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하수선한가 보다. 친구들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가 제법 뜨겁게 자리 잡는 시간이 많아 졌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니 정치 성향이 대부분 비슷한데, 사안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내는 친구가 등장하고 토론이 뜨거워진다. 토론이 아니라 논쟁으로 바로 번진다. 의견이 갈라지는 지점은 대략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조금 좁혀보면 직업과 관련되어 보인다. 특히 고위 공직자로 은퇴한 친구들이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에 서곤 한다. 그럴테지….. 그런데, 그 방식이 좀 의아하다.

예를 들면, 연전에 후쿠시마 오염수의 방류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이다. 외교부 출신 동창생은 지금 주변의 외교가 얼마나 심각하고 힘든가를 말하면서, 애국하는 심정으로 주변국인 일본의 입장에서도 보아야 한다며, “그 오염수를 내가 마실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더욱이 IAEA 사무총장이 방한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처리한다고 말하는 데에도 믿지 않는다고 혀를 찬다. 해수부 출신 동창생은 피해유무가 명확히 판명되지 않았는데, 수산물 소비가 급감하여 우리 어민들의 피해를 주는 무분별한 여론몰이는 안된다며 자중하기를 요구한다. 질문을 했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또 일반인보다 (외무)공무원이 더 애국자라는 전제는 어디에 근거된 것인가? 근거없는 일방적 일반화의 허점에 물음표를 던졌다. 또 피해자를 어민으로 한정하면 그럴 수 있지만, 문제를 우리 국민 전체의 안전으로 범위를 넓히면 문제 설정이 달라짐을 상기시켰다. 몇 번의 이야기가 오간 뒤에, 내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40여년의 터전이었던 직장을 대변하는 마음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태를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 보려는 대화의 예절 측면에서는 시쳇말로 ‘꼰대’같은 모습이었다.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당신도 가끔 꼰대같은……?
학창시절 우리들에게 ‘꼰대’는 무언가 꽉 막힌 꼬장꼬장한 선생님을 지칭하며 경멸했다. 친구들끼리는 패기만만하고 세상을 구하려는 듯한 포부와 생각이 없으면 ‘꼰대(노인)’ 취급하며 놀렸다. 그런 친구들이 은퇴 즈음에 들어 꼰대화되는 경향을 자주 본다. 그 들의 정책(세금 등)에 따라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보수정당을 정치적 지지 정당으로 선택하는 것은, 노년에 안정을 추구하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것이니 이해할 수 있다. 가치의 변화이니 인정할 수밖에. 그런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사고와 행동이 자신의 견해와 다를 경우에 약간의 폭력성과 함께 무턱대고 배제하려는 성향을 보이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품위없는 ‘꼰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날 동창생들과의 논쟁과 기분을 아내에게 얘기하면서, “나이들면 왜들 꼰대처럼 되는 것이지?’ 라고 투덜거렸다. 아내는 바로 ”당신도 가끔 그런데요!?“ 한다. ‘엥? 뭐라고요? 내가 꼰대같다고요?’ 아니, 내가 그 놈들과 같은….. 일단 섭섭하다. 참고 있지만, 화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바로 이어지는 말, ”과속 방지턱 때문에 당신이 매번 욕하잖아요. 그 차안에 나밖에 없으니, 그 욕을 듣는 사람은 나뿐이지요.“ 어라? 그런가?

문탁에서 우리 집까지 가는 5km 남짓 거리를 지나려면 30km 속도제한 CCTV가 4개, 과속 방지턱 32개를 지나야 한다. 어떤 방지턱은 높아서 20km의 속도에서도 반드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그 중 14개는 가짜 방지턱인데, 진짜로 속아 주어야 한다. 나는 매번 그 놈의 방지턱에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느낌을 가진다.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정신을 집중해서 건너지 않으면, 차가 덜컹하기 일쑤이다. 우라질! 나쁜 놈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누군가가 나로 하여금 브레이크를 밟게 만드는 권력의 힘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내가 아닌 일반 도로에 이렇게 높고 많은 방지턱이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푸념에서 시작해서, 기술철학이 정치철학으로 이용되는 사례로까지 선정되어서 ㅇㅇ시를 ㅇㅇ경찰서(놈들)을 비난하는 레퍼토리를 주욱 읊어댄다.
아내가 말하는 것은, 공동의 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해당 기관과 소통하여 해결방법을 찾을 것이지 이렇게 불평의 강도를 높여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고, 매번 옆에서 듣고 있는 아내만 기분이 상하지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에 자주 TV를 보며, 특히 뉴스를 보며 주변사람의 기분만 나쁘게 하는 소용도 없는 화를 내곤 한다. 아니, 화가 난다. 그리고 그 화를 처리하는 방법이 영락없는 꼰대 짓이다. 왜 그럴까?
뇌가 꼰대화의 원인이 된다.

