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황홀한 역사』바트 어만, 갈라파고스
무함마드 평전을 읽은 이후에 나는 간혹 <꾸란>을 펼쳐서 읽고 있다. <꾸란>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죽음 이후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깊이 읽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 『꾸란』이 계시하는 사후세계는 그동안 알아온 기독교의 사후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꾸란』 역시 ‘언젠가 죽은 사람들이 모두 부활하는 날이 올 것이며, 그날이 오면 모든 사람이 최후의 심판을 받고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란』이 계시된 7세기경에 아라비아 반도 주변의 정황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함마드는 메디나로의 이주(히즈라) 이후에 유대인 공동체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또 메카와 메디나로부터 멀지 않은 지금의 예멘땅은 당시 기독교 왕국이었다. 아라비아 반도를 오가는 상인들 중에도 기독교인이 적지 않았을 것이며 아라비아 바깥에는 비잔틴 제국이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아랍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생각했고,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도 예언자의 한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맨 마지막에 탄생한 이슬람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슬람의 죽음관 이전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후세계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천국과 지옥이라는 관념의 역사에 대한 책, 바트 어만의 『두렵고 황홀한 역사』를 만나게 되었다.
두렵고 황홀한 역사, 애매하지만 근사한 우리말 제목과 달리 이 책의 원제는 『Heaven and Hell』(천국과 지옥), 부제는 ‘A History of Afterlife’(사후세계의 역사)다. 부제가 말해주듯이 저자는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관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시작하여 호메로스를 거쳐 플라톤까지,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까지 해박한 지식을 통해 촘촘하게 개념의 역사를 그려나간다. 저자는 한때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말 그대로 믿었던 독실한 근본주의 신앙인이었다. 성서에 대한 공부는 그를 근본주의에서 진보주의적 신학으로 이끌었다. 결국 신앙의 세계를 떠났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기독교의 역사·문헌·전통에 대한 뛰어난 해설가이자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성서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바트 어만의 안내를 받으며 사후세계, 특히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자.
초기 구약성서에는 죽음 이후가 없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변방 갈릴리에 태어난 유대인으로 종교적 삶을 시작했다. 유대교의 성전인 히브리어 성경들은 사후세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후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불가피성과 불가역성에 주목했다. 「욥기」를 보자.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르듯,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욥기」 14장 11~12절)
「욥기」는 생은 단 한 번뿐이며, 사후의 삶은 없다고 말한다. 「시편」의 저자 역시 죽음을 통탄하며 이렇게 기도한다.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편」 104편 29절) 이렇게 죽음 이후에도 죽음이 계속 된다는 표현 이외에 다른 표현을 찾자면 그것은 ‘스올’로 간다는 표현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스올은 60번 정도 등장하는데, 스올은 대개 죽은 사람이 묻히는 곳, 무덤 혹은 구덩이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 스올은 저승과 같은 장소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곳이 저승이든, 무덤이든 스올은 긍정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스올은 피해야만 할 것이었다. 구약성서에는 죽은 후 의로운 자는 축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만일 상이 있다면 그것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었다.
고대 사후 세계관 연구의 선구적 학자이자 유대교 연구자였던 앨런 시걸(1945~2011)도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가 알아볼 만한 그 어떤 지옥과 천국 개념도 등장하지 않으며, 죄인이 받을 명백한 심판과 벌도 의인이 받을 축복 넘치는 상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후가 나오는 구절 대부분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왕국 혹은 유다왕국의 멸망 이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예언자들의 시대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왕국의 부활과 관련된 표현이었을 따름이다.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기원전 8세기의 「이사야서」, 「호세아서」, 「아모스서」부터 유다왕국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 기원전 6세기의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하박국서」까지 모두 그렇다.
