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가 1966년에 쓴 책 『죽음』이 작년에 번역되었다. 나는 700쪽이 넘는, 죽음 사유의 기념비적 저작인 『죽음』을 읽기 전에 먼저 장켈레비치와 나눈 네 편의 대담을 실은 『죽음에 대하여』를 집어 들었다. 『죽음』의 대중적 판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대담집은 장켈레비치의 죽음 철학을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접할 수 있는 좋은 안내서다.(내용은 가볍지 않지만 책은 아주 얇다.^^)
장켈레비치는 누구인가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1903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인이었다. 그는 1933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철학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고 비시 정부가 들어섰을 때 장켈레비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대학교수에서 해임되고 국적도 박탈당했다. 그는 툴루즈에서 레지탕스 지하활동에 참여했다. 종전 후 1951년부터 1979년까지 소르본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인생의 절반은 철학에, 나머지 절반은 음악에 바쳤다고 할 정도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철학과 음악에 대한 책 40여권을 썼다.
장켈레비치는 1922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고 평생 베르그송철학을 떠나지 않았다. 장켈레비치는 프랑스 철학의 주류였던 적이 없었다. 그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흐름이었던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 양쪽 모두와 거리를 둔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던 장켈레비치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고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데 평생 헌신했다.
유대인으로 반유대주의와 투쟁하는 삶을 살았지만만 장켈레비치는 유대교의 신자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어떤 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고, 어떤 교의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무신자(無神者)였지만,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하여』에서 자기 자신을 무신자로 규정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무신론이 또 하나의 종교처럼 믿음의 체계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스스로를 비신자(非信者)이자 불가지론자라고 표현한다. 신자와 비신자의 결정적 차이는 죽음에 대한 태도이다. 신자는 종교의 죽음관과 내세에 안주할 수 있지만 비신자는 죽음에 대한 어떤 확정적 견해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비신자가 죽음에 대해 갖는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장켈레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에 대한 철학은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실제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3인칭 죽음, 2인칭 죽음, 1인칭 죽음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수많은 죽음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의식하고 살아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나도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난 후에야 우리 시대의 죽음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고, 나의 죽음을 실존의 문제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제 ‘내 차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장켈레비치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죽음을 3인칭 죽음, 2인칭 죽음, 1인칭 죽음으로 구분한다. 3인칭 죽음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그저 통계로 사실로 확인되는 비개인적인 익명의 죽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념으로서의 죽음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도 없다.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은 3인칭으로 호명되는 타자의 죽음과 다르다. 타자의 죽음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죽음이지만 나의 죽음은 그것을 초과하는 무엇인가를 포함하고 있다. “나의 죽음은 나에게는 모든 것의 종말이고 나 개인의 실존 전체의 결정적 종말이며 우주 전체의 끝이고 세계의 종말이자 역사의 종말이다.”(『죽음』) 그러나 나의 죽음이 나에게는 우주의 종말이라 하더라도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심상하고 “우발적인 사건”이며 “우주의 질서를 조금도 어지럽히지 않는 별것 아닌 소실”이다. 장켈레비치는 바로 이러한 부조화, “삶의 의욕을 잃게 하는 개인적 불행의 유일무이함과 죽음이라는 사건의 범상함 사이의 대조”를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2인칭 죽음은 3인칭 죽음과 1인칭 죽음의 사이에 있다. 2인칭 죽음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고 절대 익명의 죽음이 될 수 없는 죽음이다. 2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면서 나의 죽음과 가장 가까운 죽음이라 할 수 있다. 2인칭 죽음은 비극과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철학적 경험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비의미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죽게 된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 같고, 우리는 죽음을 가능한 한 연기하려 한다. 죽음과 삶은 어떤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송이 말한 눈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르그송은 눈이 없이는 볼 수 없으므로 눈은 보게 만드는 시각기관이지만 다른 한편 눈은 시각을 제한하는 장애물이라고 했다. 언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언어는 표현의 능력을 주지만 다른 한편 표현을 제한하는 장애물이 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우리의 생존을 방해하고 제한하지만, 그러나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열의, 활력도 생겨날 수 없다. “생의 힘과 강도를 제공”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 “이 딜레마에서 우리는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비의미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 존재는 살아 있는 존재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불멸의 삶, 죽지 않는 삶, 늙지 않는 삶이야말로 삶을 부패시키는 재앙일 수도 있다. 영원한 젊음은 늙음이 중단된 삶이다. 늙음이란 무엇일까? 장켈레비치는 늙음을 “생성의 불가역성”과 “생성의 질적 쇠약”이라는 생성이 가진 두 측면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늙음은 생성에 내재하는 “자연적이고 질적인 엔트로피다.” 늙음에도 인간만의 특징이 있다. 다른 존재에게 늙음이 단지 육체적 피로라면 인간의 경우는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생의 피로”가 수반된다. 바로 이 점,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생성 속에 있으면서 생성을 조망하는 충돌적 상황에서 생겨나는 죽음의 불안”을 느끼게 된다.
