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크루지 할머니와 명랑한 할머니 사이에서
딸은 자기 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엄마를 종종 ‘스크루지 할머니’라고 불렀다. 맞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괴팍하고 심술궂은 그 스크루지 말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딸이 우리 식구 중에서 비교적 할머니와 잘 지내는 편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무토’ 답게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데다가 눙치는 것도 잘해서 할머니의 사사건건 잔소리도 비교적 가볍게 넘겼다. 난 그 애가 식탁에서 하품할 때마다 무슨 자동반사기계처럼 한 번도 지나치는 법 없이 “넌 어쩌면 그렇게 게으르니?”라고 타박하는 할머니를 (나는 그런 상황이 되면 일단 빈정이 상한다), 오히려 팔을 치켜들고 기지개까지 하면서 “그러게 말이야, 할머니”라고 씩 웃는, 그래서 결국 할머니를 피식거리게 만드는 그 애의 재주가 늘 신기했다. 아무튼 그런 딸애도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는 나에게 “할머니는 정말 스크루지 같아.”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곤 했다.
그러니까 내가 입버릇처럼 “엄마처럼 늙고 싶지 않아”라며 ‘명랑한 할머니’를 나의 노년 이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스크루지-할머니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였다. 나중에 나를 돌봐주는 사람에겐 타박 대신 늘 고맙다고 말해야지, 더운 여름날 자식들이 냉면 사준다고 하면 군말하지 않고 냉큼 따라가야지, 좋으면 좋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담백하고 솔직하게 말해야지… 내가 생각하는 명랑한 할머니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명랑한 할머니’에 제동이 걸리는 일이 최근에 몇 번 있었다. 예를 들면 <녹색평론>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사족이지만, 나의 늙어감을 말하며 지금의 노인처럼 나이 들지 않겠다며 ‘명랑한 노인’ 따위를 에둘러 말하는 짓도 그만뒀으면 싶다. 그럴 바에야 지금 여기의 노인과 명랑하게 수다 떠는 일을 벌였으면 좋겠다.” (소준철, “노인의 자리 만들기”, <녹색평론 187호, 2024 가을> )
“쪼그라들고, 소외당하고 갇힌 노인의 불안과 분노를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노인의 시간’을 살피고, ‘노인의 자리’를 펼쳐줘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나는 저 이야기가 마치 나를 나무라는 소리처럼 들려서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 엄마하고는 명랑하게 수다 떠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마음속에서는 이런 볼멘소리도 터져 나왔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희경은 요즘 젊은 여성들이 꿈꾼다는 ‘귀여운 할머니’ 역시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제로 하는 낭만화라는 점에서 일종의 연령차별일 수도 있다는 지적을 한다.(김희경, ”‘귀여운 할머니’가 되겠다는 소망 속 불안” , 한겨레신문 2024-12-07)
그런데 ‘명랑하고 귀여운 할머니 열풍’은 정말 노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그런 노인이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의 소산뿐일까? 나의 ‘명랑한 할머니’도 그런 것이었을까? 나는 왜 굳이 할머니라는 키워드로 글을 쓴다고 했을까?
2。할머니 열풍의 시조, ‘Korea Grandma’ 박막례!
내가 박막례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7년 봄 뉴욕에서였다. 나는 그때 해외 인문학 네트워크 중 하나인 <뉴욕 크크성>이라는 곳에서 잠시 체류 중이었다. 서울에 있는 인문학공동체 남산강학원의 회원이자 미국 유학생이었던 크크성 주인장은 내 딸과 동갑이었는데 나는 주인장이 학교에 가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도시락을 싸 들고 맨해튼으로 나가 뉴욕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브라이언 파크나 센트럴 파크에서 멍때리며 사람 구경을 했다.
그렇게 놀멍쉬멍 하던 어느 날 크크성 주인장이 나에게 박막례 할머니 유투브를 소개해 줬다. 최근 자신의 최애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유투브가 아직 낯설고 브이로그에 썩 흥미를 느끼진 못했지만, 손녀가 찍은 할머니 영상이라는데 호기심이 생겨 나도 크크성 주인장과 머리를 맞대고 함께 몇 편 보았다. 크크성 주인장이 왜 홀딱 빠졌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유투브 속 박 할머니는 꾸밈이 없었고, 해외여행 초짜다운 실수를 연발했지만, 전체적으로 유쾌한 캐릭터였다.