묵시론적 비전과 함께 육신의 부활 개념이 등장하다
저자는 종말의 때에 개인의 육신이 부활한다는 생각은 예수가 죽기 전 200여년 경에 생겨나서 예수가 활동한 시대에는 유대교의 일반적인 신조가 되었다고 말한다. 유대교 내에서 개인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앞선 고전적 예언자들에 따르면 고난은 하나님이 제시한 길을 따르지 않은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질문했다.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죄를 범한 자들이 떵떵거리고 사는데, 의로운 자들은 고난을 겪는 부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그들이 생각해 낸 답은 하나님에 대적하는 사탄이나 바알세불과 같은 존재가 의로운 자들을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사탄의 지배는 오래 가지 않고 마침내 신이 그들을 제거하는 심판의 날, 종말의 날이 올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묵시론apocalypticism이다. 묵시론자들은 지금 세상이 악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종말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고, 그날이 되면 하나님이 의로운 자들에게 상을 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가 되면 죽은 자들의 육신도 부활할 것이다. 육신의 부활이라는 아이디어는 묵시론에 기원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비묵시론적 전통과 관련이 깊다. 「열왕기」에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이 죽은 사람을 되살려 낸 일화가 나온다. 「창세기」의 에녹도 하나님이 살려냈다.(「창세기」 5장 21~24절) 사실 그렇다. 이미 멸망한 국가 전체를 되살리기도 하는 하나님이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덤에 묻힌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묵시론자들의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히브리어 정경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쓰인 「다니엘서」에는 묵시론적 전망이 나타난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자신이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 유수를 겪은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시대적 배경은 바빌론 억류가 아니라 기원전 2세기 셀레우코스 왕조 하에서 그리스화를 강요당하며 유대교의 전통을 금지당하던 때다. 헬라화를 수용한 유대인도 있었지만 부당한 억압을 참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마카베오 전쟁(기원전 167년)을 일으켰고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기까지 민족의 독립을 지켜냈다. 유대인이라는 것을 부정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쓰여진 「다니엘서」는 히브리어 정경 중에서 종말의 때에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라고 최초로, 또 유일하게 예언한 경전이다. 부활한 자들은 천국으로 들어 올려져 천사들과 같이 생활하는 반면 악한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한다. 의로운 자든 악한 자든 되살려져 영원한 천국의 삶과 영원한 수치의 삶을 산다. 여기서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불멸이 그리스적인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니엘서」의 불멸은 초기 히브리어 성경에서 필멸의 존재로 그려졌던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자 상이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전쟁으로 세워진 제국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화를 촉진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 헬라화에 대한 저항 속에서 쓰여졌지만, 헬레니즘의 영향이 녹아 있었다. 다니엘서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외경 「에녹1서」와 「마카베오2서」 등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사후 부활과 순교자들에게 영생이라는 상이 주어진다는 믿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로부터 200년 뒤에 나온 외경인 「마카베오4서」는 사후 세계관에서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난다. 그 변화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영혼들이 체류하는 중간상태가 도입된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먼저 부활한다. 최종 부활인 죽은 육체의 부활은 최후의 심판까지 지연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는 헬레니즘의 영혼불멸 사상이 유대교의 묵시론적인 사후심판과 부활 안으로 스며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히브리즘의 헬레니즘에 대한 저항과 수용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나 더 확인해 둘 것이 있다. 적어도 「다니엘서」까지는 악인에게 예정된 벌이 소멸이었다면 이제 영원한 처벌과 고통이 도입되어 천국과 지옥이라는 관념으로 발을 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천국과 지옥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4대 공관 복음서인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통해 전해진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마가복음」은 예수 사후 30년경(기원후 70년경)에 쓰여졌다. 이후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순으로 만들어졌는데 마지막 요한복음은 기원후 90년에서 9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는 「다니엘서」의 묵시론적인 관점을 지지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 1장 15절) 예수는 사람이 죽으면 지옥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가 가르친 것은 심판의 날이 곧 올 것이며, 그때에 영생이라는 상과 소멸이라는 벌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에는 심판의 날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교도까지 포함된다. 심판의 기준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선행과 악행이다. 상을 받는 자가 한 일은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본” 것이다. 상을 받은 이들은 놀라서 묻는다.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다고. 그들이 듣는 답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태」 23장 40절)이다. 예수는 우리가 서울역 앞에서 만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말한 적이 없다.
