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불교의 마음, 업, 우주에 대한 길잡이』
(Rebirth: A Guide to Mind, Karma, and Cosmos in the Buddhist World), 로저잭슨 지음, 운주사
종교와 죽음에 대한 책으로 이번에는 불교의 윤회와 업에 대한 연구서, 미국의 불교학자 로저 잭슨의 『윤회』를 골랐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윤회와 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2,000년 이상 이루어진 광범위한 불교의 담론을 조사하고 정리했다고 밝힌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먼저 윤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성과를 소개하고(이 분야의 전문가 오베예세케레라는 학자를 알게 되었다), 인도에서의 윤회론이 어떤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지 살핀 다음, 불교사를 통해 전개되어 온 윤회에 대한 담론과 실천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서구 불교학자들의 윤회에 대한 입장차이를 소개한다. 나는 마지막 부분을 특히 흥미롭게 읽었다. 이 리뷰에서는 윤회를 비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옹호해 온 불교사의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그런 뒤 현대 서구의 불교학자들이 제기한, ‘붓다는 윤회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저자의 비평적 관점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죽음에서 환생까지
티베트불교의 죽음관과 윤회관을 알 수 있는 책, 『티베트 사자의 서』는 호흡이 멈추는 순간을 삶이 끝나는 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나서 육신을 갖고 살아가는 시간을 생유(生有), 임종을 맞이하는 시간을 사유(死有),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을 중유(中有)라고 한다. 중유의 존재는 중음신(中陰身)이라고도 한다. 이 각각의 시간을 부르는 말이 ‘바르도’다. 바르도는 ‘틈’, ‘사이’를 뜻한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현생의 바르도에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 해탈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마음을 잘 닦은 사람은 임종의 바르도에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분별심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임종의 바르도에서 해탈하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법성의 바르도에 들어간다. 법성의 바르도는 생물학적으로는 죽은 상태지만 그가 쌓은 업의 연속성이 이어져 미세한 정신의 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 다음에는 윤회의 세계로 들어간다. 윤회의 세계는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인간계, 천상계의 다섯 혹은 여기에 아수라계가 포함된 여섯이 있다. 이 중 하나의 세계에 태어나면 다시 삶이 이어진다.
티베트 불교의 사후세계에서는 죽은 이후에도 환생하기까지 49일여 동안 계속 해탈의 기회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티베트 불교의 윤회관이 불교의 윤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스리랑카,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 남방의 상좌부 전통에는 바르도나 중음신이 없다. 상좌부는 죽음과 동시에 자신이 쌓은 선업과 악업의 결과로 윤회계 중 한 곳에 태어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살면서 지성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거나 죽은 후 친지들이 지성으로 기도하면 죽은 사람은 윤회계의 밖에 있는 극락에 태어날 수 있다는 정토 신앙이 인기를 끌어왔다.

티베트 생사윤회도
윤회라는 뜨거운 감자
불교전통 안에서 윤회는 불교적 세계관으로 당연시되어왔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믿음과 실천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이나 실천의 다양함과 상관없이 철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윤회는 언제나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불교의 윤회론을 비판하는 쪽은 크게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해왔다. 하나는 인도 철학 내의 유물론자들의 문제제기로 이들은 윤회는 없다고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힌두교 철학으로부터의 도전이다. 개인의 본질로서 아트만의 존재를 상정하는 힌두교는 아트만 없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지 따져 물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불교측의 클래식한 대답 교본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에 성립한 『밀린다왕문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린다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에 세워졌던 박트리아왕국의 그리스계 왕 메난드로스 1세로 알려져 있다. 이 대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의 기록이 아니라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밀린다왕과 불교의 비구인 나가세나의 대화는 흥미롭다.
밀린다왕은 나가세나 비구에게 “태어난 자, 나가세나는 같은 존재로 남아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는가?”라고 자아의 동일성에 대해 묻는다. 그에 대해 나가세나는 “같은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라고 답한다. 유아일 때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대답이다. 나가세나는 타오르는 등불의 비유와 소에서 짜낸 우유가 응유, 버터, 버터 기름으로 변해가는 것의 비유를 들어 자아의 동일성이 없음에도 연속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저녁에 타오르기 시작한 등불과 한밤중의 등불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우유가 치즈가 되고 요구르트가 되었을 때 그것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것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윤회의 연속성을 비유로서 답한 것이다.