“생전 처음 탱고리인지 캥고리인지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동물을 쿠란다 마을에서 봤다. 근디 가서 보니까 앞다리는 짧고 뒷다리는 길어가꼬 다친 것 같아서 마음이 엄청 아프더라.
‘너 다리가 끊어져서 그러냐? 오메오메….’… 옆에 한국인 남자가 있기에 말을 걸었다.
‘오메, 이 친구는 다리가 아팠는가 봐요… 뼈가 쭉 빠져부렀어요,,뒷다리를 못 쓰고 막 끌고 댕기잖아요. 어째스까잉…’
‘할머니, 원래 캥거루는 이렇게 걸어댕겨요’
나는 창피해가꼬 말이 안 나와부러따. 그 이후로 그 아저씨를 피해 댕겼다. 캥고리는 뒷다리가 더 길구나. 70년 만에 처음 알았다. ” (박막례, 김유라,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p72)
“염병하게 비싸네”, “허벌나게 맛있네” 같은 박 할머니의 구수하고 찰진 전라도 사투리도 매력적이었지만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난생처음 헬기를 타고 하늘로 높이 올라가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호주 바다의 풍경을 보면서 놀라고 감격하며 이윽고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할머니를 담아낸 손녀의 마음이었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농사, 바느질, 노가다, 파출부, 리어카 과일장사, 엿장사, 꽃장사, 떡장사를 거쳐 오랫동안 “열 평도 안 되는 식당에서 3천 원짜리 된장찌개를 팔아서 삼 남매를 키우”셨던 할머니, 그러다가 70이 되어 치매위험진단을 받은 할머니를 보면서, “인생은 진짜 불공평하다….우리 불쌍한 할머니,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라고 생각하고 회사를 때려치운 27살 손녀, 김유라의 속 깊은 마음이었다. 박막례 할머니 브이로그는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손녀의 존중과 위로의 표현이었고, 할머니와 호주 여행을 하면서 매 순간 할머니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배 위로 올라와 헬멧을 벗은 할머니는 별을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별천지가 따로 없다고, 정말 재미있었다고 좋아하는 할머니 모습을 보니 나도 행복했다. 오랜 시간 가족으로 함께 지낸 사이인데 할머니의 그런 표정은 정말 처음 봤다. 내가 할머니처럼 70세 노인이었다면 다시 저 두려운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까?…그러니까 박막례의 인생 역전은 내가 옆에서 등 떠민 게 아니라, 이날 다시 바다로 직접 그 두 발로 걸어 들어간 할머니의 용기에서 시작된 기적이었을 것이다.” (위의 책, p92)
돌이켜보니 내 딸도 그랬다. 할머니를 스크루지라고 불렀지만, 할머니를 돌보는 데 실제로 손을 보태는 것은 딸이었다. 몇 년 전 엄마가 심한 변비와 변질을 오가면서 똥 컨트롤이 안되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엄마가 보행기를 끌고 거실을 걷다가 갑자기 설사가 터져 나왔다. 걷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바지 사이로 똥이 줄줄 새서 엉덩이도 옷도 마룻바닥도 똥 범벅이 된 날, 엄마도 나도 함께 밥을 먹던 딸도 당황했던 그날. 나를 도와 할머니의 옷을 벗기고, 욕실로 모시고 가서 할머니를 씻겨 드린 것은 딸아이였다. 무엇보다 그날 그 아이는 할머니에게 한없이 다정했다. 어떤 관계도 단순하진 않다.
박막례 할머니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예기치 않게 대박이 터지면서 할머니 열풍의 효시가 되었지만, 애당초 박막례 할머니 브이로그는 할머니 세대와 손녀 세대의 다정한 연대의 산물이자, 늘 몇 가지 앙상한 형용사로밖에 재현되지 않는 ‘할머니’라는 존재의 구체성과 물질성을 우리 눈앞에 현전시키는 사건이었다.
3。 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등 3, 40대 여성 작가 6명의 단편을 모은 엔솔로지, <나의 할머니에게> (다산북스, 2020) 역시 구체적이고 생생한 할머니들을 우리 앞에 선보인다. 이 작품집 속의 여섯 할머니는 누구 하나 비슷한 사람이 없었고, 누구 하나 복잡하지 않은 인물이 없었다.
