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입원하면서부터 나는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었다. 보호자는 의료법에 따라 진료와 요양에 대해 병원과 의사소통을 하고, 청구서를 받고 경제적 책임을 지는 법적 존재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관계에 있는 민법상 부양의무자 혹은 별도의 법적 절차에 의해 자격을 부여받은 대리인에 한한다. 병원에서는 어머니에게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오는 연락이 한가한 용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2년여 동안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기 전부터 이번엔 무슨 일일까 하는 걱정에 가슴이 떨려오곤 했다.
2년여 동안 어머니는 정신병원 입원, 종합병원에서 수술, 요양병원, 두 군데 2차병원에서 수술, 다시 요양병원, 이렇게 여러 병원을 두루 거쳤다. 2021년 한 해 동안 어머니는 무려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 1월에는 고관절 수술, 8월에는 직장과 질 사이에 생긴 누공을 막는 두 번의 수술, 11월에는 괴사된 피부를 제거하는 욕창 수술. 모두 다치거나 문제가 생긴 몸을 치료하기 위한 수술이었지만 어머니의 몸은 회복되지 않고 무너져 갔다. 그 시간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회한 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아니, 가능하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가 보호자로 살았던 시간이다.
종합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날, 어머니는 넘어져서 골절상을 입었다. 코로나 기간이라 수술할 병원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응급차를 타고 병원 세 군데를 전전한 뒤에야 네 번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무릎부터 고관절까지 부서진 뼈를 붙이는 수술이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어머니는 자신이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탓에 병원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면 팔다리를 침대에 묶어야 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니 어머니는 더 강하게 몸부림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술 후 처방된 수많은 약을 감당하지 못한 때문인지 혈변이 나왔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간병하러 들어간 동생은 통증으로 아파하는 어머니를 달래고 하루종일 기저귀를 갈아대야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애쓰는 딸을 아줌마라 불러 동생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퇴원 시한이 가까워오자 정신도 몸도 온전치 못한 어머니를 어디로 모셔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어머니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집으로 모신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나는 병원의 진료협력센터에서 받은 재활 요양병원들의 연락처를 들고 상담을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요양병원과 장기요양 보험 적용을 받는 요양원도 구별하지 못했고, 재활전문 요양병원과 노인들이 장기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돌봄 초보였다. 수술후 재활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받는 요양병원들은 어머니의 나이와 정신과 입원 병력을 듣고 난색을 표했다. 다행히 신경과가 있으면서 재활치료가 가능하고 나름 평판이 좋은 노인 전문 요양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으로 옮긴 후에도 제대로 드시지를 못했고, 여전히 설사가 잡히지 않았다. 왜 재활을 해야 하는지 모르니 재활에 대한 의욕도 없었다. 요양병원 주치의는 어머니와 같은 노인 환자의 경우는 치료를 하려면 기력회복이 최우선순위라고 했다. 주치의는 수액이나 영양제도 좋지만 밥을 잘 먹어야 한다며 말기암 환자에게 처방하는 식욕 촉진제를 처방하겠다고 했다. 종합병원에서는 어머니의 상태에 대한 종합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는데 요양병원의 신경과 의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기분이 묘했다. 나로서는 수술 잘하기로 소문난 종합병원 교수나 전문의보다 노인 환자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어머니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요양병원 주치의가 더 믿음이 갔다.
희망과 두려움 사이, 일희일비의 시간
어머니의 몸과 마음은 맑음과 흐림을 오갔고 그때마다 나는 일희일비했다.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하여 정신병적 우울증으로 진단받았던 어머니는 고관절 수술 이후 그냥 보통의 치매환자가 되어버렸다. 수술 후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자 우울증이냐 치매냐를 따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바이탈 수치가 계속해서 위험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혈소판 수치가 떨어지면 수혈을 했고, 다리 부종이 심해지면 알부민 주사를 놓고, 염증 수치가 오르면 항생제 주사를 처방했다. 덩달아 체온과 혈압과 당뇨 수치가 오르내렸다. 주치의로부터 전화가 오면 불안했다. 전화가 오지 않으면 내가 병동으로 전화를 해서 괜찮다는 소리를 들어야 안심이 되었다. 그때마다 동생들과 그 상황을 공유하는 것도 나의 역할 중 하나였다. 어머니의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려움이 점점 커져갔다.