또 말린다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나가세나는 그것은 이전의 자아와 동일한 자아가 아니라 오온이라고 답한다. 새로 태어난 오온은 이전에 죽은 오온과 같지 않지만, 새로운 오온이 생겨나는 것은 이전의 오온이 행한 업을 통해서이다. 나가세나는 그것을 추위를 피하기 위해 피운 모닥불이 들판을 태웠을 때 전자의 불과 후자의 불이 다르기 때문에 불을 피운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이전의 오온으로서 악업을 지었다면 이후의 오온도 그 악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밀린다왕문경』은 과학적 증명은 아니지만 비유를 통해 윤회의 실재성을 납득시키려 하고 그것은 나름대로 효과적인 결실을 얻은 것 같다. 비유적 논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의 전생과 다른 존재들의 내생을 보는 숙명통과 천안통을 얻었다고 설했다. 붓다의 말이 진실하다고 본다면, 이것은 경험적 논증이 된다. 또 붓다는 업과 윤회를 부정하고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경우 만일 업과 윤회가 있다면 그들은 불운한 결과를 얻을 것이요, 업과 윤회를 긍정하고 선행을 쌓는 사람은 행복한 내생을 얻게 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파스칼의 신의 존재를 믿는 자가 내기에서 이긴다고 한 명제를 연상시키지만, 회의론자를 설득하는 실용적 접근법이라 부를 만하다.
윤회에 대한 합리적 논증
빨리어 『니까야』를 통해 우리는 윤회에 대한 비유적 논증, 경험적 논증, 실용적 논증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윤회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도 그치지 않았다. 그 첫 번째는 12연기를 통해 윤회의 프로세스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붓다 입멸후 붓다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부파불교의 여러 학파들 중 하나인 설일체유부는 12연기로 윤회의 발생을 해명했다. 연기론은 무아론과 함께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구성한다. 붓다는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고 소멸하는가의 문제를 연기를 통해 해명해냈다. 연기는 불변하는 실체라 할만한 것은 없고 모든 현상이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원리이기도 했다. 설일체유부는 12연기의 열두개의 항목을 1)과거의 행위(원인/무명, 행), 2)과거의 업에 의한 현재의 결과(결과/식, 명색, 육입, 촉, 수), 3)현재의 행위(원인/애, 취, 유), 4)현재의 업에 의한 미래의 결과(결과/생, 노사와 번뇌)의 묶음으로 분류함으로써 윤회의 발생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해냈다.
두 번째의 합리적 논증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승불교는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에 대승 경전을 통해 부파불교의 실재론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반야심경』은 오온도 공하고, 사성제도 공하고, 십이연기도 공하므로 그것들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폈다. 위대한 중관학자인 용수(150?~250?)는 『중론』에서 ‘윤회와 열반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24품)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간의 업론과 윤회론을 뒤흔드는 이런 급진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통의 업-윤회의 우주론은 무너지지 않았다. 용수가 붓다의 가르침에는 관습적 가르침과 궁극적 가르침이 있다는 두가지 진리론을 폄으로써 윤회와 업의 가르침과 공성의 가르침 둘 모두를 온전히 살려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합리적 논증은 인도불교의 논리적 인식론의 전통을 창시한 법칭(다르마끼르띠, 7세기)에 의해 이루어졌다.(『윤회』 10장) 법칭은 초감각적 경험이나 실용적 고려, 이상적인 도덕론, 유추에 의지하지 않고 당대 인도철학학파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형식적 추론방식으로 윤회의 타당성을 증명하려 했다. 복잡한 논리적 증명인 법칭의 윤회 증명의 핵심은 사과씨에서 사과가 나오고 망고씨에서 망고가 나오듯이 육체적인 것에서는 육체적인 것이 나오고 정신적인 것에서는 정신적인 것이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법칭은 몸과 마음이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인정하지만,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르고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죽을 때 몸은 해체되지만, 마음은 후속되는 마음의 원인이 된다고, 과거생의 마지막 마음이 다음 생의 첫 번째 마음의 원인이 된다는 것으로 윤회의 기제와 타당성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마음에 속하는 자비와 연민, 지혜와 같은 긍정적 자질은 지난 생을 기반으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법칭의 윤회의 실재성과 영적 해탈의 가능성에 대한 논증은 이후 인도불교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붓다는 윤회를 중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불교 전통 내에서 윤회와 업이 어떻게 해명되어 왔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빨리어 경전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하는 현대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빨리어 경전의 신구층을 구별하고 붓다가 가장 오래된 경전에서는 우리의 일반적 믿음과 달리 윤회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가장 오래된 층에서는 윤회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 붓다는 업과 윤회에 대한 당대 사상가들의 우주론과 형이상학적 견해를 비판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고, 우주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정견(正見)’을 확립하는 데는 관심이 적었다. 3) 붓다가 윤회를 가르쳤을 때조차 윤회는 당대의 세속의 믿음과 관습의 틀 안에서 설해진 방편설에 불과했다.