예수는 자신의 세대에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가」 9장 1절) 그런데 예수 사후 그날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그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조정이 도입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사도 바울: 예수를 믿는 자만이 부활한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만큼 중요한 사람이 바울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라고까지 말해질 정도로 바울의 신학은 기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울은 예수 사후 30년경에 기록된 「마가복음」에 앞서 직접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남겼다. 신약성경에 실린 바울의 편지는 모두 13편이지만 학자들은 이 중 7편만이 진서이고 나머지는 바울의 이름을 빌린 편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바울은 매우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을 단호히 부정한 사람이었다. 그로서는 범죄자들이나 받는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인 주장이었다.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인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서던 어느 날 바울은 길 위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를 만나고 극적으로 회심했다. 이후 바울은 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 곳곳에 초대 교회를 세우며가르침을 전했다. 그는 기원후 30년대 중후반에서 60년대까지 활동했다. 그러니 바울의 편지는 「마가복음」보다 먼저 쓰여진, 기독교 최초의 문서다.
바울도 심판의 날에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의로운 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구원이 오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온다고 설교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가 닥치는 날 죄와 죄인들이 당할 멸망을 피해갈 수 있다.(「로마서」) 구원론의 차이는 예수와 바울 사이의 가장 큰 차이였다. 바울의 편지는 오직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만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부활이란 무엇이었을까?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난 땅에 묻힌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영광되게 변한 육신, 즉 불멸의 육신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왜 이 점을 중시했을까. 그것은 그가 편지를 보낸 코린토스 교회의 헬라화된 신도들이 영혼불멸에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불멸론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필멸하는 육신이 구원을 방해하는 문제의 원천이라고 본다. 육신은 분노와 욕정의 근원이고 노화하고 썩고 순수하지 않다. 오직 영혼만이 이성적이고 순수하다. 영생이란 마땅히 육신을 벗어던지는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육신이 부활한다는 생각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바울은 육신의 부활의 근거를 예수의 부활에서 찾았다. 예수가 육신을 갖고 부활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럴 것이다.
천국과 지옥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유대인들이었던 것과 달리 교회에는 그리스 문화에서 자란 이교도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에게 묵시론은 당연한 것일 수 없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초점은 점차 사후 상과 벌, 그리고 영생으로 옮아갔다. 그런 변모는 공관복음서에도 나타난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묵시론적 믿음을 고수한 것과 달리 「누가복음」은 덜 묵시론적이었고 「요한복음」은 비묵시론적이었다. 「요한복음」보다 더 늦게 저술된, 외경인 「도마복음」은 반묵시론적이다.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의 우화에서는 사후에 부자는 불구덩이에서 고문을 받고 나사로는 천사에게 몸이 들려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 부자와 나사로의 사후의 삶을 비교하는 우화는 예수와 바울이 생각한 적이 없는 사후세계의 고문을 제시한다. 누가가 쓴 것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에서는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이야기가 나온다. 스데반은 돌멩이에 맞아 죽는다. 「사도행전」은 죽자마자 스데반의 프뉴마(영혼)은 천국으로 가서 예수와 함께 거했다고 전한다. 스데반은 죽자마자 상을 받는다. 이와 달리 비묵시론적 성격이 강한 「요한복음」에는 사후의 상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이미 영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죽었던 나사로는 죽음에서 살아났다. 심판의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부활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 5장 24절) 1945년에야 발견되어 그 존재가 확인된 「도마복음」은 더 급진적이다.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다. 다만 너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도마」 말씀 51)
「도마복음」의 탈묵시론적인 가르침은 교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다. 2세기가 되면 기독교인들은 영원한 상과 영원한 벌에 대한 이야기인 천국과 지옥 개념을 더 선호했다.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육신의 부활에 대한 개념을 조롱하자 교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의 타당성을 변론했다. 그중에는 육신과 영혼이 함께 저지른 악에 대해 영혼만 처벌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정교하게 사유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는 이미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종교가 된 뒤였지만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답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의 마지막 세 권을 사후세계를 논하는데 할애했다.