바이탈이 나빠질 때마다 큰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가겠냐고 했지만 나는 매번 굳게 마음을 먹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응급실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것도, 다시 이 검사 저 검사를 받기 위해 피를 뽑고 사진을 찍으며 검사실들을 전전하는 것도 어머니를 괴롭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혈변이 나온 어느날 어머니는 임종기 환자가 머무는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 처음으로 이러다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치의는 무심하게 어머니처럼 낙상 후에 심신이 허약해진 노인들은 대개 여명이 2년 정도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 어머니의 몸상태가 조금씩 좋아졌기 때문에 나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요양병원과 일반 병원을 오가는 동안 여명 2년이라는 말은 마치 어떤 예언처럼 결코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비대면 면회만 허락되던 시기인지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관절 수술경과를 확인하기 위해 응급차를 타고 외래진료를 받으러 오고 갈 때가 어머니 손을 잡고 얼굴을 만지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외래진료를 다닌 지 5개월이 지나서야 수술한 뼈가 잘 붙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걷기 연습을 시작해도 된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와상 환자로 이미 6개월을 보낸 어머니는 전혀 걸을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근육이 빠져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는 뻣뻣한 나뭇가지처럼 굳어만 갔다. 그 뒤로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영영 땅에 발을 딛지 못했다. 만일 우리가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지 않고 집에서 돌보았다면 혹시 걸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외래진료를 받으러 나온 어머니
누공 수술, 후회와 자책
코로나 4단계가 발동되었다. 영상통화만 하고 면회를 못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주치의로부터 부인과 외래진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의 질로 변이 새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간 2차 병원에서는 직장에 누공이 생겨 변이 질로 샌다고 했다. 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설사가 멈추지 않아 소화기 내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시경 결과 장이 파인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그 때부터였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런 게 노화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노화란 주름살이 생기고 근육이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새고 기력이 없어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 몸속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노화라는 걸 어머니의 누공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의료의 시선 하에서 신체의 노화는 자연스런 해체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곧바로 해결해야 할 질병이 되고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공을 확인한 의사는 두 가지 수술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직장에 난 구멍을 꿰맨 뒤 경과를 지켜보는 간단한 수술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공을 막은 뒤 배에 구멍을 뚫어 직장을 밖으로 빼는 수술을 하고, 몇 개월 후 누공이 막힌 것을 확인 한 후 다시 뱃속에 집어넣는 2차에 걸친 복잡한 수술이었다. 고관절 수술 후의 위험한 국면을 넘기고 이제 겨우 회복기를 맞고 있는데 다시 수술이라니!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자 의사는 만일 자기 가족이라면 당연히 수술을 받게 할 거라고 했다. 당신이라면 질로 변이 나오는데 그냥 두고 싶겠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게다가 누공을 막지 않으면 몸속에서 새는 똥 때문에 세균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수술을 견디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수술을 하지 않고 누공이 뚫려있을 경우에 감수해야 하는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의사는 누공 수술은 간단한 수술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며 적극적으로 수술을 권유했다. 형제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렸다. 당장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수술을 하면 구멍이야 막겠지만 몸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혹시 닥칠 지도 모를 감염이 걱정이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어머니의 몸상태인지라, 수술을 해도 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 같았다.
우리는 간단한 수술을 선택했다. 그러나 수술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누공이 다시 뚫렸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직장을 배로 뺀 뒤 다시 집어 넣는 2차에 걸친 복잡한 수술을 할 것인가. 나는 이왕 실패했으니 서두르지 말고 경과를 두고 보자고 더 강력히 주장하지 못했던 게 지금도 후회가 된다. 결국 대변 주머니를 달아야 하는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두 번째 수술후 예후가 아주 나빴다. 염증수치가 높아졌다. 의사는 어머니의 복벽이 예상외로 얇아서 장루와 복벽 사이에 변이 차서 그렇다고 했다. 고령의 환자를 수술하면서 그 정도도 예측을 못했다는 것에 속이 상했다. 나는 수술 결정에 대한 후회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마저 들었다.
두 번째 위기였다. 염증을 잡으려고 항생제니 뭐니 수액을 계속 넣으니 뼈만 남았던 앙상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머니는 물을 삼킬 기운도 없었다. 영양 공급이 안되자 폐에 물이 찼고, 물을 빼는 관을 삽입하는 시술을 받아야 했다. 어머니가 회복되지 않자 의사는 영양 공급을 위해 콧줄을 달겠다고 했다. 콧줄이 반드시 필요한 조치인지 아닌지, 동의해야 할지 반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때에야 콧줄을 달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있는 옆 침대 노인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어머니는 며칠 후 콧줄을 뗐지만, 콧줄이 생명을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연명치료의 시작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 며칠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정식으로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맑았을 때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좋은 보호자가 되고 싶었다
8월초에 첫 번째 누공 수술을, 8월말에 두 번째 누공 수술을 한 어머니는 석 달이 지나도록 퇴원할 수가 없었다.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부종이 꺼지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다리에 생긴 작은 상처가 커지고 괴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이번에는 국소마취로 괴사된 피부를 제거하는 욕창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술이 수술을 부르는 저주가 내려진 것만 같았다. 그러잖아도 병원과 의사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새로운 수술 제안에 화가 치밀었다. 통합 간병을 하는 병원에서 욕창이 생겼는데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도 못하는 내가 보호자가 맞나 싶었다.