죽음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죽음을 끝없이 뒤로 미루는 것이다. 죽음을 연기하고자 하는 노력은 기술과 결합하여 늙지 않는 몸, 영원한 삶을 꿈꾸기도 한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마치 삶의 열정과 영원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장켈레비치는 말한다. “우리는 삶의 열정과 영원을 동시에 바라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짧지만 진정한 삶, 사랑을 주고 받는 삶을 택하거나 아니면 사랑 없는 무한정한 존재,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영속적인 죽음”,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장켈레비치는 이 양자택일 앞에서 두 번째 경우를 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안티에이징과 생명 연장 기술의 발달 앞에서 장켈레비치의 확신이 지금도 통할지,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의 신비
전통적인 종교도 내세를 통해 불멸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비신자인 장켈레비치는 내세와 불멸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성을 선고하는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장켈레비치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죽음을 하나의 사건의 의미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고 본다. 죽음 이편에서 죽음 저편으로 가는 정거장 같은 것이 죽음이 된다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진지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세를 믿지 않는 무신자, 죽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알 수 없다는 태도를 가지는 불가지론자라야 죽음을 진지하게 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것은 결코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나 경박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의 ‘신비’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3인칭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죽음의 밖에 있다. 그러나 1인칭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죽음의 안에 있게 된다. 죽음의 밖에서 죽음을 볼 때 죽음은 그저 평범한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죽음의 안에서 죽음을 생각할 때, “죽음의 안쪽에 가려져 있는 부분, 어두운 부분”이 바로 신비의 영역이 된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문제는 백일하의 투명한 대상처럼 내 앞, 내 밖에 존재하는 반면, 신비의 경우에는 내가 그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켈레비치는 이 구분을 통해 죽음은 우리에게 문제이면서 신비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의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죽음을 사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
나와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 우리는 슬픔과 비통에 잠기고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애도한다. 우리의 슬픔이 아무리 지극하다 하더라도 “죽음은 되돌릴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다.” 삶과는 전혀 이질적인 차원으로의 이행이 바로 죽음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죽음을 알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유 불가능성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음을, 그가 존재했음을 확정짓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침해할 수 없고 영속적이고 공고한 사실이며,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죽음은 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모든 것이 무화되어 사라진다 해도 그 메시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불가능한 죽음 앞에서 “이 심오하지만 단순한 메시지만이 죽음 앞에서 우리가 의지할 것으로 남아있다.”
“이 존재했음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고 소멸되어버린, 이름 없는 어린 소녀의 환영과도 같다. 잠시나마 그 소녀가 머물렀던 세계는 그녀의 짧은 체류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세계와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영원히 다르다.”(『죽음』) 내게 이 말은 레지스탕스로 살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고 반유대주의와 싸운 철학자 장켈레비치에 의한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조사처럼 들린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를 내 어머니의 죽음 앞에,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 앞에,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많은 죽음과 관련시킨다. 그렇게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2인칭이 된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 자리를 잡고,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철학을 시작하게 한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음이 곧 무이므로 나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내세의 부재는 나의 삶을 비어있음으로, 무에 이르게 하므로 나의 삶은 아무런 방향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를 수 없으므로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의 삶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경이롭고 매우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죽음을 전혀 모르고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무엇이든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모든 것은 삶의 변이형이고, 여전히 삶입니다. 저는 죽음을 전혀 모르고 알 수 없다는 태도가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나 경박함의 표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즉 종교 신자들이야말로 진지함 없이 죽음을 하나의 사건의 의미로 떨어뜨립니다.
한 운명이 끝이 나고 닫히면 그 어둠 속에는 의미가 비어 있는 일종의 메시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해도 나는 적어도 삶을 알았던 사람이 되고, 삶을 잃게 된다는 그 이유에서 어쨌든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한, 나는 죽음의 안이 아니라 그 밖에 존재합니다. 내가 죽게 되리라는 점에서 나는 죽음의 안에 있지만, 내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한에서는 그 안이 아니라 밖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사실의 확실함과 죽는 날짜의 불확실함 사이에 불명확한 희망이 흘러듭니다 오늘날 그 희망은 사실상 매우 커졌고 사람들은 80세 이상까지 거뜬히 살기 때문에 죽음이 연기 가능하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것과 친하게 살아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론적으로 자연적인 죽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내세가 아니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불안은 재현 불가능한 어떤 것, 누구나 최초이자 최후로 겪게 되지만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한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질서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도달하는 경험이지요.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거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내세를 말하지 않는 죽음에 대한 사유를 접하고 싶은 사람
장켈레비치라는 낯선 철학자가 궁금한 사람
나이듦연구소의 죽음탐구세미나 시즌2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
언젠가는 장켈레비치의 <죽음>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