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衆生), 그 중유(中有)적 존재들을 위하여
-티벳 사자의 서를 읽는 하나의 방법-
1.티벳에는 뭔가가 있다
공부는, 나에게 자기구원의 방법이었다. 인문학공동체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삶은, 나에게 좋은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만일 아니라면? 안된다면? 음, 티벳으로 가야지….
티벳! 그곳은 오랫동안 나에게 달라이 라마의 자비심, 조장(鳥葬)이라는 무상(無常), 삼보일배의 곡진한 기원 등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성과 속, 이승과 내세의 경계가 시나브로 섞이며, 동시에 영화 <컵>에서 보여지듯, 관용과 유머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컵>의 한 장면, 월드컵에 진심인 젊은 스님들을 보면서 노스님이 묻는다. “전쟁이 난다고?” 주지 스님은 당황스럽다. “오잉? 전쟁이라뇨?”
노스님 : 두 나라가 공을 가지고 싸운다며?
주지 : 아! 예. 아마 자정쯤 시작할 겁니다.
노스님 : 싸우기엔 정말 이상한 시간이군. 근데 싸워서 이기면 뭘 얻는가?
주지 : 컵을 차지합니다.
노스님 : (찻잔에 물을 붓고) 컵이라…
2009년에 달라이라마의 고향인 옛 티벳 암도지방 (지금은 중국 청해성)의 랑무스, 라블랑스 지역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천장터에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했고, 겔룩파 라마승들의 그 유명한 토론수업, 변경(辨經)을 직관하기도 했고, 곳곳에서 오체투지하는 순례객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어느날 초원으로 소풍 나온 스님들을 우연히 만나 찍은 사진 한 장, 까까머리 동자승과 내가 마주보고 웃고 있는 그 장면은 지금까지 내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려있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갈 거야. 하지만 여러 여건상 그 염원은 부질없는 것이 될 터이다. 대신 나는 <티벳 사자의 서>을 읽었다. 여기에서 티벳의 지혜 한자락이라도 길어올리고 싶다. 그런데 이 텍스트, 묘하다. 어떤 점에서는 대단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황당하다.
칼 융은 <티벳 사자의 서>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많은 영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티벳 사자의 서>에 등장하는 온갖 신들과 귀신들을 일종의 무의식으로, 단 프로이드처럼 개인적이며 트라우마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며 창조적인 역량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자아를 넘어 존재의 본성, 마음의 본성에 이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온갖 상징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영적 이해력이 일천하면 결코 열리지 않는다, 모든 비의적 텍스트가 그러하듯. 일개 범부인 나는 약간 좌절한다.
알려져 있는 것처럼 티벳은 7세기에 토번 왕조의 모습으로 세계사에 처음 등장한다. 인도불교가 쇠퇴하던 8세기 경 인도의 승려들은 대거 티벳으로 건너갔고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섞인 티벳불교(밀교 혹은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불린다)를 탄생시킨다. 고대 티벳어 역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티벳 사자의 서> 역시 8세기 인도에서 티벳으로 넘어온 파드마 삼바바라는 고승에 의해 지어졌다. 그는 이 책을 쓴 후 은밀한 동굴 속에 감추어두고 600년 후에 발견되리라는 예언을 남겨놓았는데 실제 600년 후인 14세기에 깊은 산 동굴 속에서 이 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책은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계속 전해지면서 마치 기독교 문화권에서 주기도문이나 사도행전이 낭송되듯, 그렇게 티벳 내에서 일상적으로 읽혔다고 한다. 이후 1919년 영국인 윌터 에반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번역해 1927년에 지금의 이름 <티벳 사자의 서 Tibetan Book of the Dead>로 출판한다. 그리고 이 책은 19세말부터 시작된 서구 뉴에이지 흐름 속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
2. ‘바르도’, 두 개의 ‘이행’
이 책의 원제는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이다. ‘바르도’라는 용어는 좁은 맥락에서는 이번 생과 다음 생 사이의 중간 상태, 더 넓은 맥락에서는 ‘이행’ 혹은 ‘틈’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퇴돌’은 듣는 것(Thö)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dol)라는 뜻이다. 사실 <바르도 퇴돌>에는 6개의 바르도가 나열되어 있다. 첫 번째는 “출생지의 바르도”, 두 번째는 “꿈 속의 바르도”, 세 번째는 “명상의 바르도”, 네 번째는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다섯 번째는 “존재의 근원의 바르도”, 여섯 번째는 “환생의 바르도”로서 원어로는 각각 키에나 바르도, 미람 바르도, 삼탄 바르도, 치카이 바르도, 초에니 바르도, 시드파 바르도이다.