1)과 2)의 주장과 관련하여 이들이 근거로 삼는 경전은 『숫타니파타』의 「여덟게송의 품」이다. 『윤회』의 저자 로저 잭슨은 「여덟게송의 품」에서 윤회가 주요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존재의 상태를 꺼리는 성자에 대한 언급이라든지, 건너편 피안에서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등 더 큰 불교의 맥락에서 미래의 재생을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의 결론은 경전이 업과 윤회의 세부 사항에 열중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윤회에 대한 전망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는 것이다. 「여덟게송의 품」의 「마간디야경」에서 정견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2)의 주장 역시 재검토된다. 또 이들이 근거로 삼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는 주장도 확정적으로 입증될 수 없으므로 다른 빨리어 『니까야』와 이른바 가장 오래된 층의 경전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구분하려는 유혹을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제안한다.
실제로 『니까야』를 읽어보면 붓다의 설법에는 윤회와 관련된 것이 결코 적지 않다. 확실히 붓다와 그의 제자들에게 해탈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것이었다. 3)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붓다가 윤회를 말할 때 그것은 윤회의 실재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기보다는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강조점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로저 잭슨은 붓다가 당대에 전통적인 믿음체계를 가진 사상가들에 비해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스승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붓다에게 윤회는 단지 방편설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윤회를 빼고 붓다의 가르침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붓다가 당시의 보편적인 우주론이나 형이상학적 믿음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보는 것은 붓다를 “역사와 문화 밖으로 내보내는 것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로저 잭슨의 비판을 수용한다면 지금 우리가 붓다의 윤회론을 검토할 때도 역시 오늘날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 과학적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전통적인 불교적 세계관을 묵수하는 양극단의 위험을 피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윤회를 믿어야 할까 믿지 말아야 할까
붓다 이후 2500여년 동안 전개되어온 윤회에 대한 이론적 논의나 기술적 설명을 단 몇 마디 말로 정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윤회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오늘날은 어떨까? 로저 잭슨은 현대 불교도들은 윤회에 대해 네 가지 접근 방식중 하나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요약한다. 그 네 부류는 1) 문자주의자 2) 신전통주의자 3) 근대주의자 4) 세속주의자다.
1) 문자주의자는 전통적으로 훈련된 상좌부 승려와 티베트 승려를 포함하여 업-윤회 우주론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들이다. 2) 신전통주의자는 현대적 용어로 전통적 우주론과 형이상학의 정당성을 추구한다. 진화론이나 양자물리학의 용어로 윤회를 설명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3) 근대주의자는 전통적 우주론과 형이상학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이들은 업과 윤회를 주로 심리학적이고 실존적인 용어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4) 세속주의자는 윤회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현대철학이나 심리학과 불교를 연결지을 때 윤회를 대체로 무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네 종류의 사람들 사이의 경계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로저 잭슨은 가령 달라이라마의 경우 문자주의를 신전통주의나 근대주의로 읽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주의에 가까운 주장을 하기도 하는 복합적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이들과는 약간 결을 달리하는 다섯 번째 그룹이 있다. 로저 잭슨이 이들에게 붙인 이름은 5) 근원적 문화비평으로서의 문자주의다. 이들은 2500년 전 붓다가 당시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도전했던 것처럼 불교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불교를 과학, 심리학, 현대철학과 일치시키려 하지 마시오. 그것을 정당화하려 하지 마시오. 오히려 근대성과 그 현실 안주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해하시오.” 이러한 관점으로 불교를 해석하는 것은 앞선 네 그룹에 비해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 과제에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윤회에 대한 네 가지 접근방식 중 하나 또는 몇가지 조합을 취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나는 어떤 입장일까 자문해보게 된다. 사이버네틱스와 차이의 철학과 연기를 소통시켜보려 하고 인지과학 및 뇌과학의 성과와 유식학을 연결시켜보는 나는 신전통주의자일까, 근대주의자일까? 아니면 죽음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논외로 밀쳐두고 불교의 가르침을 단지 지금 여기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용한 도구로 이용하는 세속주의자일까? 로저 잭슨은 자신을 근대주의자에 배속시킨다. 그는 윤회와 업에 관한 한 불가지론자이지만, 업과 윤회에 대한 형이상학이 실제로 사실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근대주의자로서 자신은 비록 윤회와 업이 실재라는 믿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윤회와 업이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그는 ‘as is’가 아닌 ‘as if’ 불가지론이라고 한다.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 역시 확실한 것이기보다는 대개는 ‘관습’이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불교의 윤회와 업의 가르침이 객관적 실재라는 환상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 로저 잭슨이 말하는 바 ‘as if’이다. 어쩌면 윤회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윤회는 증명될 수 있는가, 아닌가의 양자택일만이 우리의 선택지일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을 사실로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윤회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진지하게 불교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삶을 수행의 장으로 바꾸고, 자신의 영적 해탈과 다른 존재의 행복을 둘로 보지 않는 자리이타의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로저 잭슨에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