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노트와 유언장
요즘엔 흔치 않지만 10년 전만해도 컴퓨터를 쓰다가 겪게 되는 가장 무서운 일은 갑자기 모니터가 파란 화면으로 바뀌면서 ‘알 수 없는 오류로 시스템을 다시 시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었다. 진행 중이던 작업은 저장되지 않은 채로 모두 날아가고 컴퓨터가 재시동 되는 것을 바라보며 황당함은 분노로 바뀌곤 했었다. 그런데 만약 나의 삶이 어느 날 비정상적 종료(사고)를 하거나 어떤 오류(질병)에 의해 주체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운 상황이 온다면? 내가 진행하고 있던 일들을 비롯해 누군가에게 하려던 말들, 추후에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애정을 주었던 대상과 물건들은 황망함에 빠지거나 주인을 잃게 될 것이다.
사실 나는 비행기를 타거나, 고가도로 위에서 운전할 때, 스릴넘치는 놀이기구를 탈 때, ‘이 상태로 추락해서 내가 죽는다면’이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러면 무섭거나 두렵다는 생각보다 ‘갑자기 내가 죽으면 뒷 일은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든다. 저널리스트인 윌리 오스발트는 91세에 조력 존엄사를 선택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라는 책으로 엮었다. 존엄사의 과정을 다룬 것도 흥미로웠지만 나는 저자의 아버지가 평소 해 왔던 죽음의 준비가 인상적이었다. 부부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면 아이들에게 미리 ‘사망의 경우’라는 제목이 적힌 서류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 서류 안에는 유산의 분배, 가장 먼저 할 일, 장례절차와 규모, 마지막 유지(遺旨), 부고를 보낼 명단, 장례식장에서 낭독할 고인의 이력 등이 적혀있었으며 아버지는 이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일상적인 상황이 종료되면 나의 다짐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곤 해서 나는 아직 공식적인 엔딩노트를 작성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엔딩노트>(스나다 마미, 2011)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감독의 아버지 스다나 도모아키가 위암말기 판정을 계기로 엔딩노트를 작성하고 그 안의 to-do list를 차근차근 실행하며 담담히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43년간 샐러리맨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후 아내와 주말부부로 지내며 나름의 독신생활을 즐기던 스나다 도모아키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위암 4기 판정을 받는다. 그의 나이 69세. 아내와 가족은 충격에 빠지지만 그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유언보다 사적이고 법적인 효력이 없는 매뉴얼’인 자신의 엔딩노트에 먼저 to-do list를 적는다. 죽기 전 버킷리스트 같은 것이다. 그 내용은 주로 가족과의 시간 보내기와 유산 분배, 자신의 장례준비를 위한 일들이다. 영화가 죽음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의연한 태도로 인해 경쾌함이 느껴진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두가 이렇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최빈도 죽음은 요양시설에서 혹은 응급실 또는 중환자실에서 맞는 죽음이다. 그것이 나의 미래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설사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준비된 유언장이나 엔딩노트가 있다면 남겨진 사람과 떠나는 사람은 고민과 아쉬움, 그리고 갈등 상황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나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를 맞이한 일본에서는 늘어나는 고령 1인가구를 중심으로 생전에 자신의 삶을 잘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인 종활(終活)이 서비스산업으로 확산, 발전되고 있다. 종활에는 엔딩노트 작성, 장례방식 준비, 유언장 작성 등이 포함되지만 죽음준비에 국한되기 보다는 여생에 대한 종합적인 라이프플래닝의 성격을 지닌다. 종활서비스에서는 특히 고령 1인가구를 주목하는데 자녀 없는 부부, 독신, 배우자와 이혼했거나 사별한 사람, 상속인이 아무도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에게는 특히 재산처리, 장례, 유품정리 등을 가족 대신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신탁서비스도 등장했다. 반면 가족이 있는 경우 사후 상속분쟁이 증가함에 따라 관련법을 지정해 2020년 7월부터 자필 유언장 공적 보관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법에 의해 약 35000원을 지불하면 각 지역 법무국에 위치한 보관소에 유언장을 맡길 수 있다. 자필 유언장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법무국(우리나라의 등기소 역할을 하는 곳)에 보관할 수 있다. 보관 후 유언자가 사망하게 되면 지정된 사람에게 자동 통지된다. 원본은 유언자 사후 50년, 이미지파일(스캔본)은 사후 150년까지 보존된다.
자료 : 한국일보
유언장이든 엔딩노트든 아직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법적인 재산 상속의 범주를 넘어서 사후 자기결정권을 발휘할 수 있는 좀 더 포괄적인 유언장을 작성해 보는 것은 어떤가.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할 항목들을 꼽아보자.
-재산의 정리(부동산/예금 등 금융자산의 상속이나 처분, 채권 및 채무 현황, 소유 물건들에 대한 처분, 기부)
-디지털 유산 정리(가입 사이트의 계정정보, 온라인상의 글/댓글, SNS, 이메일, 디지털 선물 등)
-장례 방식, 장례식(빈소)여부, 장례주관자, 부고 발송 명단
-반려동식물의 돌봄
-유언집행 담당자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
유언장은 재산 상속과 처분을 위해 꼭 필요하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남겨줄 것이 집 한 채인데 유언장을 쓰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자녀들에게 상속다툼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1인가구의 경우 원하는 사람에게 상속을 하기 위해서는 유언장이 필수이다. 유언장이 없으면 법에 따라 평소 관계가 소원했던 친척에게 재산이 상속되기 때문이다.
사후 온라인에 남긴 글들과 각종 SNS에 남긴 글, 사진, 파일들의 처분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2050년이면 페이스북 사망 계정의 수가 2억 7,860만명에 이를 예정이라고 한다. 이 거대한 ‘디지털 묘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과 에너지 역시 어마어마하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포털, SNS 등에서 고인을 위한 디지털유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 미리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장례 방식이나 절차에 대한 것도 유언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부고를 전할 명단을 정리하고 희망하는 장례 의식을 지정한다. 함께 했던 반려동식물을 맡아줄 사람 역시 미리 정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임종을 대비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인사를 적어둔다. 그리고 유언장을 전반적으로 집행할 사람을 정한다.
유언장이 필요할 때
그런데 문제는 아직 우리나라에 유언장에 대한 인식과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난 2023년 9월에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이 ‘유언증서 보관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통과되지 않았다. 이 법률안은 가정법원 또는 지방법원에 유언보관소를 두고 유언의 위조와 변조, 분실과 훼손을 방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일본의 방식과 유사하다. 유언자는 유언보관소의 ‘유언보관관’에게 유언증서의 보관과 열람을 신청할 수 있다. 또한 유언자가 사망할 경우 보관관은 지체 없이 관련 상속인에게 유언증서의 보관과 사실을 통지한다.
자료 : 법률신문
꼭 필요한 일임에도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유언장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죽음을 준비하는 일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문화에 더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유언장을 쓸 만큼 재산가는 아니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상속 분쟁은 이제 더 이상 대기업회장님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산층에서의 상속분쟁도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2년 기준 8년간 4배가 늘었다고 한다.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가는 생명의 법칙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그 방식은 모두 다르다. 혹여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떠나게 되더라도,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이 글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1인 가족인데 사후 재산정리와 유품정리를 특정한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면,
남겨줄 집은 한 채인데 자식은 여러 명이라면,
갑자기 치매에 걸려 가족이나 지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게 될까 걱정이라면,
SNS로 만난 친구들에게 사후 작별인사를 남기고 싶다면,
내가 보관하고 있는 디지털 유산 중 지우고 싶은 것과 남겨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혹시 그렇다면 지금, 유언장을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