따라서 이 책은 류시화의 말대로 “장례식 절차를 설명한 책이 아니며, 단순한 사후세계의 설명서가 아니다.” 그것은 생의 근본 진리를 설파하는 책으로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심오한 가르침”이다. 라마 고빈다(1898~1985) 역시 이 책은 죽음이나 가설적인 사후세계에 관한 종교적 사색을 넘어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이르는 열쇠”이며, “영적 자유의 길을 추구하는 이들의 길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지침서이다.
티벳불교의 모태신앙자도 아니고, 서구 뉴에이지 세대도 아닌 나 역시 이들을 따라 <티벳 사자의 서>를 ‘산 자를 위한 지침서’로, 즉 인간의 유한성에 대처하는 하나의 ‘포에지(시문학)’적 텍스트로 읽어나간다. 나의 독해방법은 바르도를 ‘이행’으로, 또 그것을 존재론적 층위의 이행과 윤리적 층위의 이행으로 이중적으로 겹쳐서 읽는 것이다. 존재론적 층위는 삶과 죽음이 연속적으로 교대되고 있다는 사유이며, 윤리적 층위는 우리는 누구나 일체개고(一切皆苦)에서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고이다.
우선 존재론적 이행과 관련하여, 사계절의 순환처럼 삶과 죽음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인도뿐 아니라 창조주를 가정하지 않는 모든 고대적 사유의 일반적 특징이다. 고대 중국의 <역경>은 이것과 관련된 가장 고전적이며 동시에 매우 탁월한 텍스트이다. 그 유명한 계사전 5장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爲道)”를 왕부지(王夫之)를 통해 해설하고 있는 프랑수아 줄리앙은 ‘운행’이라는 키워드로 역(易)의 존재론을 설명한다.
“‘태초에’ 교대가 있었다. 호·흡, 주·야,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 왕·래, 개·폐. 낮과 밤은 하늘의 호흡과 같으며 여름과 겨울은 낮과 밤의 리듬을 재연한다.(왕부지) 단지 그 차원이 다를 뿐 모든 현상은 영속적인 왕-복을 따른다. 이를테면, 수축-팽창, 신장-굴절.
밤과 낮은 교대하며, 해가 지면 달이 뜬다. 그러나 하늘은 가시와 비가시의 끊임없는 운화 속에 여일하다. 왕부지의 언급대로 하나의 명징성으로서의 세계는 비록 비가시적일지라도 낮이든 밤이든 실재적이다….계절의 순환 역시 현동과 잠재의 연쇄에 다름 아니다… 드러남은 현동화이며, 사라짐은 잠재화이다. 밤이 온다고 해서 바깥 세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잠이 든다고 해서 개인의 정신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교대와 작용, 보다 구체적으로 교대에 의한 작용의 상징들. 이는 왕부지의 독서를 통해 더욱 더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의 구체적인 성찰 대상은 불투명함 속에 열릴 줄 모르는 ‘벽’이 아니며, 닫힐 줄 모르고 언제나 열려있는 벽 속의 ‘구멍’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때로는 열려있고 때로는 닫혀있는, 즉 열려있기에 닫힐 수 있고 닫혀있기에 열릴 수 있는 문(門)이다. 열려있든 닫혀있든 문이란 늘 제 역할을 다한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은 수시로 필요하며, 변화의 조건이 되는 상호성으로 인해 결코 다함이 없다.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흐름의 가능성이 바로 운행의 요체인 ‘도’를 형성하리라.”
존재의 이행성를 표현하는 불교의 개념은 부파불교의 ‘사유(四有)’와 또 그것의 근거가 되는 초기 경전의 ‘십이연기(十二緣起)’ 아닐까? 알다시피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행(行)-식(識)-명색(明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老)/사(死)로 이어지는 십이연기는 모든 존재가 실체가 아니라 연기적 과정의 한 매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연기 과정을 전생의 업으로 이생의 삶이 출현하고 이생에서 또 다시 짓는 업으로 내생의 삶이 이어진다는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존재의 이행을 일종의 (인과)법칙으로 설명한다.
이를 부파불교는 태어나는 순간인 생유(生有)와 삶을 영위하는 기간인 본유(本有), 삶을 마치는 순간인 사유(死有), 그리고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인 중유(中有)라는 존재의 네 가지 형식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이 티벳밀교에 와서 다시 6개의 바르도로 설명되고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티벳 사자의 서>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층위의 이행(바르도)은 다른 모든 지혜의 텍스트처럼 삶도 과정이고 죽음도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표현대로 그것을 문이라고 한다면 삶이 입구이고 죽음이 출구일수도 있고, 반대로 죽음이 입구이고 삶이 출구일 수도 있다. 장자는 이것을 ‘도추(道樞)’라는 개념을 통해 삶과 죽음 그 어느 하나에도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삶과 죽음은 존재론적으로 정말 다른 게 아니다.