나는 병원을 옮겨 욕창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또 다른 이슈가 생겼다. 그 병원에서는 걸핏하면 터지고 새는 대변 주머니의 상태를 보더니 이렇게 된 건 어머니의 복벽이 얇거나 피부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번 병원의 수술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그냥 놔두면 염증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으니 재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뱃속에 장을 집어넣는 수술도 아니고, 처음 한 1차 수술을 수정하는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니! 그 수술을 견디지 못해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를 두고 수술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의사들에 대해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방법은 그들의 머리 속에는 없는 것 같았다. 수술을 한다는 건 어머니를 사지로 몰아놓는 결정이라고 생각한 나는 이번에는 절대로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의사는 자신의 진료과목과 관련한 진단과 처방의 전문가일 뿐이었다. 결국 최종적인 종합적 판단은 보호자의 몫이었다. 나는 새로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런 책임을 진 보호자로서의 무능을 절감하고 자책했다. 수술을 하느냐 마느냐, 콧줄을 다느냐 마느냐, 병원을 옮길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중요한 결정의 순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의사와 상담할 때마다 야단맞는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짧은 상담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꼼꼼하게 메모를 해가서 묻고 확인하지만 의사와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을의 위치가 되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중에 이런 문제를 터놓고 의논할 전문의료인 한 명 없다는 것에 공연히 화가 나기도 했다. 인터넷 검색에 한정 없이 시간을 투여하고,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병원을 성토해도 그 씁쓸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 감정을 다스리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음이 시끄러우면 나가서 걸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을 했다. 왜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한 보호자들을 돕는 기관은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입원을 결정할 수 있을 때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불평등에 나 역시 한몫하고 있다는 게 영 불편했다. 보호자가 된 이상 어머니를 대신해서 의료정보를 요구하고 환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마땅한 데도 당당하게 권리 주장을 못하고 의료시스템과 구조를 탓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도 떨쳐지지 않았다.
누공 수술 전 어머니, 그러나 수술 후 어머니는 미소를 잃어갔다.
돌봄인가, 관리인가
어머니는 배에 대변 주머니(장루)를 붙이고, 엉덩이에 욕창이 생긴 몸으로 4개월 만에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갔다. 새로 생긴 욕창의 상처는 크고 깊었다. 어머니는 상처 때문에 아픈 엉덩이를 편하게 내려놓지 못하니 끊임없이 몸을 뒤척이며 힘들어 했다. 장루는 어머니의 행동반경을 더 심각하게 제한했다. 배 옆에 장루를 붙이고 있으니 몸을 자유롭게 뒤척일 수도 없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장루 부위가 가려워 긁다가 장루를 터뜨리기 일쑤였다. 방귀를 많이 뀌거나 소화가 잘 안되면 장루에 가스가 차서 터지기도 했고, 배에 접착이 잘 안되어 장루가 떨어져서 몸이나 시트에 변을 묻히고 흘렸다.?
요양병원으로 돌아간 후 어머니를 괴롭힌 새로운 증상은 소양증(가려움)이었다. 요양병원 주치의는 피부가 얇아지고 건조해서 생긴 증세라고 했다. 긁으면 상처가 나고 상처가 나면 또 긁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비대면 면회를 할 때 어머니는 보호 장갑을 낀 손으로 가려운 곳을 긁느라 오랜만에 만나는 자식과 남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면회를 마치고 우리 모두 눈물 바람이었다. 매일 어머니를 병원에 가둬두고 있다고 자식들을 비난하던 아버지는 “이 무슨 업보냐?”며 통곡을 했다. 나와 동생들도 이 모든 상황이 우리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상통화로도 어머니의 가려움증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외래진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양병원에 코로나가 번져 코호트 격리가 계속되는 바람에 어머니를 외래로 바로 모시고 갈 수도 없었다. 격리가 풀려 피부과 외래로 모시고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설에 있는 환자들에게 흔히 생기는 옴이었다. 2~3주면 옴은 완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옴 치료를 마쳤는데도 어머니는 만성적 가려움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상태가 안정되었다가도 염증 수치가 올라가고 열이 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특정한 원인이 있는 질병의 증세가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력이 고갈되어가고 있다는 신호로 느껴졌다.
나는 요양병원 주치의가 말한 여명 2년이 계속 걸렸다. 비대면 면회에서 대면 면회로 면회방식이 바뀌면서 매번 더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보게 되자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몸무게가 계속 줄고, 인지능력이 계속 나빠지고 있는 것도 나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의사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시설에서의 돌봄이 관리인지 돌봄인지 모르겠다는 회의가 점점 깊어지면서 어머니가 아직 우리를 알아보는 지금이 어머니를 직접 돌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어머니를 집에서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