그리고 연옥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옥의 고통을 세세히 묘사하기보다는 ‘영원한 고통이 가능한가’ 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불길에 던져진 육체가 어떻게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인간이 잠깐 저지른 죄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신국론」은 이런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정의로우며 합리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허나 우리는 악한 자들의 공과에 따라 영원한 불이 각각 다른 비율로 주어질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 결과가 모두의 덕에 맞춰 차등을 둬서 불의 온도를 달리함으로써 이루어지건, 아니면 불의 뜨거움은 동일하나 모두가 똑같은 강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식으로 이루어지건 말이다.”(「신국론」 21.16)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영원한 고문이든 영원한 황홀경이든 최종결과는 최후의 심판의 날에 결정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사망과 최종 부활 사이에 죽은 자는 어떻게 거할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바울처럼 육신 없는 영혼이 처하게 되는 중간상태를 상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남는다. 선택지는 천국과 지옥밖에 없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죄를 씻어내면 천국에 갈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사람들을 연옥의 교리로 이끌었다.
사실 구원 이전의 정화의 장소라는 관념은 기독교 이전부터 있었다.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사후세계와 관련하여 죄를 용서받기 전에 벌을 받는 장소로 간다는 신화를 도입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70~기원전19)도 죽은 자가 축복받은 땅인 엘리시온에 보내어지기 전에 옛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 텍스트에서 구원받기 전에 지독한 고난을 치른다는 아이디어를 주장한 것은 「베드로묵시록」이다. 이 책은 기원후 2세기에는 확실히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문서는 19세기 말에 이집트의 어떤 무덤 발굴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베드로 묵시록」은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그린 일종의 사후세계 가이드북이다. 여기에는 총 21가지의 죄와 끔찍한 형벌이 등장한다. 이 벌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천국의 묘사는 두루뭉술하다. 이 텍스트에는 천국에 간 사람이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형벌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관념이 등장한다. 이런 생각이 연옥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엽에 저술된 「바울 묵시록」은 아주 인기가 높았다. 이 텍스트가 묘사하는 지옥에는 이교도가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이 더 많았다. 더이상 기독교를 믿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자 교회 안에는 경건함의 정도가 다른 신도들이 넘쳐났다. 그런 상태에서 천국과 지옥은 너무나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였다. 죄의 정화라는 개념은 하느님의 정의(正義)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을 열어 주었다. 이제 상벌에도 정도의 차이가 도입된 것이다. 기원후 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신학적으로 사후 정죄 개념을 긍정했다. 연옥purgatory이라는 용어는 최종적으로 12세기에 만들어졌고,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나가며
우리는 가장 오래된 히브리 성경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길고 긴 역사를 통해 기독교 안에 천국과 지옥 관념이 자리잡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탐구는 결코 유대교와 기독교의 과정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바트 어만은 공들여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문학작품을 검토하며 사후세계에 대한 헬레니즘 문화의 관념이 유대-기독교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한다. 물론 우리가 살펴보았다시피 천국의 관념은 일찍이 유대교에도 있었다. 그러나 지옥은 달랐다. 유대교에서 천국이 영생의 낙원이라면 악인들에게 주어진 벌은 ‘소멸’이었다. 죽음이 가장 큰 벌이었지, 지독한 고문과 형벌로 가득 찬 지옥은 없었다. 그래서 바트 어만은 “기독교의 지옥Hell 개념은 ‘헬’레니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죽으면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나, ‘천국과 지옥’의 표준적 교리가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슬람의 죽음관을 유대-기독교와의 영향관계 속에서 읽어낼 작은 실마리를 얻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바트 어만의 안내를 받으며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죽음관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게 하는지와 같은 앎에 더 가까워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을 탐구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토머스 머튼이나 시몬느 베유 같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알 수 있는 글을 읽었어야 하는 것일까? 복음서나 바울의 편지를 읽고 죽음을 성찰하는 글을 써보아야 하는 것일까? ‘종교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들고 지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나의 고민은 더 깊어지고 있다.