윤성희의 할머니(「어제 꾼 꿈」)는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1인 가구로 혼자 산다. 복지회관에 나가 구연동화 교실에도 참여하고, 수영도 하고, 물리치료실에서 찜질도 한다. 집 근처 유치원에서 열리는 동시대회를 구경하는 것도 낙이었다. “아빠랑 나는 발가락이 닮았어요. 하지만 냄새는 안 닮았어요”라는 동시에 사람들은 웃었지만, 주인공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라는 동시가 가장 마음에 들어 비가 올 때마다 창밖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한참 있어 보기도 한다. 그 유치원이 사라지고 갈치조림집이 들어서자, 속이 상해 그 갈치조림집은 절대 가지 않는다.
남편이 죽은 지 10년, 더 이상 제사상을 차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후 늘 제사 전날 꿈에 찾아오던 남편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재혼해서 키웠던 남편의 아들과 딸도 지 아버지 제사인데 소식이 없다. 아마도 그 전해 명절, 아파트를 팔자는 말을 거절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들은 엄마 혼자 사는데 방 세 개 짜리 집이 뭐가 필요하냐고 말했고, 딸은 아버지 보험금도 다 남동생 줬는데, 집은 양보 못 한다고 버텼다. 주인공은 이럴 거면 아버지 제삿날 오지도 말라고 말했었다.
대신 여동생이 손녀딸을 데리고 집에 왔다. 돈에 인색했던 남편이 돈을 빌려달라는 여동생네의 청을 거절한 후 일체 왕래가 없었는데, 전날 꿈에 형부가 나타나서 용서해달라고 했는데 용서를 못 해준 게 걸렸다며 언니네 집을 찾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두 자매는 탕수육을 시켜 그걸 안주 삼아 인삼주를 마시고 여동생 손녀와 공기놀이도 한다. 그 아이는 제 할미를 닮아 공기를 진짜 잘한다.
다음 날은 그 아이의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 애가 원하는 건 “마녀 할머니 놀이”였다. 집 근처에서 버려진 장난감 반지, 솔방울, 낙엽, 새털, 단추, 땀방울, 손톱, 오래된 스티커를 커다란 냄비에 넣고 막대기로 휘휘 저으면서 수프를 끓인다. 그리고 각자 소원을 비는 것이다. 손녀의 소원은 자기 머리카락 잡아당기는 녀석 코피 흘리는 것, 무지개 열 번 보는 것이다. 여동생의 소원은 자기가 오만 원 냈는데 오천 원 냈다고 우기던 생선 가게 여자 이틀 동안 감기 걸리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아들 따라다니는 꼬마 귀신 사라지게 해달라고, 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만약 손주가 태어나면 그녀는 동화구연을 해주는 할머니가 될 것이었다.
손녀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백수린의 할머니(「흑설탕 캔디」), 난실 씨는 수십 년째 160쎈티미터에 49킬로그램, 가지런한 백발 단발머리를 고수하는 세련된 노인이다. 엄마가 죽은 후 아들 집에 와서 두 손주를 키웠는데, 외모뿐 아니라 대학물을 먹은 신여성답게 일본어도 잘하고, ‘에델바이스’를 영어로 부를 줄도 알았고, 영양 밸러스를 고려하여 도시락을 싸줬고, 무엇보다 바이엘 상하권을 직접 가르쳐 줄 정도로 피아노를 칠 줄 알아서 손주들은 엄마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의 해외주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간 프랑스에서 할머니의 고독은 눈처럼 쌓이고, 그 눈은 점점 두텁고 단단해져만 간다. 하지만 각자 낯선 나라에 적응하느라 바쁜 다른 가족은 아무도 할머니의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피아노 소리에 홀려 따라가면서 알게 된 옆집 할아버지 브뤼니에씨. 손녀는 할머니가 남긴 일기를 통해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르는 할머니의 로맨스를 복구한다.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브뤼니에 씨의 집에 찾아가 피아노를 치고,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함께 CD 플레이어로 바흐나 모차르트를 듣고, 볕이 좋은 날이면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손녀는 할머니가 두려워했던 늙음은, 마음이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생은 늘 배신의 연속이고 그것을 알 만큼 아는 할머니가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어른거리는걸” 보면서,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닫는다.