뇌과학자인 나카노 노부코는 그의 책 『정의중독』에서, “벌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타인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는 상태를 정의에 취해 버린 중독 상태, 이른바 ‘정의 중독’ 상태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태는 뇌의 특정부위의 미발달 혹은 쇠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전두엽의 특정부위(전두전야)에 상대방과 공감하며 다른 집단을 인정하는 인간으로서 매우 고차원적인 기능을 하는 부위가 있다. 이 곳은 30세 정도에 완성되며, 끊임없이 자극(교육 등)하여야 발달한다. 하지만, 알코올 섭취나 수면부족 등으로 쉽게 쇠퇴하는 부위이다. 특히 노화로 인한 뇌세포 손상이 크다. 물론, 세포는 매일 죽어가는 동시에 매일 또 만들어 진다. 그런데, 신경학자들은 노인의 뇌세포는 새로 만들어져도 정보 생성에 연결되는 신경회로에 합류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전두전야의 노화로 이어진다. 그 결과, 자신의 경향이 확고해지며 그 외의 의견은 자동적으로 기각되는 확증 편향이 작동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 논리밖에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신경학적인 측면에서 진상(꼰대) 노인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뇌의 특정부위의 기능이 공감능력을 관장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 부위의 발달과 쇠퇴는 나이든 사람들에 비해서 정도차이는 있어도 젊은 사람들에게도 올 수 있다. 가끔 만나는 직장 후배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하는 푸념이 있다. 업무수행을 위한 정당한 지시 혹은 훈련에 우스갯소리로 6하 원칙을 들이대는 듯이 거부한다는 것이다. Who(네가 뭔데?), What(뭘 안다고?), Where(어딜 감히?), When(왕년에), How(어떻게 그걸 나한테?), Why(내가 그걸 왜?).
후배들이 기한 6하 원칙을 기억 못해서 인터넷을 찾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꼰대의 6하 원칙’이다. Who(내가 누군지 알아?), What(내가 그것을?), Where(여기서?), When(하필 지금?), How(어떻게 그걸 나한테?), Why(내가 그걸 왜?).
심지어 뒤의 두 개는 서로 같다. 관통하는 것은 공감능력의 부족으로 보인다. 신경학자들이 얘기하는 전두전야 부위의 미발달이다.
나카노 노부코의 말대로 이 부위의 지속적인 자극(훈련)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녀의 진단을 빌어 한국사회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경쟁(교육)에 오랫동안 노출된 결과 자기도 모르게 공감능력 부족에 따른 ‘정의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신자유주의를 통과하면서 각자도생, 개인주의의 사고방식이 이를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유투브 등 익명성과 독자성이 보장되는 작금의 SNS의 발달은 이런 현상을 더욱 확장시킬 것이다.
꼰대아닌 어른은……
“좋은 어른이 되려면 말수는 줄이고 지갑은 열라”고 하던데, 말수는 줄일 수 있겠다. 그것보다 지금의 ‘꼰대’같은 습관을 버리기 위하여, 일단 노화되어가는 뇌세포부터 살려 보면 어떨까? 전두전야에서 하는 일이 분석적 사고와 객관적 사고를 담당하는 곳이라 한다. 훈련으로 이 부위의 노화를 지연시킬 수 있다는데, 저자가 소개하는 몇 가지 재미있는 방법을 한 가지로 정리하면, “익숙한 것을 버려라”쯤 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익숙한 것’이라는 말 속에는 ‘현재 그대로’, ‘변화하지 않으려고 한다’를 지나서, ‘안정을 추구한다’까지 나아간다. 확실히 그렇다. 원래도 위험을 감수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이 들면서 가급적 익숙한 것을 찾는 것은 사실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대오각성을 하지 않은 바에야, 그 동안 살아 온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희귀한 경우 일 것이다. 나와 연계된 많은 관계들과 관련된 결정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보다 아이들 표현대로, ‘이 생애에는 이렇게 가지 뭐.’를 선택하게 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무언가 ‘되기’를 해보려면 지금과는 다른 접근을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아도 될 습관이라면 함 바꿔볼만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네비가 가르쳐 주지 않는 내가 알고 있는 길로 가본다든지, 콜레스테롤 저하에 좋다는데 가장 싫어하는 미나리 음식을 먹어 본 다든지, 재미없을 것 같은 책을 골라 읽어 본다든지, 단골 가게를 혹은 단골 메뉴를 바꿔본다든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떼가 함께 쓴 『사고의 본질(Surfaces and Essences)』에서 그들은 ‘사고의 본질은 유추이다’라고 말한다. 그 유추는 ‘범주화’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범주화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자신의 경험이 쌓아 올려 ‘범주’를 만드는 방향과 그 ‘범주’를 불러내어 닥친 상황과 비교를 통하여 추론하는 방향이 그것이다. 노화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기 어려우니 기존의 나의 범주에 맞는 사고(추론)를 우선시하는 게 아닐까? 우선만 하면 좋은데,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나의 범주화만이 옳다고 강요하는 것까지 가게 되어서 탈일 것이다. 그들은 책의 후반부에서 많은 과학적 발견이 유사한 범주의 유추에서 혹은 범주간의 비약을 통한 사고에서 이루어졌음을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 준다. 특히, 유추를 통해 상대성의 원리를 중력에 적용한 아인슈타인의 과학도 유사성을 활용해 통일성을 이끌어 내는 여느 인간 사고활동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범주간의 비약적 유추가 탁월했다는 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 범주간의 비약을 허용하여 사고한다는 것인데, 생각해 볼 문제이다. 먼저, 내 범주를 벗어나 보는 훈련이 필요하겠지.
항상 ‘나의 가치’는 정당한가?를 묻고,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