화는 드라마/판타지로 분류되는데 아마 사후세계를 그리고 있어서 그런 것 같지만, 요즘 <티벳 사자의 서>를 읽고 있어서인지 별로 낯설지가 않다.
망자들은 어린 학생부터 80대 노인까지. 죽음에는 순서가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직원들은 망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순간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을 이끌어내려고 애쓴다.
경험과 기억, 그리고 선택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기억해내는 이야기를 보면 전쟁에서 죽을 뻔했는데 살아남은 큰 사건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소한 경험들이다. 어렸을 때 오빠가 사준 빨간 원피스를 입고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추던 기억과 오빠에 대한 느낌, 파일럿 훈련을 받으며 비행기 조종석에서 보는 풍경, 중학교 때 전차 앞자리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낀 순간…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관동대지진 때 대나무숲으로 피신해서 엄마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먹던 일을 선택하거나, 5살 때 잡동사니를 안고 벽장에 숨었던 기억으로 그 어둠을 선택하기도 한다.
가장 어린 여학생은 디즈니랜드에서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직원 시오리는 디즈니랜드를 이야기한 사람을 1년간 30명이나 봤다고 얘기해준다. 너무 뻔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나중에 그 여학생은 세 살 때 엄마 무릎에서 귀청소를 받으며 엄마 냄새와 뺨이 허벅지에 닿았던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기억해낸다. 아주 그립다면서 시오리에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눈 내리는 날 호텔에 갔고 자신이 영화 주인공이 된 듯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남자는 오지 않았고, 나이도 4살 어린 것으로 이야기한다. 기억은 자신이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기도 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단 하나의 기억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21살 이세야. 그는 장래의 꿈을 고르면 안 되냐고 묻는다. 과거의 기억보다는 장래의 꿈을 설계해서 여러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오히려 더 리얼리티가 있을 것 같다며.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책임지는 자신의 방식이라며 저 세상으로 떠나지 않는 한 사람으로 남는다.
70살 와타나베씨는 쉽게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를 담당하고 있는 모치즈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제 인생에 대해서 자신감 같은 게 있었죠. 이만하면 행복하지 않았나. 근데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뭔가가 부족해요. 고만고만한 학력, 고만고만한 직장, 고만고만한 결혼…” 우리네 인생이 사실 다 비슷하다. 고만고만한 인생.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씨에게 인생의 요약본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가져다준다. 그는 비디오를 보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비디오 속의 젊은 와타나베는 말한다. “뭐라도 좋으니까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죽고 싶어. 취직해서 그렇게 쭉 살다가 죽고 싶진 않단 말이야.”
80대 알츠하이머 할머니도 있다. 직원이 도와주려 물어도 빙긋이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할머니. 자신을 담당한 직원이 딸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걸 듣고 그 딸이 좋아한다는 벚꽃잎 모양을 선물하고 떠난다. 자신도 좋아했던 벚꽃을. 과거의 기억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21살 이세야만 빼고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이 할머니도 뭔가를 선택했을 것이다. 아마 벚꽃과 관련된 기억이지 않을까. 치매인도 인생에서 소중한 어떤 기억은 갖고 있다는 것이 위안인지 슬픔인지 울컥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선택인 것 같다. 그 사람이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슨 추억을 선택하느냐가 더 중요해 보인다. 특정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을 선택하는 과정 자체에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보여주는 그의 정체성이 있다. 사실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벌써 선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영화 장면을 봐도 그렇게 느껴진다. 망자들이 선택한 기억을 재현하는 촬영장에서 망자들은 각자 주인공이 된다. 제작진과 대화를 나누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자신이 결정한다. 자신의 영화를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카메라는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걸 보는 망자를 보여준다. 기억의 내용인 재현 영화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억의 재현 여부가 아니라 기억의 재현 과정에서 느낀 망자의 감정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해 낸 장본인이고 모든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다.(<티벳 사자의 서>)
영화 같은 인생
여기 직원들도 망자들이다. 가장 좋은 추억 하나를 찾지 못해서 여기 머물며 일하고 있다. 주인공 모치즈키도 22살에 전사하여 50년간 여기서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담당한 망자 와타나베가 기억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다가 그의 인생비디오테이프에서 자신의 생전 약혼자를 보게 된다. 그를 짝사랑하는 보조직원 시오리가 그 약혼자가 선택한 마지막 기억영화를 찾아내고 그 영화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기억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기억은 누군가의 마지막 추억을 영화로 만드는 동료들의 모습이다.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생전 기억이 아니라 원래는 불가능하지만 예외로 인정 받아 그 장면을 재현하고 그는 떠난다. 시오리는 모치즈키의 존재와 여기에서의 일을 잊고 싶지 않아 기억을 선택하지 않고 남기로 한다.
이 영화의 각본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직접 썼는데 그는 “당신 삶에서 단 하나의 행복한 기억을 선택한다면?” 이라는 물음으로 500명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 중 일부가 아마추어 배우로 이 영화에 직접 출연했다.
감독은 인생은 영화와 같다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영화가 가진 허구성 자체가 우리네 삶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기억 또한 영화처럼 이미지의 연속이며 많은 부분은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이기도 하다. 인생을 돌아보면 그 기억들이 자신의 인생이 된다. 시사실에서 자신들이 재현한 기억의 일부를 바라보는 망자들은 영화를 보며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을 느끼며 저 세상으로 간다. 관객은 스크린에서 그들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 인생이 원더풀 라이프!!! 였기를……
만약에 제가, 예를 들어서 여덟 살이나 열 살 때 기억을 선택 한다 칩시다.
그럼 그때의 기분만을 느끼며 떠나는 건가요?
다른 건 전부 잊을 수 있는 거죠? 그래요? 잊을 수 있군요. 그럼 그곳은 천국이 맞네요.
기억이라는 건 결국 우리가 상상한 이미지로 바뀐다고 생각해요.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 나름대로 현실성은 있겠지만요. 제가 영화를 찍는 기분으로 장래의 꿈을 설계해서 여러 상황을 만들어 나가면 기억같은 것보다 더욱 현실성이 있달까 리얼리티가 있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러면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보다 훨씬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교코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은 건 제게 친절함을 베풀어주신 거라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교코의 기억 속 당신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희 부부는 그런 감정을 극복할만큼 긴 세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니, 이곳에 와서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아내와의 추억을 선택할 수 있었겠죠. 저는 제 70년 인생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친절해서가 아니야. 그 사람한테 상처주기 싫어서도 아니었어. 그저 나 자신이 상처받는 게 싫었던 거야. 교코가 그 사람한테 마음을 털어놓았듯이, 그런 교코를 그 사람이 받아들였듯이 난 사람과 깊은 인연을 맺으려 한 적이 없어.
난 그때 행복한 추억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어. 그리고 50년이 지나서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었단 걸 알았어. 정말 멋진 일이야. 너도, 너한테도 그런 날이 올거야.
내가 선택하기로 결심한 건 이곳에서 생활하며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이곳을 잊지 않을거야.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하는 사람
- 죽음, 사후세계에 관심 있는 사람
-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