할머니 난실 씨와 옆집 할아버지 브뤼니에씨의 짧은 로맨스는 어떻게 마감되었을까? 둘 사이의 이별 장면은 어떤 것이었을까? 손녀는 상상해 보지만 진짜가 무엇이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마지막으로 알아차린 것, 할머니도 달큰한 욕망, 고통스러운 삶의 의지가 있었던 생생한 인간이었다는 것! 어쩌면 난실 씨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할머니가 그러할지도 모른다.
4。 할머니라는 세계
나는 여섯 편의 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윤성희의 할머니에 대해서는 뱃속에서부터 스멀스멀 슬픔이 차올랐고, 백수린의 난실 할머니에게서는 엄마가 많이 떠올랐다. 소설 속 난실 할머니처럼 우리 엄마도 평생 일기 비슷한 것을 썼다. 그녀가 남긴 수십 권의 비망록에는 “거래처 사장 000와 송어회 먹음”, “00 남편 병문안, 약 지어감”, “집에서 쉬었다.”, “00(둘째 딸) MT 감”, “한의원에서 침 맞음”, “경남저축은행 적금 ” “교회 오후 예배까지 봄. 00(아들)위해 기도함” “새벽 5시 44분에 성남시 형사들(대공과)이 수색 영상 가지고 옴” 같은 메모가 빽빽이 적혀있다. 그 사이에 문장으로 된 어떤 날의 짧은 일기, “몸이 많이 아프다.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나 보다. 000 만남,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의논했다. 너무 내 주위엔 사람이 없다.” 그 시절, 나는 엄마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00 아저씨. 아저씨가 등장하는 메모는 유독 짧다. 경동시장에 갔다, 점심을 먹었다, 이런 식으로. 엄마와 아저씨는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그런데 난실 씨만은 아니었다. 최은미의 「11월행」에서는 나 은형과 나의 엄마 규옥, 나의 딸 하은, 이렇게 삼 모녀가 수덕사로 템플스테이를 가는데, 나는 그 속에서 나, 엄마, 딸이 함께 다녀온 양양 바닷가가 생각났다. 우리도 소설 속 삼 모녀처럼 아주 살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심하게 데면데면하지도 않은 적당한 관계를 지니면서 여행했다. 은형이 “규옥과 자신 사이엔 어떻게 해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라고 생각한 것처럼, 평생 나도 엄마와의 관계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나와 엄마는 그렇게 먼 거리에 있었던 사람일까? 내 딸도 자기와 나는 어떻게 해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까? 모를 일이다. 양양 바닷가에서 찍은 할머니와 손녀의 마주 보는 듯 아닌 듯한 투 샷은 오랫동안 우리 집 벽에 걸려있었다.
내가 ‘할머니’에 대해 써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내가 어머니 돌봄 10년 동안 썼던 많은 글 속에 오로지 돌봄을 수행하는 나의 희로애락만 표현되어 있을 뿐 억지로 돌봄을 받게 된 엄마의 희로애락은 거의 기록된 게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나서였다. 당신 어머니 세대와 달리 갑자기 늘어난 노년, 소위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엄청나게 큰 노년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게 된 현실이 엄마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죽을 수도 그렇다고 제대로 살아지지도 않는 말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엄마를 애도하고 싶었다. 그것은 엄마의 삶 혹은 그녀 세대의 삶을 다시 써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솔직히 나는 (어쩌면 자식들인 우리 모두) 엄마의 삶을 몇 가지 피상적 사건이나 정보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의 감춰진 욕망과 공포, 신산한 삶 속에서도 절대 삭제되지 않았을 일상의 기쁨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에둘러가기로 했다。엄마의 삶을 다시 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할머니들, 존재했으나 제대로 대접받은 적 없고, 피상적으로 재현되기는 하나 “구체적으로 응시된 적이 없는”(오정희)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찾아보고 다시 쓰고 싶었다. 여섯 작가의 여섯 할머니도 이렇게 다른데 세상의 할머니들은 얼마나 다채로울까? 할머니라는 세계를 탐사하는 내 시각이 넓어지고 깊어지면 내 엄마에 대한 이해도, 뒤늦은 애도도 가능한 게 아닐까? 그리고 나의 노년도 더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제 그런 기대를 갖고 ‘할머니라는 세계’로 진입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