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조회와 병원 장례식장 이외의 대안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경황도 없었지만, 장지(葬地)에 대해서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왔던 것에 비하면 장례 절차에 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40여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달랐다. ‘객사’는 안 된다며 시신을 집으로 모셔 왔고, 동네 장의사가 염을 맡았으며, 아버지 친구분들이 절차를 주관했고, 내 친구들이 관을 운구했다. 그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표준적인 장례 의례 ‘바깥’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이 문제에 대해 곱씹어볼 기회가 있었다. 우선 희정 작가의 <죽은 다음>을 읽었을 때였다. 이 책에서 특히 ‘한국 여성 1호 화장(火葬)기사’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이해루씨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그는 초보 장례지도사 시절, 어떤 유족이 염습에 직접 참여하겠다고 하자 짜증부터 났었지만, 두고두고 그 일이 생각났다고 했다. 상주가 장례 방식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구나. 나는 왜 어머니의 몸을 직접 닦고 수습해 수의를 입혀드릴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중환자실 임종 면회에서 비닐 가운과 장갑을 착용한 채 어머니의 손을 만져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처음에는 참가자들의 역할극 형태 모의 추모식을 생각했지만, 결국 꼭 1년 전에 돌아가신 한 회원의 어머니 추도식을 진짜로 열기로 결정했다. 메모리얼 테이블을 만들고 어머니 유품과 사진을 올려놓았다. 여기서는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영정을 만들고, 가장 하고 싶은 말로 고인을 기억하면 된다. 그 회원은 작은 화초를 들고 활짝 웃는 어머니 사진을 골랐다. 이어진 추모 영상 속 한 장면에서 모녀는 대화를 나눈다. 딸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는데 막상 당사자인 어머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답답한 딸은 계속 어머니를 다그친다. 우리는 “왜 엄마한테 따져”라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많은 딸의 마음속에는 비슷한 장면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사랑했지만 귀찮아했던 시간들, 안쓰러워했지만 야멸찼던 순간들. 나 역시 웃다 울었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추모식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순서인 헌화였다. 유족이 먼저 헌화하고, 참가자들이 뒤를 잇는다. 헌화가 끝나면 유족을 안고, 그 옆에 선다. 다음 사람이 또 꽃을 놓고, 앞의 사람들을 안고, 옆에 나란히 선다. 점점 유족과 문상객이 분리되지 않은 채 추모와 허깅의 둥근 원이 만들어졌다. 대부분 서로를 몰랐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유한한 존재라는 것,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아 그 상실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도저한 사실이 우리를 애도의 공동체로 만들어주었다. 온기와 슬픔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14년 전 공동체에서 마을공유지를 만들 때, 지번을 따 ‘8746(파지사유)’이라 이름 붙였던 이유는 그곳이 특정 용법에 갇히지 않고 매번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곳은 카페, 공동식탁, 마을 작업장으로 종횡무진 변신해왔다. 아이 돌잔치와 스몰 웨딩도 열렸다. 그리고 이번엔 ‘애도가 있는 추모식’을 한 것이다. 하여 나도 언젠가 죽게 된다면, 이곳에서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소망 하나를 품게 되었다. 마을공유지가 그렇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장례식장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죽음을 다시 공동체로 돌려놓는 일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