3. 윤회 혹은 환생이라는 윤리적 아젠다
그러나 <티벳 사자의 서>의 매력은 존재론적 이행이 아니라 윤리적 차원의 이행에 관한 매우 풍부하고 상징적인 서사에 있을지도 모른다. ‘중유(中有)’에 속하는 치카이 바르도와 시드파 바르도 단계에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 갈 것인지 다시 육도윤회(六道輪廻)로 떨어질 것인지가 명료하고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읽은 세가지 바르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가장 먼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라고 불리는 치카이 바르도가 있다. 대개 외호흡이 멈춘 후(생물학적 죽음) 3일반에서 4일 사이를 이르며, 몸을 이루고 있었던 지수화풍공, 5대가 분해되고 있으나 육체는 아직 부패하지는 않고 있다. 의식은 처음에는 혼미하다가 갑자기 깨어난다. 업력도 중음의 환영도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청정한 빛이나 두 번째 청정한 빛을 깨달아 바로 해탈할 수 있다.
치카이 바르도에서 바로 깨달아 니르바나에 이르지 못하면 이제 바르도체는 14일간의 초에니 바르도 단계에 머무르게 된다. 육체는 부패하고 의식 상태는 맑고 강렬한 감각기관의 지각이 있다. 하지만 업력이 작동하면서 처음 7일간의 평화의 신, 다음 7일간은 분노의 신이 총 112명 출동한다. 이 단계에서 스님이나 지인이 들려주는 독송을 자세하게 집중해서 듣고,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 해탈의 기회라는 것을 알아채면, 어느 날이든 바로 눈부신 지혜의 빛을 따라 해탈에 이른다.
하지만 이 14일 동안에도 니르바나에 이르지 못하면 이제 바르도체는 시드파 바르도 단계로 가게 된다. 이것은 21일(+14일)동안 이어지는데, 의식은 맑고 강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으며 업력은 매우 강하게 작동하여 마치 몸을 가지고 있었을 때처럼 감각기관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하여 이 단계에서의 환영은 우리를 해탈로 이끄는 보신(報身)이 아니라 육도의 아비규환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르도체는 “겁에 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무데로나 도망칠 것이다” 다시 말해 허둥지둥 아무 자궁이나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궁의 문을 막고, 그 환영이 업력의 결과일 뿐 마음의 본성은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 해탈의 길로 가거나, 아니면 비교적 좋은 자궁을 선택하여 환생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육도 중 인간계로 환생하는 것을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전생에 쌓아던 수행을 깔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윤리적 아젠다와 관련하여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인데, 우선 첫번째는 ‘퇴돌’, 즉 듣는 것 만으로도 영원한 자유, 즉 해탈, 니르바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비심을 갖고 죽은 자에게 이 텍스트를 읽어주는 ‘죽음의 벗’과 소리의 파동을 통해 이 텍스트에 연결되어 기어코 깨달음의 길로 나서겠다는 죽은 자의 염원이 공존한다. 텍스트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실상 평상시 충분히 수행을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높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든 중간 지성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면 낮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든 모두가 이 가르침을 통해 틀림없이 영원한 자유에 이를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심지어 “이것에 실패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살아있을 때 제대로 수행을 해야만 죽는 순간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강한 정신집중과 내관의 활성화를 통해 본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단박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의 귀의가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삼보를 본보기로 귀의한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해왔던 고통의 소멸과 영적인 상태에 믿음의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서도 동시에 자비심의 공동체 속에서 함께 구원받는다.
두번째로 내가 이 텍스트의 윤리적 함의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생’ 사상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화신(化身)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단어에는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구하지 않는다면 나 홀로 니르바나에 들지 않겠다는 부처님의 윤리적 결단이 느껴진다. 사족이지만 지혜 못지 않게 티벳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보리심’ 즉 자비의 마음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유정이 공동의 업력으로 묶여져 있는 ‘중생(衆生)’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리고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지금의 삶도 일종의 바르도라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죽음에 대해서만 모르고 질문하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아무런 질문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 <티벳 사자의 서>를 덮으면서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삶이라는 그 중유적 단계에 대해, 그리고 내 삶 속에 순간 순간 박혀있는 또 다른 바르도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자비심을 갖고 발원하고,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틈의 순간에 존재를 걸어보자. 백척간두 진일보!
“오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달으라.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류시화 번역,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p249 치카이 바르도 중)
-달라이 라마를 좋아하는 사람
-<티벳사자의 서>를 언젠가 한번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
-최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