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한 공동체 출신 김고은 작가가 은둔 고립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너무 희미한 존재들>을 출간했다. 그는 ‘은둔 고립’을 통계에 갇힌 사회현상으로 박제하는 대신, 에두아르 콘의 ‘혼맹’ 개념을 빌려와 존재론적 층위에서 재해석한다. 스스로를 ‘자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세계와의 연결이 끊겨버린,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정의한 것이다. 관점을 이렇게 이동시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까?
공동체의 다른 청년이 그 책에 열렬히 반응하며 북토크를 열었다. 자신이 그러했듯, ‘혼맹’에 빠졌던 다른 청년들도 이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행사에서 맨 먼저 입을 뗀 사람은 물류센터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10여년 전, 가족과 소통이 되지 않아 무작정 집을 나와 고시원 침대에서 천장만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내일이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매일 눈을 떠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는 당시의 감정을 “크게 괴롭지는 않지만, 전혀 즐겁지도 않은 상태, 평온한 듯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저릿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가족 이야기도 뒤따랐다. BJ에게 후원하면서 수백만원의 퇴직금을 써버린 언니의 사례, 그리고 한 중년 여성의 떨리는 증언까지. “저에게는 서른한 살 된 고립청년 딸이 있는데요…” 그러나 이야기는 몇마디 이어지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이었다. 이때 사회자가 “말하다가 그만두셔도 됩니다”라며 갈무리하자, 공감과 격려가 담긴 작은 웃음들이 번졌다. 콘이 묘사한 아마존 밀림에서처럼, 인간의 상징 언어 너머 미세한 신체적 떨림, 침묵, 공기의 온도마저 소통의 기호가 되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내 주변에는 이런 청년이 많았다. 취업에 연거푸 실패하며 2년여를 은둔했던 조카, 소위 ‘섭식장애’를 겪던 친구 딸…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고립이 깊어지는 시기에는 많은 이들이 씻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태를 거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정직한 신호를 지속적으로 ‘오독’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의지가 약할까, 왜 이렇게 예민할까, 심지어는 너무 징징거리는 것 아닌가라면서 판단하고 다그치며 계몽하면서 그들을 몰아세웠다. 결국 콘이 말한 의미 그대로, 혼맹에 빠진 자, 타자의 영혼을 읽어내지 못한 채 사물화된 시선으로 그들을 대상화한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슴이 사자 피해 숨으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그러니 그 용기를 알아보고 그들의 웅얼거림에 귀 기울이는 일만이 우리를 인식의 마비에서 구원할 유일한 길이다. 숲이 그러하듯, 우리도 서로의 영혼을 기어이 알아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